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저장

수저를 만드는 사람.

by 이병훈


1.

아버지가 없는 것은 모두 세 가지다. 돈, 두 번째, 세 번째 손가락들, 그리고 밸. 돈은 누구나 없다고들 입버릇처럼 말하니까 나도 말하지 않겠다. 다들 없다고 했고, 나도 그랬으니까 돈이 없다고 생각했다. 없음의 차이는 나이 먹으며 알았다. 없어도 아주 많이 없는 것과 그럭저럭 없는 것의 차이는 컸다. 아버지는 가난했기에 공장에 다녔고 거기서 손가락이 잘렸다. 사장은 돈이 없다고 했다. 공장에 계속 다닌 아버지는 직원들 사이에 밸이 없는 놈으로 통했다. 보상을 받지 못한 아버지는 배알도 없이 거기에 계속 다녔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없던 시절이라 일할 사람이 부족해 딱하다는 말은 아버지가 해선 안 될 말이었다.

“내가 우리 어매가 김영순이고, 우리 아버지가 구태순. 아 그건 벌써 말했다고? 그려그려. 우리 구태순 진사가 키가 컸어요. 다들 백 육십도 안될 때들 아녀? 우리 아버님은 백 구십에 가까웠지. 등에는 연죽장 하나 턱 꽂고는, 니는 공부하고는 멀어 븬다, 기술을 배우거라 하시거든. 하기사 우리 형제가 나를 포함해서 열둘이었으니, 모두 제 밥그릇 찾느라고 밥때마다 눈에 불을 켰지. 내가 둘짼데 철이 일찍 들었어요. 왜정 때라 다 힘들었지. 우리 한 푼 주면 제 놈들은 열 푼씩 받아가던 때라고 생각하면 돼요. 임금이 열 배는 넘게 차이가 났다니까. 아 열 배가 다 뭐야. 수틀리믄 안 주고 때리고. 에이 빌어믈 세상이었지. 하긴 그건 나중 일이고.

기술이라고 누가 그냥 입에다 떠먹여 가르쳐줍디까. 우리 어머니 막냇동생이 고물을 주워다 잘 팔았거든. 한동안 내가 삼촌을 따라다녔는데, 이틀에 한 번 밥 구경을 할까 말까야. 밥도 깡보리를 한 뎅이 뭉쳐서 된장 한술 바른 거. 그것 먹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아, 나도 키가 좀 큽니까. 나도 백 팔십은 넘었거덩. 컸지, 당시에는 컸어요, 키가. 근디 그럼 뭐해. 삐죽허니 말라갖고 전봇대 보믄 친구허자고 할 참이라. 고물상 옆에 선반공장이 있어. 거길 가서 심부름을 해주겠다고 했지. 것두 삼촌 빽이었지. 그것 없으믄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었간디. 빽을 써서 거기 급사로 들어갔어요. 급사라기보다 그냥 잡일꾼여. 짐 나르고 포장하고 불피우고. 대장간을 겸했거던. 선반공장은 그래도 고등학교 나온 사람들이 빠따를 치는 곳이라 우린 얼씬도 못했죠. 아휴, 교복 입고 다니는 애들을 워찌 우리가 상대한댜. 갸들은 하늘 위에 있었거덩. 우린 뭐 지렁이 취급이지. 그런 땅 무지랭이들이 어딨어. 갸들은 나중에 기차를 몹디다. 맞어. 그 기차. 그때는 서울서 저 이북 어디까지야, 평양? 거기 너머까지 가고 안 그랬소안. 그려 기차 화통으루다 폭폭 거리면서 말여. 그땐 삼팔선두 없었으니께.”


*


당신, 왼쪽 손 말야, 좀 불편할 거라구. 알아듣겠어?

의사는 아버지의 왼쪽 귀가 불구인 것처럼 크게 말했다. 귀는 잘 들린다니까요라는 소리를 내가 먼저 꺼낼 뻔했다. 아버지는 약국에서 탄 약봉지를 주머니에 넣지도 못하고 떨어뜨렸다. 이제 손아귀를 쥘 수 없을 것이었다. 버스 손잡이마저 잡지 못하고 흔들리자 나는 아버지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교복을 입은 청년이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할머니 한 분이 그 자리를 향해 뛰었다. 아버지가 붕대 감은 손을 그녀 앞으로 떨어뜨리자, 그녀가 마지못해 툴툴거리며 자리를 내주었다. 아직 한 겨울이었고 돈이 없다는 사장의 말을 굳게 믿은 아버지는 나중에라도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굳게 믿었다.

삼일절을 대비해서 우리는 오토바이에 철근을 용접해 붙이기로 했다. 두께가 2센티가 넘는 단단한 놈이었다. 뒤에 태울 그 녀석만 겁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스팔트에 우리의 족적을 불꽃으로 남기며 달리게 될 것이었다. 좌우로 핸들을 꺾어가며 마치 붓으로 그리는 타원처럼 강렬한 스파크가 생길 것이 틀림없다. 전혀 우리를 따라잡지 못할 짭새들이 올해는 어떤 방어망을 펼칠지 잘 모르겠지만.

