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의 한 구성원임을 자각하고, 우주가 베푸는 아름다운 광경과 기쁨을 누린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세상과 인류에 대해 연민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비록 작은 존재일지라도 우주의 한 구성원임을 자각하고, 남의 고통스러운 절규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라야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를 알고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러셀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연민’이라는 단어를 평생 품에 안고 살았다. 그는 자기 인생을 회고하면서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못지않게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에 비중을 두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했기에 자기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었고, 또한 행복했다고 말했다.
러셀은 ‘자서전’의 서문에서 연민을 이렇게 서술했다. “사랑과 지식은 일정한 범위에서 (나를) 천국의 길목으로 이끌어 주었다. 하지만 늘 연민이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고통스러운 절규의 메아리들이 내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굶주리는 아이들, 압제자에 의한 희생자들, 자녀의 짐이 되어버린 노인들, 궁핍과 외로움에 떠는 사람들이 연민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그는 일찌감치 사랑의 존재와 의미를 찾아내고, 최고의 지식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인류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연민의 정을 갖고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마흔두 살 무렵 세상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에 시동을 건 것이다.
러셀은 영국에서 전쟁 반대운동을 전개하다 옥살이를 했다. 이후 정치사회적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오랫동안 사상적 이단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미국에서는 종교와 도덕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대학교수직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타고난 휴머니스트에게 수난이 계속되었지만 활동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핵무기반대 시위와 더불어 세계평화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는가 하면,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서는 미국을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은 하나같이 지식을 기반으로 했으며, 인류에 대한 연민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러셀은 왜 이런 연민에 집착했을까? 개인 차원의 사랑과 지식을 얻는데 누구보다 성공했지만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 고통받거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천국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걷다 뒤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연민이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심성을 가리킨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으로 착한 마음이 생겨 그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타인의 고통을 깊숙이 이해함으로써 그것을 완화시켜 주려는 마음을 갖도록 한다. 연민은 또 타인을 힘써 도울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준다.
연민은 사랑보다 고귀하다. 대부분의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일방적인 사랑은 극히 드물 뿐만 아니라, 있다 해도 일시적이거나 불안정하다. 주고받는 사랑이라야 생명력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생명을 나눈 부모자녀 관계라면 예외일 수가 있겠다. 연인, 부부, 친구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라. 다들 사랑을 말하지만 바탕에는 이기적인 마음이 깔려있다.
나는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이 점을 정확히 짚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진정한 사랑은 연민이고, 연민이 아닌 사랑은 이기적이다.” 그렇다. 사랑은 이기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연민은 거의 전부 이타적이다. 연민은 일방적인 사랑이며,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모든 도덕의 기초로 사랑이 아닌 연민을 꼽은 것은 이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연민은 사랑보다 더 아름답고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연민을 사자성어로 표현한 말이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하겠다. 성선설을 뒷받침하는 이른바 사단(四端) 가운데 하나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그것이다. 맹자는 측은지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친해지고 싶어서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비난받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다.”
연민은 단순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쉽게 이어진다는 점에서 사랑과 다르다. 사랑보다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다. 연민을 느끼면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 행동하게 된다. 연민은 기도가 아니라 실천인 것이다.
러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다. 그는 청년기부터 비범했다. 10대 후반기를 떠올리며 회고록에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시) 나는 인류의 행복이 모든 행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인류 고통에 대한 연민의 대상이 남달리 크고 중차대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준다. 다양한 행동이 뒤따른 이유이기도 하다.
전쟁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진 사람들, 권력의 횡포로 신음하는 사람들,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사회적 약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들과 노인들과 어린이들…. 러셀은 언제나 그들 곁에 있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80대, 90대 고령에도 어디든 달려가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죽는 날까지 연민의 마음으로 글을 썼다.
연민이 발현하는 행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선이 대표적이다.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이 바로 자선 아닌가. 재력가가 큰 액수의 제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도 중요한 자선이지만 자기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물심양면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것도 훌륭한 자선이다.
연민이 인도하는 자선은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주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다. 칼릴 지브란은 달라고 할 때 주는 것도 좋겠지만 달라고 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주면 더 좋다고 했다. 그의 저서 ‘예언자’에 이런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이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그러나 세상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레프 톨스토이가 왜 이런 말을 했겠는가?
주변을 둘러보면 나보다 어려운 사람 수없이 많다. 돈이 없어 맨날 끼니 걱정 하는 사람, 잘 다니던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된 사람, 은행 대출받아 주식 투자했다 폭삭 망한 사람, 오랜 병마로 심신이 피폐해진 사람,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해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
자선은 행위 자체가 훌륭해서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는 점에서 무조건 좋다. 자선의 향기는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미치기 때문이다. 평소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잘 안다. 달라이 라마가 진작 이 점을 설파했다. “남을 도울 때 가장 덕을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고, 최고의 행복을 얻는 것도 자기 자신이다.”
러셀이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연민의 마음을 가졌을까?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이루고자 세상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이야말로 자신의 생존을 지탱해 주는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또 세상이야말로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기회이므로 세상사에 관심과 열정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면 세상과 인류에 대한 연민은 불가피하다는 게 러셀의 생각이었다.
이 글 첫머리에 소개한 문장은 그의 저서 ‘행복의 정복’ 끝부분에 나오는 대목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속한 우주, 자신이 의지하고 사는 세상에 따뜻한 연민을 가져야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라 여겨진다. ‘행복의 정복’에서 러셀이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말을 한마디만 골라보라면 나는 서슴없이 이 문장을 택하겠다.
“행복한 삶은 선한 삶과 매우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