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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소년원 음악 교사가 심어준
연주자의 꿈

-흑인 빈민촌 결손 가정의 비행 소년, 루이 암스트롱

by 물처럼

*루이 암스트롱(1901~1971)= 미국의 가수, 트럼펫 연주자. 재즈 뮤지션의 대부. 재즈를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 만든 인물.



What a Wonderful World’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모두 불릴 수 있는 유일한 곡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았네/ 밝고 은혜로운 낮과 어둡고 거룩한 밤/ 그리고 나는 생각하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재즈 가수 루이 암스트롱이 66세 때인 1967년에 부른 노래다.


베트남 전쟁과 인종차별, 사회 갈등이 만연하던 시대에 희망과 사랑, 평화의 메시지를 던진 곡이다. 따스하면서도 깊은 목소리가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이후에도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고, 영화와 광고에 삽입돼 꾸준히 불린다.



암스트롱은 즉흥 연주, 스윙 리듬, 블루노트를 특징으로 하는 재즈 음악의 대부다. 실제로 재즈 음악은 그의 인생과 궤적을 같이한다. 블루스, 영가, 노동요 같은 흑인 음악과 유럽식 군악대 음악이 결합한 재즈는 암스트롱의 고향인 미국 뉴올리언스가 발원지다. 그의 음악적 성장이 곧 재즈 음악의 유행과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재즈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다.


20세기 걸출한 뮤지션 암스트롱은 결손 가정에서 자라며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보면 도무지 희망이 없는 아이였다.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지역 흑인 빈민촌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딴살림을 차리러 집을 나가버렸고, 어머니가 매춘으로 아이를 돌보아야 했다.


흑인 아이들이 다니던 소년학교에 등록은 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 도무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신문 배달과 음식물 찌꺼기 청소로 푼돈을 벌어야 했기에 밤낮 가리지 않고 거리를 쏘다녔고, 싸움은 다반사였다. 결국 11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만다. 대신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4중창단을 만들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용돈을 챙겼다. 어른들이 하던 거리의 재즈 연주를 구경하며 코넷(트럼펫과 비슷하게 생긴 작은 호른)을 구입해 연주하는 것이 유일한 재미였다.


그런데 천방지축 소년은 어느 날 큰 사고를 치고 만다. 송년회로 거리가 들썩일 때 친척 집에서 몰래 가져온 권총을 허공에 마구 쏘아내는 바람에 깜짝 놀란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는 불량 흑인 아이들을 교화하기 위한 소년원에 송치되었다. 1년 반 동안의 소년원 생활은 그러나 인생에 희망을 찾게 해 준 소중한 기회였다.


소년원엔 악단이 있었다. 암스트롱은 그곳에서 코넷을 불 수 있었고, 운명처럼 만난 음악 교사 피터 데이비스의 칭찬 한 마디가 그를 마냥 춤추게 했다. 어느 날 악단을 이끌던 데이비스는 암스트롱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이런 칭찬을 했다.


“네 안에는 음악이 가득하다. 이 악기를 계속 불어라. 그러면 멀리 갈 수 있을 거야.”

53세 때 쓴 회고록에 나오는 말이다.


암스트롱은 교사의 칭찬과 격려에 힘입어 연주자가 되는 꿈을 갖게 되었고 자신감까지 생겼다. 아이는 데이비스에게 처음으로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으며, 악단 일정과 무관하게 틈만 나면 연습에 몰두했다. 어느덧 소년원 아이들로 조직된 밴드에서 두각을 나타내 리더가 되었다. 소년원을 나온 뒤에도 낮에는 석탄 배달 일로 돈을 벌면서 밤에는 댄스홀에서 코넷을 연주했다.


어느덧 그의 실력은 프로 단계로 발전했고 고향을 떠나 시카고, 뉴욕, LA 등지로 옮겨 다니며 명성을 쌓았다. 유능한 트럼펫 연주자로 자리를 굳히면서 독자 적인 밴드를 조직하는가 하면 가수로도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다. 대중은 그에게 열광했고, 그가 주도하는 재즈는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텔레비전 쇼에 단골로 출연하는 명사가 되고,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는 최초의 뮤지션이 되기도 했다.


만약 그에게 소년원 음악 교사의 칭찬이 없었다면 세계적 명성을 떨친 음악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고향에서 고만고만한 거리의 악사로 살다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회고가 이를 말해준다.


“나는 소년원에서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데이비스 선생님께 감사했다.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의 칭찬 한 마디 덕분에 나는 악기를 놓을 수 없었고 음악을 통해 나를 구원할 수 있었다. 악기는 더 나은 인생으로 가는 나의 티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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