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에서 도망친 낙오자, 문제아
성장소설 ‘데미안’ 덕분일까? 헤르만 헤세의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찌른다. 괴테나 셰익스피어 못지않다. 그의 작품은 살아 있을 때부터 큰 인기를 누렸으며,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기에 긴 시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계적 명성을 떨친 데다 85세까지 장수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그의 10대 청소년기는 방황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말썽쟁이에다 구제불능 문제아였으며, 정신병원을 드나들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부모 마음이 어떠했을까?
헤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외할아버지는 저명한 신학자였다. 독일 소도시 칼브에서 태어난 그는 스위스 바젤에서 주로 성장했다. 가정이 경건한 분위기였음에도 아이는 무척 거칠고 사나웠다. 아이들을 때리거나 이웃집 유리창을 깨는 바람에 자주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렸다. 아버지의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라틴어 학교에 다녔으나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작문에만 재능을 발휘했을 뿐 히브리어, 프랑스어, 수학, 체육 등 다른 과목 성적은 바닥이었다. 바이올린 등 음악에도 관심이 없었다. 대신 호메로스, 리비우스, 횔덜린, 괴테, 디킨스의 작품에 심취했다. 그에게는 일찌감치 시인이 되겠다는 꿈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헤세는 평범한 이야기들과 일화들 사이에 끼여 있는 독본(讀本)에서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밤’이라는 짧은 시를 발견했다. 그에게 이 놀라는 시행들은 어떤 계시 같은 것이었다. 그를 완전히 매료시킨 것은 내용이 아니라 ‘시문학의 비밀’과 ‘예언의 마력’이었다.”(평전 ‘헤르만 헤세’ 알로이스 프린츠, 이한우 옮김, 더북, 2002)
하지만 시인이 되겠다는 헤세의 계획은 부모와 외할아버지 생각엔 어리석은 것이었다. 상류 지식인들이어서 평소 시인이나 소설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으며 존경을 표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작가는 ‘전집을 남기고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막상 시인이나 예술가가 되려고 하면 그것을 웃음거리나 창피한 일로 여겼다. 결국 부모는 아들을 목사로 키우겠다며 신학교에 보낸다. 예비학교를 거쳐 기숙사가 있는 신학교에 진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15세 되던 해에 규칙생활 부적응에다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던 헤세는 결국 신학교에서 도망치기에 이른다. 이내 붙잡혀 8시간의 금고형을 치르고 학교에 복귀했지만 어차피 적응하기 어려운 아이였다. 친구들이 그를 정신병자로 여기는 바람에 신학교를 떠나야 했다.
부모는 하는 수없이 아들을 보호시설로 보냈으나 그곳에서도 사고뭉치였다. 일곱 살 연상의 여인을 짝사랑했다 거절당하자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이 때문에 2개월 간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야 했다. 집에 온 뒤에도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또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헤세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아 3년간 군대생활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어렵게 김나지움(대입 준비 중고교 과정)에 입학한다. 역사와 어학 과목은 비교적 잘했으나 수학은 여전히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군대시험에 합격해 1년간의 군복무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시절 헤세가 사는 도시에선 이런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네 녀석이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 너도 헤세처럼 낙오자가 될 거야. 헤세는 정직한 부모님에게 근심걱정만 끼치는 놈이야.” (‘헤르만 헤세’ 알로이스 프린츠, 이한우 옮김, 더북, 2002)
이처럼 헤세는 공부는 하지 않고 사고나 치는 낙오자, 문제아의 상징이었다. 부모에겐 치욕스러운 자식이었다. 본인 탓이긴 해도 포근하게 감싸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언제나 외로웠다. 제도권 교육은 우리 기준으로 중2 정도에서 끝났으니 대학은 언감생심이었다.
시인이 되겠다는 꿈 하나만 품고 험난한 사회에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16세 되던 해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서점원으로 취직했으나 사흘 만에 그만뒀다. 17세 때는 시계공장 견습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불량 문학소년이기에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헤세는 18세가 되어서야 글 쓰는 일에 발을 담글 수 있었다. 서점에서 서적상 도제생활을 시작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21세 때 서적상 견습공 딱지를 떼고 서적 분류 조수가 되었다. 그 해에 사실상 첫 시집이라 할 ‘낭만적 노래’를 자비로 펴냈다. 하지만 600부 가운데 겨우 54부만 팔렸다.
이듬해 ‘자정이 지난 뒤의 한 시간’이란 제목의 단편집을 펴내 당대 최고 시인 릴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27세 때인 1904년 출간한 ‘페트 카펜친트’는 헤세의 첫 장편소설이자 최초의 성공작이었다. 덕분에 부와 결혼을 동시에 취할 수 있었다. 실패자가 성공자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헤세의 성공은 자기만의 간절한 꿈을 지녔기에 가능했다. 그는 어린 시절 출판사를 경영하던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출판사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접했다. 책 더미 속에서 일찌감치 작가가 되려는 꿈을 키웠다. 목사가 되라는 어른들의 요구를 끝내 뿌리치고 그 꿈을 지켰다.
세상 사람들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탐구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헤세는 자기 경험을 거울삼아 이런 안타까움을 여러 작품에서 토해냈다. 자아발견 소설이 그것이다. 자아발견을 통해 마련한 꿈을 지키고 실현하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저항이 그것이다. 헤세에겐 부모도, 학교도 세상도 모두 저항의 대상이다.
헤세처럼 분명한 꿈이 있다면 어릴 적 방황이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꿈이 간절하면 우주나 신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소신과 의지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