대리점 사장은 배알도 없는 아버지의 고향 친구다. 나는 거기에서 용접이며 오토바이 수리를 배웠다. 공고를 졸업하고 할 일 없이 빈둥거리던 나는 아버지에게 귓바퀴가 붙들려 그곳으로 끌려갔다. 나는 아버지 몰래 오토바이 지역 예선에 통과했다. 하라는 기술 시험은 보지 않았다. 용접이며 수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오로지 속도에만 관심이 있었다. 밤마다 수리 명목으로 국도를 폭주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그 녀석을 만났다. 라이딩 실력은 젬병이지만, 녀석은 나처럼 속도를 사랑했다. 우린 밤마다 만나 국도를 내달렸다. 당시에는 음주 측정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우리의 폭주는 늘 즐겁고 새로웠다.

불구까지는 아니라니까. 손 잘 안 쥐어지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그러니까 합의 잘 봐요. 내 말 알겠어?

의사는 실밥을 푸는 아버지에게 존대와 하대를 섞어 말했다. 하긴 간호사도 어이, 거기 이리로 오셔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기도 했으니까. 프레스에 눌린 손가락은 접합이 안 된다고 여러 번 설명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들이 마치 쇠숟가락 프레스에 자신의 손을 넣은 것처럼 사진 현장을 보기에 꺼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버지는 그때부터 작은 공방을 차렸다. 돈이 없다던 사장은 사고를 무마하기 위해 변두리에 있던 우사(牛舍)를 아버지에게 빌려주었다. 아버지는 주말마다 그곳을 고쳤고, 사글세를 전전하던 우리는 외양간을 수리한 집으로 들어갔다.

밤마다 흙벽 사이로 소 울음이 들려왔다. 이곳저곳 구멍이 뚫린 그것에서 마른 짚과 붉은 흙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나는 그 흙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았다. 딱 흙 맛이었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니었다. 그 집이 싫어서 나는 자주 대리점에서 잤다. 나무 의자 두어 개를 붙이면 머리와 등을 받칠 수 있었다. 돈이 모이면 우선 기름부터 샀다. 대회 연습을 나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짭새를 이기려면 우선 기름값이 제일 중요했다. 당기는 만큼 오토바이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나의 존재와 무게를 오토바이에 실었다. 한없이 가벼워진 채로 허공을 지나갈 때 나는 나의 불우한 가난과 아비의 손가락과 아비의 밸 없음도 잊어버렸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공장에서 일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수저를 만드는 장인에게 일을 배웠다. 일이 손에 익을 무렵 공방에 불이 났다. 모든 것이 다 타버렸다. 망치는 머리만 남기고 손잡이까지 타버렸다. 그해 쓰려던 석탄이며 땔감이 모두 사라질 때 다른 동네 화재보다 더 잘 타더라고 했다. 어음을 받아가던 자의 소행이라는 얘기도 있었고, 일의 전승을 받지 못한 제자의 소행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운세>처럼 지당한 말을 들려주었다. 겨울철 부주의로 인한 내부 불씨에서 점화된 어쩌고 저쩌고. 짭새들은 그 얘길 대수롭지 않게 했고, 대꾸를 대수롭지 않게 듣지 못했다. 배알 없는 아버지는 새로운 직장을 찾았다. 3년 전 내가 고1일 되던 해다.

부우우웅-.

실제로 이놈은 나의 머리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머리의 감각을 손끝으로 전달한다. 녀석은 미치도록 사랑스럽다. 저 검은 바퀴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적막했을까. 엄지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녀석은 120킬로든 140킬로든 그대로 앞으로 질주한다. 인간이 빠르게 축지(縮地)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도술이 여기에 적용된 것이 아닐까. 나는 땅을 접는다. 아니 땅을 포갠다. 그때 내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 소리와 같이 사라진 흔적들일뿐이다. 이것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다. 느리다는 것은 도태된다는 것을 아버지는 모른다. 프레스 기계가 찍어주는 대로, 정해주는 대로 밥숟가락이 쏟아진다.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지는 그것들은 마치 잘 정비된 무기 같다. 저 쇠가 우리가 밥을 입에 넣을 때 도와주는 것이로구나. 저 규격이, 저 재질이 밥을 뜨기에 좋은 것이로구나. 아버지가 하던 공장 일이 바로 나의 밥이로구나.


2.

녀석이 나에게 눈을 흘기며 입으로만 말했다.

“뭐라고?”

“저녁에!” 아직도 입만 벙긋대는 상태.

“뭐?”

“저거! ”

“도대체 뭐라는 거야?”

준석은 제 아버지 눈치를 보더니, 몰래 저걸 밤에 끌고 나가 보잔다. “그러다가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아닌 게 아니라 귤색으로 포장된 저놈의 허리가 너무도 궁금했다. 과연 몇 초안에 우릴 고도 위에 올려둘 것인가? 7초? 8초? 나는 녀석과 내기를 걸었다. 160까지 당겨볼 데가 어디일까? 야야 그것 같고 되겠냐? 180, 아니 200은 놔야지.

