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두 후유증으로 건망증이 극심했던 유생, 김득신
*김득신(1604~1684)= 조선 중기 시인. 충청도 증평 출신으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지휘한 김시민의 손자.
아버지는 경상도 관찰사였다. 할아버지는 진주대첩을 성공으로 이끈 진주목사였고, 외할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소년은 이런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공부에는 도무지 재능이 없었다. 무슨 책이든 읽고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어른들은 유아기 때 심하게 앓은 천연두 후유증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 중기 문관이자 시인이던 김득신. 그의 건망증에 관한 일화가 여럿 전해진다.
사례 1/ 어느 날 말을 타고 남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청명하게 들렸다. 아주 익숙한 문장임에도 어디서 읽은 내용인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때 함께 있던 하인이 얼른 말했다. “나리께서 하도 많이 읽은 내용이라 저도 기억하는데 사마천의 ‘백이전’에 나오는 문장이잖아요.”
사례 2/ 친구 집에 시 낭독회가 열린다기에 말을 타고 출발했다. 그러나 시제를 생각하느라 말 모는 것을 깜빡 잊었고, 말은 자기 집 대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부인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아니 부인이 왜 이 집에 와 계시오?”라고 물었고, 부인은 “여긴 영감님 집이외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내가 언제 시 낭송회를 마치고 돌아왔지?”라며 황망해했단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일망정 이런 일화가 전해지는 걸 보면 건망증이 심하긴 심했던 모양이다. 질병 수준이라고 해야겠다. 주변에선 공부로는 출세하기 어렵겠다며 책 읽기를 중단하고 말타기나 활쏘기를 가르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믿고 격려했다. “느리다고 성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반복해서 읽으면 반드시 외울 수 있다. 60세가 될 때까지 과거시험을 보거라.”
김득신은 아버지의 무한 신뢰에 극한의 노력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남이 한 번 읽을 때 저는 열 번 읽고, 남이 열 번 읽을 때 저는 백 번 읽겠습니다.” 실제로 그는 평생 이런 마음, 이런 자세로 공부했다.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지은 데서도 특별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독서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가 남긴 독수기(讀數記)를 보면 평생 1만 번 이상 읽은 책만 36권이나 된다. 앞에 나온 백이전은 11만 3000번이나 읽었다. 한유의 ‘사설’은 1만 3000번, ‘악어문’은 1만 4000번, ‘노자전’은 2만 번을 읽었으며 소식의 ‘능허대기’는 2만 5000번이나 읽었단다. ‘대학’ ‘중용’ ‘장자’도 수없이 읽었지만 1만 번을 못 채웠기 때문에 독수기에서 제외했다고 기록했다.
김득신은 자타가 인정하는 학습 지진아임에도 이런 엄청난 독서 덕분에 한참 늦긴 했지만 과거 등용문을 당당히 통과했다. 38세 때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58세 때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공부를 못해 학교 성적이 형편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 50세 무렵 9급 공무원이 되고, 70세 넘어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셈이다.
그는 노년에 급제했지만 뛰어난 인품 덕분에 제대로 된 관직을 여러 차례 받았다. 종 2품까지 올랐으니 세속적으로도 성공한 셈이다. 시인으로는 더 크게 성공했다. 이름 있는 문장가들로부터 “당대 최고의 시인”이란 평가를 받았으니 말이다. 현재 1590수의 시와 180편의 산문이 전해지고 있다.
김득신의 성공 비결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끈질긴 노력이다. 비록 지능이나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김득신을 보면, 끈기도 재능이다. 아니 끈기는 최고의 재능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런 묘갈명을 남겼다.
“학문에 힘쓰는 자는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세상에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이가 없겠지만 나는 결국 이루었다. 모든 것은 힘쓰고 노력하는데 달려있다.(勉學者, 無以才不猶人自畫也. 莫魯於我終亦有成. 在勉強而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