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토리 Feb 09. 2024

2년 간 경험한 카피라이팅의 세계

입덕 부정기를 끝냅니다

지난 2년은 글을 쓰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던 해였다. 꽤 신기했다. 업무의 메인이 글쓰기가 될 줄이야. 마감 기한에 맞춰 온종일 글을 쓰는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게 카피라이팅은 호기심과 동경심이 차오르는 분야였다. 하지만 막상 발을 들이자니 스스로를 의심하게 됐다. 직업적인 글쓰기가 과연 적성에 맞을까? 아니 그것보다 이를 해낼 만한 능력이 나에게 있는가?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의심의 자리에 확신이 채워졌다. 걷고 있던 길에 점을 또 한 번 찍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 길고 길었던 글쓰기에 대한 입덕 부정기를 끝내도 되겠다는.



상품 카피라이팅의 묘미

카피라이팅, 그중에서도 상품 카피라이팅이 재미있는 이유는 사람들의 생활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패션, 뷰티, 푸드, 운동, 책, 생활, 가전..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아이템 중 하나라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특히 요즘처럼 물건에 둘러싸이다시피 사는 시대에 말이다.


상품을 소개하는 카피는 종종 사용자의 경험을 건드린다. “이런 적 있지 않았나요?” 말을 건네고 그렇게 형성한 공감대를 활용한다. 이때 필요한 게 나의 경험 혹은 간접 경험이다. 특징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기본적인 디자인의 상의를 소개할 때는 지난 주말 옷장 앞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린다. 그러자 제품의 밋밋한 디자인이 ‘높은 활용도’라는 장점으로 변신한다.


"꽉 찬 옷장에 정작 내일 입을 옷은 없다면, 기본 아이템이 충분한지 점검할 때. 간결한 디자인의 OOO 니트는 다양한 옷과 어우러지는 활용성을 갖췄습니다."


액상 아이스티의 카피를 쓸 때는 일상에서 경험했던 작은 불편함이 빛을 발한다. "가루형 아이스티는 물에 잘 녹지 않아 아쉬웠죠. 컵 바닥에 그대로 남은 가루를 서걱서걱 씹었던 경험, 한 번쯤 있을 거예요."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별거 아닌 내 경험이 특별해지는 기분을 자주 느낀다. 친구도 엄마도 한 번은 경험해 봤을 너무나도 보편적인, 그래서 더 유용하고 소중한 경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일상 속 작은 순간에 더 충분히 감응하고 그 맛을 더 꼼꼼히 음미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짧은 카피 쓰기의 재미

20~120자 이내의 짧은 카피를 쓸 때면 흥분되고 또 괴롭다. 핵심을 관통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문장이 뭐가 있을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다. 대부분은 꼭 포함해야하는 키워드를 가지고 요리조리 조합해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씩은 말 그대로 신내림을 받은 양 기발한 카피가 번뜩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한다.


가장 행복할 때는 내 카피가 통했음을 확인받는 순간이다. 조금은 실험적인 카피일수록, 이 카피의 의도가 잘 전해질까 조마조마하다. 동료나 선임에게 '기발하다' 혹은 '재미있다'라는 피드백이 돌아올 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뭐랄까, 아주 점잖게 나만의 드립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랄까.



긴 카피 쓰기는 서랍 정리와도 같아서

비교적 긴 글을 쓸 때면 그 과정이 마치 내 정리 루틴과 똑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늘 '뒤집어엎기'로 정리를 시작한다.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든 모든 물건을 바닥에 와르르 쏟아붓는다. 그제야 오래전 구석에 밀어 넣고 까먹은 펜도, 바닥에 깔려버린 네컷사진도 얼굴을 들이민다. 무얼 가졌는지 알면 서랍마다의 카테고리를 적절하게 정하고 그에 맞춰 빠르게 물건을 분류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리셋하는 상쾌한 기분이 들어 이 과정을 참 좋아한다.


긴 카피를 쓸 때도 마찬가지. 서랍을 뒤집어엎듯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빈 워드 시트로 몰아넣는다. 당장은 지저분해 보여도 걱정할 필요 없다. 부담감은 덜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문장끼리 차근차근 묶어 나가면 된다. 마치 서랍의 카테고리를 정하는 것과도 같다.


서랍이 일정 주제를 바탕으로 채워졌다면 이제 서랍장 안에서 위치를 정해주면 된다. 가장 꺼내기 쉬운 맨 위층은 자주 쓰는 물건을 담은 서랍이 차지한다. 반대로 맨 아래층은 한 달에 한 번 쓸까 말까 한 물건들을 담은 서랍을 위한 곳이다.


문단도 비슷한 기준으로 위치를 결정한다. 아무리 열심히 쓴 글이라 해도 끝까지 읽힐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꼭 전하고 싶은 중요한 정보는 가장 위쪽으로, 비교적 그렇지 않은 문단은 아래로 배치한다. 이렇게 뒤짚어엎기, 비슷한 주제로 묶기, 순서 정하기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글의 80%는 완성된 셈이다.



언어의 창고가 바닥을 보이기 전에

사실 지난 2년의 카피라이팅 작업을 돌이켜 보자면 마치 카피를 찍어내는 공장과도 같았다. 느긋하게 아침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펜을 이리저리 굴리는.. 그러다 가끔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고뇌를 표출하는 멋진 나는 없었다. 그저 '오늘 오후 2시까지 100자 짜리 카피 20건을 써야 한다'를 되새기며 바쁘게 자판을 쳤을 뿐. 인정머리 없는 마감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좋은 카피를 빠르게 뽑아내기 위해선 내가 더 힘쓰는 수밖에 없었다.


입사 후 수습기간 동안 사수는 늘 당부했다. 다른 팀원의 카피를 정답처럼 참고하지 말고 본인의 느낌대로 써보라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똑같은 카피만 남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몇개월이 지나자 그게 참 어려움을 느꼈다. 평소 채워두기를 게을리했던 언어의 창고는 금세 바닥이 났다. 일단 마감은 지켜야 하니 카피 퀄리티는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모니터 밖 세상으로 눈을 돌린 게. 지나가는 버스의 광고, 우연히 중고 서점에서 읽은 책,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는 생경한 표현과 다채로운 인사이트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이 소중한 자원들은 다 고갈되고 난 후에야 허겁지겁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틈틈이 습득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려면 퇴근 후에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강인한 체력과 열린 마음은 필수라는 점도.



그래서 다음 스텝은?

카피라이팅으로 전업 글쓰기에 발을 들였지만, 커리어의 가지는 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려 한다. '재미있고 기발한 카피'보다는 '간결하고 명확한 카피' 쓰기에 더 흥미를 느꼈다. 엉망진창이던 MD 초안이 깔끔한 세 문장으로 정리될 때, 메이커의 언어를 소비자의 언어로 알기 쉽게 바꿨을 때의 개운함이란. 최근에 카피 검수 업무를 잠시 경험해 보면서 이 생각은 더 강화됐다.


협업에 대한 갈증도 또 하나의 이유. 가만히 앉아 카피를 쓰기보다는 이런 문장은 어떤지, 더 좋은 문장이 있을지 사람들과 고민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더 나아가 프로덕트 그 자체로 고객과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다 보니 참 오랜만에 쓴다.


"내가 좋아하는 걸 찾고 좋아하다 보면 또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 지난 글에서


2년이 지난 지금의 마음가짐도 마찬가지이다.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겁 없이 시도해보는 2024년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3개월 간 경험한 ‘취준’의 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