제트기 엔진을 구한 또라이 셋이 그것을 오토바이에 달았다. 개조된 오토바이는 두 명을 싣고 번쩍, 하고 달렸다. 벽에 부딪혀 폭발한 오토바이와 사람 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기한 것은 오토바이와 제트기 엔진을 과연 어떻게 연결했을까 하는 것과 충돌 시 그 속도가 400km 이상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노벨상감이었지만 이미 또라이 둘은 죽고 없었다.

속도가 과학이다. 속도가 종교이고 그게 우리의 삶이다. 모든 전부이며 진리이기도 하다. 4만 km 이상으로 달리던 우주선은 우주인을 달에 데려다주었다. 속도가 미래이고 문명인 것이다.

나는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신형 바이크를 훔쳤다. 대략 오백 미터를 소리도 못 내고 끌고 갔다. 밤 열두 시 충주는 이미 유령 도시로 변했다. 신호등을 지키는 차가 없었다. 아니 도로 위에 차가 아예 없었다. 신형 엔진이라는 DOHC는 완전히 미쳤다. 우리는 제트기 엔진을 단 두 또라이 같았다. 손목을 꺾자 곧 140이 넘었다. 우리는 아예 신호등이 없는 충주호 국도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때 그게 넘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대리점에 무월급 담보로 잡혀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10개월이나. 녀석도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중고로 매매하고 대리점 볼모가 되어 붙들렸다. 일하면서 3년 동안 나는 지역 바이크 경주 예선에 나갔다. 항상 2등이었다. 좀 더 연습했더라면 분명 본선에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까지 들자 아버지가 탄식하며 나에게 석탄을 던졌다. 불 잘 보라는 소리겠지. 아버지는 하던 도둑질이라던 유기 숟가락 제작을 다시 시작했다. 밸이 없다는 소리는 어디에서 들었는지, 공방이 마련되자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어 버렸다. 하지만 여태껏 돈은 없었고, 손가락도 없는 처지였다. “거기 좀 잘 잡어 봐라.” 아버지는 내가 쉬는 날이면, 대장간을 열었다. 불을 붙이고 쇠를 때렸다. 왼손을 잘 쥐지 못하는 아버지는 물체를 세게 잡지 못했다. 벙어리장갑 같던 손으로 제법 달군 쇠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 힘이 빠져 아예 놓쳤다. 빨갛게 달궈진 쇠가 날아다니는 것은 실로 위험하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 일을 계속했다. “이놈아, 어딜 쳐다보고 있어, 거기 좀 잘 잡아 보라니까.” 아버지는 공방 장비인 탁상 드릴과 모루를 쓰기 불편해했다. 고민 끝에 아버지는 작은 삼촌을 불러왔다. 쫄보 은섭이 저그 아버지. 그러니까 은섭이네 삼촌은 아버지랑 같이 일하던 쇳쟁이다. 그는 이미 십 년 전에 이 지역을 떠났다. 바닷가 근처로 가고 살고 싶다던 그는 서해를 바라보는 작은 마을에 공방을 열었다. 낮에는 어물을 가져다 팔고 밤에는 어두운 눈으로 돌을 갈았다. 그의 일은 노리개에 들어갈 호박과 옥돌을 다듬는 전통적인 수공예 일이었다. 하지만 삼촌도 본래 대장간과 금속 대공 작업으로 처음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와 시작이 같았지만, 아버지는 서울과 충주를 오가며 밥숟가락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고향을 버린 은섭이 저그 아버지는 자수정 장신구를 남대문 상가에 납품했다. 그게 재미가 괜찮았다. 작은 점포를 얻었고, 거기에서 가락지며 옥 가락지를 만들어 팔았다. 미군 군복을 염색해서 팔기도 했다. 결국, 아버지는 수저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고, 은섭의 부친은 옥돌과 자수정을 다루는 세공사가 되었다. 아버지가 그를 불러 공방에 집게를 달았다. 불대, 망치를 치는 곳, 용접, 연마실 모두 말이다. 머리 위에 철제 줄을 우선 벽 끝으로 고정했다. 거기에 피아노 줄이라는 철제 선을 깔았다. 레일 위로 고리를 달고 그 아래 고정 집게와 클램프를 달았다. 왼손이 자유로워지자 살림살이가 더 나아졌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라는 의견을 무시한 채 다시 대리점을 찾아가 일했다. 타이어에 바람도 넣어주고 오토바이를 정비해 주는 일이었다. 가끔 중고로 산 놈을 몰고 거리로 나갔다. 집에는 모르게 했다. 후에 나는 바이크 실력으로 배달 일에도 뛰어들었다. 큰아이 분윳값과 매달 기저귀, 약값을 이걸로 벌었다.

