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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ul 22. 2024

<23> 노력과 체념의 경계에 서라

<중용>

-대부분의 행복은 노력의 산물이다

-아름다운 포기는 용기일 수 있다



“노력과 체념 사이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용을 지켜야 한다. 노력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이론과 체념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이론은 저마다 극단적인 지지자를 갖고 있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게으름뱅이가 행복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노력의 결과로 얻는 성과 없이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진정한 행복은 반드시 일정 수준의 성공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돈과 권력, 명예와 같은 세속적 성취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열정적인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 대부분의 행복은 노력의 산물이다. 인내심을 갖고 끈기 있게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거머쥘 수 있다. 행복 탐구자들은 땀과 눈물 없이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데 대체로 동의한다. 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싸우고 노력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행복을 찾는데 세속적으로 반드시 성공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성공과 행복은 별개라고 말한다. 남이 가진 세속적 소유를 부러워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성공을 위해 가진 것 모두 바쳐 노력하는 대신 체념하는 사람에게도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이다.


삶에서 노력과 체념은 정반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행복을 얻는데 어느 쪽이 더 유리할까? 생각이 두 가지로 확연히 갈릴 수 있다.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포기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다.” 성공이 행복의 필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체로 전자를, 성공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후자를 지지할 것이다. 하나의 정답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이 지점에서 러셀은 ‘중용(中庸)’이 중요하다고 했다. 첫머리에 소개한 문장은 그의 저서 ‘행복의 정복’에 나오는 말이다. 인생에서 노력과 체념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한데, 그것을 위해서는 중용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중용이란 사전적 의미로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하며, 떳떳하게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말한다. 편견이나 편향됨이 없음을 뜻하며,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공자, 석가모니,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두 이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삶의 진리라 해서 크게 틀리지 않다. 중용의 도를 지키고 살면 십중팔구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행복의 정복’에서 러셀은 “훌륭한 인생이라면 여러 활동들 간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고, 다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특정 활동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그는 인생에서 효율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열정적인 사람들은 노력의 이론을 강조하는 반면 성직자나 신비주의자들은 체념의 이론을 강조하는데, 각각의 이론은 완전무결한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자칫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러셀도 행복을 위한 노력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신이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힘들여 쟁취해야만 하는 대상이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내외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행복은 아주 드문 경우가 아니라면 무르익는 과일처럼 운 좋게 저절로 입안으로 굴러들어 오는 법이 없다고 했다.


당연한 이야기다.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은 사람이 중요한 시험에 합격할 리 없고, 경제 뉴스 제대로 챙겨보지도 않는 사람이 주식에서 큰돈 벌 리도 없다. 자녀를 정성 들여 키우지 않은 사람이 그 자녀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을 리 없고, 소개팅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이 멋진 배우자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상만사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서 행운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자 어리석음일 뿐이다. 큰 성공과 행복을 거머쥔 사람은 대부분 노력가다. 노력이 필요할 때는 젓 먹던 힘까지 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뤄낼 자신이 있다면 남다른 인내와 끈기로 칠전팔기(七顚八起)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러셀은 인생에서 피나는 노력 못지않게 체념도 중요하다고 했다. 이것이 아니다 싶을 때는 희망을 버리고 과감하게 단념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을 찾아가는 길에 체념이 담당하는 역할은 노력이 담당하는 역할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했다.

 

러셀은 말한다. “진정으로 중요한 목적을 추구하는 일을 할지라도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의 평화를 끊임없이 갉아먹도록 방치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끈질긴 노력을 중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 약한 사람의 어이없는 포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러셀이 중용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지, 아니면 적절한 선에서 체념하고 말지를 결정하는데 ‘중용의 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도록,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목표 지점을 향해 맹렬하게 달리다 희망을 버리고 단념하는 것은 대부분 실패에 해당한다. 하지만 중용의 의미를 대입하면 반드시 실패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체념은 단순한 포기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정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이유로 현실을 무시한 채 한쪽으로 치우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중용이라 해서 산술적 중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엉거주춤하거나 우유부단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목표를 향해 전진하다 원래 계획이 무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거나, 상황 변화로 인해 계속 나아가는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판단될 경우 과감하게 멈추는 것이 현명하다. 불가능한 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과감하게 중단하는 것이 바로 체념이다. 절망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체념이 가리키는 포기라면 희망의 결단이기에 용기라고 할 수도 있다. 아름다운 포기라서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력과 체념의 경계선에 정확히 올라서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 둘은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다. 전진이냐 중단이냐를 결정할 때 참된 경계선에 서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주어진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경계선에 선다는 것은 상호존중을 의미한다. 노자가 말하는 ‘유무상생(有無相生)’과 일맥상통한다. ‘하나의 존재는 그것과 대립하는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존재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 너와 나의 경계, 선과 악의 경계…. 끝까지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이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는 반드시 경계선에 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용이다.


공자는 말했다. “중용의 덕은 최고의 덕이다.” 나는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중용에서 참된 행복을 찾은 사람으로 20세기 중국의 지성이라 불렸던 린위탕(林語堂)을 꼽는다. 그의 저서 ‘생활의 발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삶의 목적은 주어진 시간 동안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이상을 잊어서도 안 된다. 돈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돈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 가족을 사랑해야 하지만 가족만 사랑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 세상 일은 단순하지 않다. 인생은 산수가 아니라 수학이다. 변수도 있고 미지수도 있다. 너무 쉽게 판단하고 함부로 결정해선 안 된다. 린위탕의 말처럼 현실도 중요하고 이상도 그만큼 중요하다. 돈은 행복을 부르기도 하고 그것을 쫓아내기도 한다. 세상만사 경계에 서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러셀은 노력과 체념의 경계를 설명하며 거창한 일에 한정하지 않았다. 지극히 사소한 일상에서도 이를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삶의 중요한 목적에 치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차적인 일은 체념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걱정이나 안달, 짜증을 유발하는 언행 따위는 경계선에 서서 손쉽게 무시할 수 있다고 했다.


“현명한 사람은 가정부가 닦아내지 않은 먼지가 있는지, 요리사가 익히지 않은 감자가 있는지, 굴뚝 청소부가 쓸어내지 않은 검댕이 있는지 감시하지 않는다.”


가진 것 많은 사람이 이런 사소한 것 점검하고 따지는 노력을 해서 무슨 행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누구나 경계선에 정확히 설 수만 있다면 마음에 평화가 깃들 것이다. 때론 체념이 삶의 탁월한 지혜일 수 있다. 체념을 아름다운 포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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