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5월호 <도덕의 상대성과 지구화>
군대라는 작은 사회는 개인 간의 도덕관의 차이를 쉽게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군생활 중에서 도덕의 충돌을 경험한 한 대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명의 충돌에서 유럽과 미국은 단결하든가 갈라설 것이다. 더 거대한 충돌, 곧 범지구적으로 벌어지는 문명과 야만성의 '진짜' 충돌에서 종교, 예술, 문학, 철학, 과학, 기술, 윤리, 인간애를 풍요하게 발전시킨 세계의 거대한 문명들 역시 단결하거나 갈라설 것이다."(문명의 충돌-새뮤얼 헌팅턴)
새뮤얼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탈냉전 후의 세계는 이념과 경제가 아닌 문명의 이질성에 따라 전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헌팅턴에게 문명은 문화 및 종교와 뜻을 같이한다. 이러한 문명의 동질성을 띠는 나라들끼리 뭉쳐 한 문명권을 이루고 각 문명권은 이질성에 의해 충돌한다는 것이다.
도덕이란 무엇일까. 사전에선 도덕을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또는 바람직한 행동기준”으로서 정의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켜야 할 도리이고 또 바람직한 행동기준일까. 이에 대해선 수많은 철학자, 법학자, 종교들이 다양한 의견과 답을 내놓는다. 자연법의 관점에서 모든 도덕 사상들은 보편성과 동질성을 갖지만 세세하게 들여보면, 상이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많다. 도덕에 관한 어떤 정의가 더 합당한 것인가, 혹은 도덕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내가 다루기엔 너무 어려운 주제이다. 이에 대해선 확답할 수 없지만, 도덕들이 차이점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이고 문명의 충돌에 의한 도덕의 충돌 역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타하루시”이다. “타하루시”는 집단 괴롭힘을 뜻하는 이집트 말로, 일부 무슬림 남성들에 의한 여성 윤간 범죄행위이다.
“미국 CBS 방송국 소속 여기자가 이집트 시위 취재 도중 구타와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외신에 따르면 로건은 지난 11일 오후 늦게 이집트 시위 현장을 취재하러 나섰다.…… 로건은 이때 이집트 군중 200여 명에게 둘러싸여 방송팀과 떨어져 버렸다. 이후 군중들은 로건을 구타하고 성폭행까지 자행했다. 로건은 이집트 군인 20여 명이 구해줘 다시 방송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CBS 기자 라라 로건 집단성폭행/2011.02.16.-뉴스엔)
“지난해 12월 31일 밤 독일 쾰른 대성당 앞의 모습입니다.……곳곳에서 싸움과 절도, 성폭력이 발생하면서 공포에 질린 여성들이 도움을 호소했지만, 경찰조차 죽음을 두려워했을 정도로 손을 쓸 수 없었다는 겁니다. 쾰른 외에 베를린과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에서도 성폭력 신고가 잇따랐고, 여경까지 성희롱을 당했던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습니다.……독일 정부는 망명을 신청한 난민이 이번 집단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유죄 선고를 받으면 추방할 수 있다며 수습에 나섰습니다.”(독일 쾰른 집단성폭행/2016.01.08.-YTN)
타하루시는 범죄행위임에 명백하지만, 가해자인 무슬림 남성들에게는 오히려 도덕적 판단으로 평가되는 듯하다. 코란 제24장 31절은 여성들의 행동거지와 감추어야 할 부분을 규정한다.
“믿는 여성들은 그녀들의 시선을 낮추고 순결을 지키며 손과 얼굴 외에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니라. 성욕을 갖지 못하는 하인, 그리고 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외에는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하니라.” 이러한 이슬람 교리에 의해 문란한 여성과 비이슬람 여성에 대한 공격과 성적인 폭행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죄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이집트 여대생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0%가 피해 여성이 잘못했다고 주장했으며 75%가 문란한 옷차림이 성폭행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의 도덕과는 맞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도덕적으로 합당한 것이다. 이렇게 도덕은 충돌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도덕과 도덕의 충돌을 보곤 한다. 대중교통 자리 양보 문제부터 배아줄기세포 복제 및 안락사 문제까지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도덕의 경계선에 서 있다. 나는 이 충돌을 군대에서 직접 경험했다. 군대는 사람을 그 자체로서의 목적이 아닌 특정한 것의 수단으로 여겼다. 이는 간부가 병사에게, 선임이 후임에게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났고, 공공연한 부조리가 되었다. 간부에게 병사는 일하는 노예였고 선임에게 후임 역시 일해주는 도구였다. 부조리는 대표적으로 첫째, 업무의 불평등한 분배, 둘째, 언어폭력 및 구타, 셋째, 계급에 따른 금지사항, 넷째, 유희 거리로써의 취급이 있다.