왼손이 해방되었다고 하더라도, 일에 대한 속도는 썩 나아지지 않았다. 다만 정교하고 실수가 줄었을 뿐이었다. 공예 제조 일이 본래 그런 것이어서 마구 공장 바닥을 구르는 것과 같다. 농사가 땅바닥을 구르는 일인데 그것과 아주 똑같다. 내가 바퀴로 아스팔트를 구르는 동안 아버지는 더러운 먼지 바닥을 굴렀다. 돈과 배알이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나는 잘 모른다. 그가 바이크 엔진의 천 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의 속도로 쇠를 구멍 뚫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아, 이게 보통 일은 아니었구나 하고 느꼈을 뿐이다. 여하튼 쫄보 은섭이(은섭이는 아예 바이크를 안 탄다. 그래서 우리가 쫄보라고 놀려도 아무 소용없다, 안 탄다.)를 그날도 꼬셔서 한번 타보라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 본 적이 없다. 왜 뛰냐고, 다음 것 타면 되지. 이런 식이다. 하긴, 안 해 본 것을 말하는 것은 입만 아프다. 그래서 도태라는 게 있다. 목이 긴 기린이 더 높은 곳의 과일을 먹었을 것이다. 목은 길어지더라도 그렇게 노력해 온 유전적 결과 아니겠는가. 살아남은 것이 강한 거니까. 쫄보 은섭은 절대로 바이크에 올라가지 않는다. 그 속도가 싫다고 했다.

“그래서? 네가 쓰는 핸드 드릴이 1분에 몇 바퀴나 도냐? 또 핸드 그라인더는?”

“그런 거 모른다니까는.” 은섭은 말투도 느리고 하는 행동도 그와 같다.

“속 터진다니까. 넌 밥 좀 빨리 먹어라. 배달 아저씨 그릇 가져가려고 기다린다니까.”

“그거야 저 사정이지. 나는 본래 빨리 못 먹어.”

그러다 보면 은섭이 먹던 짬뽕이 불어 터져서 다시 한 그릇이 되곤 했다.

“우리 아버진 말이다. 요새 활비비며 돌대 송곳 같은 걸 가끔 쓰신다니까. 너, 나무 비벼서 불 피우는 거 봤지? 딱 그 속도로 쇠를 비비고 있던데. 아버지도 그거 쓰시더냐?”

나는 돈도 없고 속도도 뒤처진 아버지의 행태가 놀라워서 은섭에게 물어보았다. 삼촌도 그걸 쓴다고? 설마.

“우리 아버지도 갖고는 계신가 보더라.”

“뭐라고? 진짜로? 에이, 설마,”

“진짜라니까. 한쪽 벽에 동그마니 매달려있던데.”

“야야, 거북이 달리다가 하프라인 넘는 소리 하지 말고. 어여 그 짜장이나 들이켜라. 저기 아저씨 똥줄 탄다.” 대리점 아들인 준석이 간짜장을 양파와 비벼 들이키면서 말했다.

“너는 언제 왔어?”

“매니저인 나를 뭘로 보는 거냐? 내가 이래 봬도-.”

“어이, 둘 다 이리로 온나.”

나와 매니저, 그러니까 그때 다리를 부러트려 먹은 준석은 바이크를 잊지 못해 다시 한통속이 되었다. 상금은 반땡. 식비는 각자. 다만 회식비는 녀석이 냈다. 물론 소주 회식이지만. 우리는 다시 대리점 사장에게 끌려가 눈알이 터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바이크를 수리했다. 고칠 수 있는 것은 버리고 새로 갈았고, 쓸 수 있는 것도 새로 갈아 인건비며 수리비에 청구했다. 사장은 우리 일에 만족했고, 우리도 부품을 새로 얻게 되어 만족했다. 사장은 우리가 왜 만족스러운지 잘 몰랐다. 우리는 저것들을 모아 새로 한 대를 조립하기로 했다. 아주 만족스럽다.

월요일에는 백미러를 갈았다. 아주 느린 일이었고 종일 비가 왔다. 저녁때 비가 그치기를 바랐지만 그치지 않았다.

화요일에는 굳이 버리지 않고 고치겠다는 환자, 아니 고객이 찾아와서 바이크의 머플러를 떼어냈다. 환자, 아니 오른팔에 깁스한 고객은 그것을 보며 울었다.

수요일. 내 머릿속은 이미 그친 비와 아스팔트와 호숫길에 가 있었다. 월요일에 오기로 한 신삥 50대가 입고 되었다. 매장 입고를 마치고 나자 나는 아예 뻗었다. 열두 시에 바이크를 몰고 나왔으나 다리가 후들거려 다시 끌고 들어왔다.

목요일. 다시 비가 왔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귓속이 멍멍하다. 뭐라고? 고객이 찾잖아! 뭐라고?

금요일이다. 나는 창고에 넣어둔 녀석을 한번 보고 오기로 한다. 귓속은 아직도 멍멍하다. 두 시간을 고르던 손님이 그냥 갔다. 아, 내가 뭘 잘못한 거냐구. 사장님은 짜장을 들고 사장실로 들어가서 혼자 먹는단다. 그 결과 단무지 그릇도 사라졌다. 아, 이런.

92년형 신형 바이크 모델 브로마이드가 왔다. 나는 너무도 황홀한 나머지 그것을 집에 가져다 붙였다. 사장님이 그걸 찾다가 짜증을 냈다. 나는 본사에 다시 전화하면 되지 않을까요? 했다. “다시 한번 짜장 처먹을 때 아무거나 깔기만 해.” 사장님이 말했다.


3.

아버지의 공방엔 온갖 기계와 공구로 넘쳐났다. 이름 모를 기계도 많았다. 수공 기계인지 전기 기계인지 알 수 없는 것도 많았다. 무슨 공모전에 내보려 한다고 두 달 넘게 나를 괴롭혔다. 그래 보았자 수저지 뭐 다른 거겠는가. 일을 돕고 난 밤, 우선 나는 달렸다. 그래야 속이 풀렸다. 아버지의 느리고 또 느린 일을 바라보고 있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수저는 그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참 알다가도 모를 어려운 일이 도처에 있는 것이다.

“그게 그리 좋냐?”

“네?”

“바이크 말이다. 너 아직도 그거 타지?”

나는 능구렁이 같은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허리가 더욱 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도 왼손을 잘 쓰지 못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 상은 충분히 그 보상을 해주었다. 그가 전문대학이라도 들어가지 않겠냐고 다시 물어왔다. 나는 자동차 정비학과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

일부러 경기도 남쪽 대학을 지원했다. 수원 아래 위치한 대학은 충주에서 차로 한 시간 떨어져 있는 거리다. 매일 집에 못 가니 기숙사건 자취건 해야 할 판이었다. 아버지는 충주 근처에 대학이 없더냐고 두 번 세 번 다시 물었다. 방을 구해줄 깜냥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용인이며 수원 변두리에서 일을 배우고 잠도 재워주는 곳을 찾았다. 다행히 중국집을 하나 구했다. 야간 배달만 하기로 했지만, 공강 시간 낮에도 출근해 배달하거나, 그릇을 닦았다. 전문대학을 다니는 동안 두 대 차량을 분해했고 세 대를 조립했다. 지도교수는 졸업할 때가 되자 면담을 하러 연구실로 오라 했다. 나는 킁킁거리며 옷 냄새를 맡았다.

“너 학교에도 배달 오지? 경비아저씨가 한탄에, 장탄식하시더라. 위험하다고.”

“그냥 이동 수단인데요. 여기서 쩌어기 갈 때 타는 자동차랑 같아요.”

“흰소리 말고. 너 아버지가 장인이시라며?”

“아닌데요.”

“그럼, 이건 다 뭐야?”

지도교수가 던진 신문 한쪽에 아버지가 충청북도에 ‘시도무형문화재’로 인정되었다는 헤드라인이 실려있었다.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표본이 되는 운운. 기자들은 하나같이 저딴 식으로 표제를 뽑는단 말인가. 동전 크기의 아버지 얼굴을 보고 나자 그 기사는 읽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공방과 공장을 다니던 사람인데,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술만 마시면 늘 굶었다는, 맞았다는, 다쳤다는 얘기뿐인 분이.

어찌 되었든 지도교수는 전화번호를 하나 던져주며 누군가를 찾아 가보라 했다. 다 졸업한 마당에 그깟 선의가 다 무어란 말인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쪽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졸업하고 나자 딱히 재미난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애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이른바 <밤 열 시 클럽>. 우리는 열 시에 충주시청 공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원주까지 가는 길을 메인으로 삼고, 일주일에 한 번 거길 왕복하기로 했다. 물론 각자 바이크를 우선 할부나 중고로 사기로 했다. 이제 뒤에 태우고 달리는 낯 간지러운 짓은 안 하기로 했다. 첫날 바이크를 구해오지 못한 준석은 스쿠터를 하나 훔쳐 왔다. 우리는 그날 헤어질 때까지 녀석을 놀려대며 웃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 속도를 포기할 수 없다. 바닥이 물이 흐르듯 지나간다. 작은 냇물에서 물을 허리까지 담가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물에 떠내려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나는 작은 냇물 표면 위에 뜬 물고기다. 햇살을 받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찬란한 빛이 나의 허리로 지나간다. 굉음은 그와 더불어 덤이다. 속도와 굉음, 그리고 그 바람결을 나는 포기할 수 없다.


4.

“글쎄, 다시 오지 않아도 된다니까!”

나는 결국 이 말마저 뱉어 버렸다. 은섭이 우리 모임에 나타났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스쿠터와 베트남산 헬멧도 구비해 있었다.

“왜 너랑 안 어울리는 짓을 하려구 그래? 너 이거 위험해. 그냥 하던 거나 해라. 그건 그렇고, 너 요새 뭐 하고 사냐?”

은섭은 아버지의 일을 도와 보석공예 일을 한다고 했다. 들어도 알지 못할 옥이며 돌 무언가를 연마해서 사대문 어디 납품한다고 했다. 나는 그게 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나도 속도가 필요해.” “어쭈우? 속도? 필요? 하다구? 너 이거 백 킬로는 당겨봤어?” “야, 스쿠터가 뭔 백이야, 그러다 엔진 터지지. 뭉게뭉게.” 대리점 아들놈 준석은 입버릇을 감추지 못하고 킬킬거렸다. “좋아, 너 이거 백 쏘아봐. 그럼 우리 클럽에 끼워주마.” 나는 곧 고개를 저었지만, 녀석은 재미있지 않겠냐?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은섭이 스쿠터에 올랐다. 나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은섭이 탄 스쿠터가 신호등이 점멸하는 밤거리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말이다, 한참 모자란 놈들이나 하는 짓거리여.” 아버지가 혀를 찼다. 내가 밤마다 도로를 폭주한다는 소식은 충주에 쏜살같이 퍼졌다. 여기는 도대체 비밀이라고는 없는 도시다. 그래서 불륜도 없다. 들킬까 전전긍긍할 놈들은 아예 시작할 수가 없는 곳이라나 뭐라나. 좁디좁아서 사람 눈들이 곧 CCTV니까. 아버지는 나이를 좀 자시더니 약간의 배알이 생긴 듯했다. 하긴 수저 팔아서 번 돈으로 대학 졸업장을 가져다 드리자 그제야 한번 웃어 보인 분 아니던가.