첫째의 경우, 계급에 따른 업무량의 차이를 의미한다. 계급이 높을수록 일을 하지 않으려 하며 낮은 계급일수록 모든 일을 감당하게 된다. 둘째의 경우, 아랫사람들에게 당연시되는 욕설과 구타이다. 아랫사람이 말을 안 듣거나 일을 못할 경우, 그들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을 당연시 취급하고 개인의 생각, 감정 및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다. 셋째의 경우, 계급이 낮을수록 터부가 많음을 의미한다. 후임은 선임한테 말대꾸하면 안 된다. 후임은 방한 내피만 입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 등등 단순히 아랫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소한 모든 것이 금지된다. 넷째의 경우, 후임을 자신을 즐겁게 하는 도구로서의 취급이다. 나의 경우 한 선임이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한 적이 있으며 자신이 치는 장난은 모두 받아줘야 한다는 압박을 자주 받았다. 이들은 모두 사회의 상식 및 도덕과는 맞지 않을뿐더러 법적으로도 제지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군대에 속해있는, 군대의 분위기에 동질화된 사람들은 부조리를 당연한 도덕인 것 마냥 여긴다. “폐급”, “관심병사”라는 명칭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단어들은 공동체에 폐만 끼치는 매우 몹쓸 인간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의 부조리를 수긍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할 때 쉽사리 쓰인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면 폐급인 것이다. 이는 부조리 신고 시 일어나는 상황을 토대로 파악할 수 있다. 부대 내에서는 부조리 신고가 자주 일어난다. 병사가 간부를 향해서도 병사가 병사를 향해서도 말이다. 하지만 내가 관찰한 결과 10건을 신고하면 그나마 해결되는 건은 1건 정도이다. 간부도 병사도 대부분이 신고한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한다. 요즘 얘들은 별것도 아닌 거로 신고한다는 간부, 곧 전역하니깐 조용히 보내자는 간부도 있었다. 또한, 신고자의 익명이 지켜지지 않고 이름이 팔려 신고자가 매장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랫사람이면 아랫사람다워야 한다.' 공자의 정명 사상이 지극히 왜곡된 도덕관념이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에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며 면박과 수치를 주어야 기억에 잘 남고 군 생활을 더 잘한다는 식의 생각이 모두의 기저에 깔려있다. 대부분은 신병 때 이러한 군대의 사상과 도덕에 거부반응을 보이지만 계급이 올라갈수록 도리어 수긍하고 더 악랄해진다.
나는 이러한 도덕과 매우 크게 충돌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군 생활은 나의 도덕과 신념의 싸움이었다. 나는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4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째는 스스로가 먼저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둘째는 후임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하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잘못된 자들을 처벌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권력을 잡아 아예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었다. 첫째의 경우, 나는 나 자신을 먼저 잡아야 했다. 계급이 높아질수록 더욱 행동거지와 말가짐을 바르게 했으며, 업무 역시 소위 짬 때리기가 아닌 최소 1인분 이상은 하였다. 또한, 후임이 고충을 토로하면 이를 듣고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둘째의 경우, 나는 후임에게 부조리의 대물림이 아닌 평화의 대물림을 하기 위해 교육하였다. 누군가가 잘못을 하면 화내고 욕하기보다는 좋게 좋게 잘 타이르고 지적하기를 요구하였다. 셋째의 경우, 부조리를 일삼는 자들을 신고하여 처벌을 받거나 타 보직으로 변경되게 하였다. 누군가를 신고하면 되려 욕먹는 군대에서 몇몇을 쫓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약간의 꾀가 있어 가능했다. 넷째의 경우, 내가 최고 선임병이 되어 권력을 잡은 순간부터는 아예 단체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내가 최고 선임병이 된 날 나는 모두를 불러 모아 "앞으로 일을 안 한 거나 화내고 욕하는 병사가 있으면 내가 자르겠다."라고 선언하였다. 나의 싸움은 결과적으로 승리하였다. 하지만 결국 군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를 아예 없애지는 못하였다. 환경 그 자체를 개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라마다 도덕은 차이를 지니고 지구화가 될수록 도덕의 충돌 역시 잦아질 것이다. 끊임없는 충돌 가운데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가장 최적의 선택은 서로 다른 두 도덕이 원만하게 합의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충돌과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도덕이 충돌하였을 때 어떤 도덕이 더 정의로운 것인지 판단하고 도덕들 사이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합당한 도덕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더 우월한 도덕의 끝없는 승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도덕의 충돌은 파멸이 아닌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7월호 <과학기술과 유토피아> 투고글, 그림을 받고 있습니다.
_과학기술의 발전은 유토피아를 실현시키는가?
https://blog.naver.com/changmagazine/222348207818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