“젊음도 한때니까. 그런 짓. 허다 말믄 가장 좋고. 반대는 안혀. 네 인생이지. 하지만 너도 나이를 먹을 거 아니냐? 가정도 꾸려야 하고?”

“제가 알아서 해요.”

“얼레? 이불 하나 개지 못하고 나가는 놈이 뭘 알아서 해!”

“네에?”

“네 잠자리 꼬라지를 봐라. 저게 사람이 자다 일어난 거 같으냐?”

바닥을 보니 컵라면 그릇에 담배꽁초가 가득 담겨 있었다. 소주병은 다섯, 여섯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이불이라 할 것도 없는 포대기가 구겨져 엉켜 있었다. 지린내는 아니어도 여기저기 처박아둔 휴지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치울게요.”

“1년 내내 치운다는 소리지! 언제 치워? 그리고, 너 이제 공방에 나와 일 배워라!”

“왜 또 그 얘길-.”

“쓸데없는 오토바이 대리점 그만두고!”

“제가 왜 재미도 없고, 그리 느려터진 일을, 게다가 미래도 없는, 아니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으세요?”

“야, 이놈아, 내가 너를 밥을 굶겼냐? 옷을 안 사줬냐?”

“밥도 밥 나름이고, 옷도 옷 나름이죠.”

“이눔이!”

“내가 배알도 없는 양반한테 맞을까 봐? 어디 때려봐요! 확 다 불 질러 버릴 테니까!”

그날 밤이었다. 은섭이 또 나타나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담배 총알을 탁 튕겨서 껐다.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때 멀리서 바이트 굉음이 들려왔다.

“딱 맞춰 오시네. ”

은섭이 굉음을 쳐다보며 말했다. 라이트를 번쩍거리며 우리 앞에 나타난 사람은 충청북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상협이었다. 나는 눈을 비벼서 다시 쳐다봤다. 그가 우리 꼴을 쫘악 훑어보며 말했다.

“하아, 여기 뭐냐? 옷 입은 꼬라지들허곤. 이건 뭐 양아치 수준이네.”

그가 헬멧을 벗어 백미러에 걸었다. 긴 턱에 작은 콧수염과 구레나룻이 반짝였다.

“인사해. 우리 형 친구. 누군지는 알지?” 왜 몰라. 내 방 브로마이드에 지금도 걸려있는 사람인데.

“라이딩 한 수 가르쳐 달라고 모셨다. 언제까지 내가 너희 구박과 천대를 듣고 있을까 싶어서.”

“어떻게 아는 사이시냐? 그것도 은섭이, 네가?”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제대로 된 코너 웍을 배워주실 거다.”

가르쳐준다는 소리네. 저건 어느 나라 한국어냐. 나는 흥분해서 오른손을 달달 떨고 있었다.

“반갑다. 코너 웍은 아니고. 짭새한테 안 달릴 방법만 전수하기로 했다.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김상협은 나를 쳐다보더니 씩 웃었다. 그가 나와 준석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알겠지만 바이크는 눈하고 무릎으로 탄다. 절대 손이나 발이 까불지 않는다. 자자, 각자 애마에 올라타 봐라.” 그러고 보니 은섭의 오토바이가 바뀌어 있었다. 어디서 저런 새끈한 놈을 구했단 말인가. 내가 눈으로 녀석의 애마를 스캔하자 김상협이 다시 말했다.

“네가 여기 대장이지? 너 김 교수님 알지? 너한테 내 번호 줬다는데? 근데, 왜 이리 굼떠?” 나는 브로마이드가 대사를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김상협은 곧 따라오라는 수신호를 하더니 곧장 앞으로 치고 나갔다. 시원한 소리가 그의 뒤로 불꽃을 뿜고 있었다. 나의 심장이 밤새 털컹거렸음은 물론이다.


*

앉은뱅이 의자에 궁뎅이를 걸친 아버지는 잔뜩 폼을 잡았다. 큰기침도 연방 해댔다. 앞엔 영상을 촬영하려 세워둔 카메라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주 문화재연구원에서 왔다는 모 대학 여선생은 단발머리 차림이었다.

“선생님, 카메라는 그냥 저희 참고용이에요. 녹음이 중요한 거라서요.”

“네네, 잘 알지요, 제가.” 헛 대답을 하던 아버지는 개량 한복 소매를 탁탁 털어 어깨를 고쳤다. 손바닥에 침을 뱉어 자신의 귀 옆 하나둘 삐져나온 흰머리를 진정시켰다.

“그럼, 충청북도 무형유산 기록도서 2일 차. <수저장> 면담 들어갑니다. 저는 기록자 김 우선이구요. 지난 시간에 했던 대로 연이어서…….” 1994년 프로젝트 <충북도 장인 기록도서>는 나이든 장인들의 삶을 구술하여 책을 편찬하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말하는 작은 하나하나가 모두 녹취되어 기록된다. 그 말투와 호흡을 그대로 담아 현장감이 남는다. 하지만 고령의 노인 다섯 명을 골라 일을 진행한다고 했다. 그중 아버지는 젊은 축에 속했다. 다섯 명 중 한 분이 5회 차 녹취를 다 못하고 병원 신세를 지더니, 그새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날아왔다.

아버지는 군청과 시청에서 요구하는 모든 일에 족족 매달렸다. 한 번도 시간이 없다는 대꾸나 뒷소리를 하지 않았다. 발주가 급한 날은 나를 붙잡고 야간 일을 했다. 아버지 몰래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연습하기로 한 날이었다. 나를 붙들고 일부러 저러는 것이 아닌가 의심도 들었다. 일하는 동안 내 호기가 사라졌다. 넋두리처럼 주워들은 그의 지난날 때문이었다. 그것이 너무도 듣기 거북하고 어려워서 도망쳤었다. 배알도 없이 아무에게나 조아리는 사람. 배알도 없이 어떤 거절도 하지 못하는 사람. 어음에 떼이고, 가격을 후려쳐도 웃어주던 사람. 아버지가 부끄러워할 줄 모르던 유일한 가난. 나는 그의 젊은 날과 배고픔을 듣고 있었다. 그러고 나니 빨리 바이크를 몰고 도로의 소실점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일은 고됐다. 어느 날은 유기 판재에 구멍을 뚫었고, 어느 날은 수저에 광을 냈다. 수저를 광내다가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런 날은 아예 바이크를 타지 못했다. 나는 이 하염없고 티도 안 나는 허울 좋은 노동에 몸이며 정신을 빼앗겼다. 뒷목과 어깨가 결려와 잠을 자지 못했다. 등짝에 항상 파스 냄새를 달고 살았다.

“이거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더라고.” 아버지는 수저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며 말했다.

“이게, 시간이 많이 드는 일여. 넌 많이 봐와서 알 것 아니냐. 기계 프레스로 찍어내는 것 하고는 품이 다르지. 일반인들은 철컥철컥 프레스로 찍어내면 그저 숟가락이 되는 줄 안다. 하다못해 늘 봐오던 너도 그렇지 않냐.”

“알아요. 오래 걸리는 거.” 나는 핀잔하듯 말했다.

“마냥 오래 걸리는 일이라기 보담은. 머시냐 나는 자부심이 있었거든. 그래서 프레스를 안 쓰지. 아암, 그게 아주 오래되었다.”

“그래서 하루에 몇 개나 만들어 파는데요?” 나는 슬슬 또 오기가 났다.

“밥은 굶지 않았지. 하루에 많이 하면 열 개…? 는 한다. 아직 손에 덜 익어서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느려터져서 언제 집 사요?”

“…….”

“이런 방식을 고수하는 것, 너무 웃기지 않아요? 지금 세월이 얼마나 빠른 데?”

“누군가는 해야 한다. 너한테 부끄럽지 않게 하겠다.”

“저는요, 이 일 안 할 거니까. 저한테 부끄럽지 않아도 된다구요. 아버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그래. 네가 지금은 잘 모를 게다.”

아버지는 숟가락 머리를 가져가 태장대 앞에 앉았다. 그러곤 손가락 구멍이 뚫린 장갑을 왼손에 끼더니, 오른손에 대줄을 쥐고 문질렀다. 한참 줄을 밀어 형태를 다듬었다. 나는 저쪽 구석에 놓인 금속용 절단 가위를 바라보았다. 우선 잘라내 형태를 다듬어도 될 일이었다.

“이제 나머지는 내가 해도 될 일이다. 가서 네 일 봐라. 넘 달리지는 말고.”

“그때, 내가 군대에 간 얘기를 했던가?”

“아뇨. 군대 가시기 전에 지난번 기록이 끝났어요.” 김 우선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쟈 기억이 통 내 것이 아니어요. 그래서 그때, 내가 열아홉이 되었고-.”

내가 작가 선생 의자 옆에 종이 커피를 내려놓자,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척 꺼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메모를 끄적이며 아비를 쳐다보았다. 기록자가 선생님 그래서 군대에선 어떻게 되셨죠? 라고 다시 물었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는 듯이 말했다.

“전쟁은 한참 전에 끝났는디 제대를 안 시켜 주드만요. 그때는 뭐 나가라면 나가고, 오라면 오고, 엎드리라면 맞고 할 때라. 어느 날인가 야간훈련을 나갔는데 배가 아프더라고요. 잠시 측간에 다녀온다고 하고 숲으로 기어들어 갔는데. 이거 봐라,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거예요. 그 길로 일주일을 밤낮에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이구, 왜, 당연히 잡으러 왔지. 내가 그때 무슨 배포였든가, 서울로 도망가지 않았겠어요. 거지꼴로 돌아다니다 보니 왕십리 근처에 고물상이 있더라고. 거기서 밥도 얻어먹고 머슴을 살었죠.

주인이 놋쇠 수저를 만드는 사람인데, 전쟁통에 아들도 잃고 자신도 다리가 하나 잘렸습디다. 거기서 3년 머슴살이하다가 쇠경 주는 셈 치고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했지요. 아니면 그냥 충주로 가버린다고 농담 삼아 뼈 있게 말해 보니 그제야 가르쳐준답디다. 그래서 평생 이제 이것만 하게 되었지요.”

잠시 말이 없던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후 공장밥을 먹은 얘기며, 사기를 당하고 불구가 된 질 나쁜 이야기는 다 빠졌다. 기록자는 그 장면을 기다렸다는 듯 속눈썹 하나 흔들림 없이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버지가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흔들었다. 아비가 밥을 자주 얻어먹었다는 사실, 머슴을 살았다는 사실을 말할 때 이미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주름이 가득한 손등 위에 퍼런 핏줄이 보였다. 푸른 핏줄에 도드라진 굴곡을 지나 눈물이 내를 이루어도 할 말이 없을 듯했다. 너무도 가난했다고. 하루에 피죽 한 그릇 얻어먹어 보자고 시작한 것이라고. 내가 복이 많은데, 복이 많아서 그걸 다 못 갚고 있다고. 아버지가 첫 휴가를 나갈 때 중대장이 부대에서 십시일반 돈을 걷어 그에게 주었다는 것. 그리고 머슴 새경을 일 년 치 모아 집으로 돌아갈 때, 그의 주인이 그것에 두 배 되는 돈을 얹어 주었다는 것을 말할 때 더욱 말이 끊어졌다. 복이 많아서 빚도 갚고 다시 부대로 복귀했노라고. 복이 많아서 그 돈으로 하꼬방을 한 채 얻어 집이 모양을 갖게 되었노라고.

나는 술기운에 들었던 과거를 오늘에야 자세히 듣고 있었다. 그때 문자가 왔다. 잠시 망설였지만, 밖으로 몰래 빠져나왔다.

오늘은 수안보에서 괴산 시내까지 코너를 돌기로 했다. 그래서 낮에 모인 것이다. 그 구간 국도엔 모두 백여 개 에스(S) 자 코너가 있어 코너링을 배우기 천형의 지리다. 우리는 그것을 무릎으로 제어하는 기술을 배운다 했다. 김상협은 이걸 해두면 ‘짭새는 안녕’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괴산 시내에 도착해 <얼큰 짬뽕집>에 들어갔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경이로운 김상협의 코너링과 속도에 침을 질질 흘리며 따라갔다. 과연 아무나 상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국물을 들이켜던 그가 말했다.

“내일 시청 앞 공터로 와라. 내일이 마지막이라, 레이스 끝내고, 편의점 맥주나 한잔하자.”

그날 밤에, 나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김상협에게 물었다.

“선배님, 그게 있잖아요. 속도라는 거. 그걸, 그러니까 막 당기다 보면, 왜 희열 그런 거 있잖아요.”

“얘가 말을 왜 이리 버벅대?” 은섭이 말했다. 나는 평상심을 잃고 있었다.

“그래서, 니가. 다시 한번 정리해 봐라. 그게 무슨 소리냐?”

“왜, 속도가 끝까지 오르면, 내가 세상 속으로 팍 날고 있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나요?”

“얘가 취했나, 오늘따라 왜 이리 문학적이야?” 준석이 새우깡을 우적대며 말했다.

“아니라니까. 너넨 가만히 있어 봐.”

“그래, 둬라, 둬. 얘가 그래도 전문대 졸 아니냐. 나랑 가방끈이 비슷하거든.”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되물었다.

“아, 속도라는 거요. 그러니까 형님한테 빠름의 의미? 뭐 그런 게 뭔가 해서요.”

“뭐라고? 좀 어려운데?” 그가 귀찮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요. 우리가 바이크를 타면, 속도가 딱 오잖아요. 그때 그 절정에 오른 순간, 마치 과학이 준 은총? 혜택? 그런 짜릿한 기분이 들 때. 그때 어떤 의미가 드세요?”

“얘가 자꾸 아까부터 뭐라고 하는 거야? 나참.”

“그 끝에 이룬 성취감?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이 기계의 끝을 봤다. 내가 이놈을 끝까지 땅겨서-.”

“응, 거의 그렇지. 존나 끝까지 당겨보지.”

“네네. 그러니까, 그때 그 희열이 어떠세요? 기계의 한계? 그런 끝에 도달했을 때 느낌? 그런 거.”

“공군 가면 제트기도 탄다드라.”

“야야, 넌 빠져.”

“니가 궁금한 게, 절정에 도달했을 때 느낌, 뭐 그런 거 묻는 거냐?”

김상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그게 거의 뭐 속도의 끝이니까. 기계의 끝이기도 하구요.”

“그런 게 있냐?”

“네?”

“야야, 그런 거 느낄 틈이 있냐?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데? 내 뒤에 존나 따라붙는 경쟁자는 어떻고. 틈으로 치고 들어오려고 난리지. 쇼트트랙 알지? 얼음 위에서 하는 개싸움 말이다. 그것보다 더하지. 그 새끼들하고 거리 유지하느라 얼마나 눈치를 보냐고. 그랬다가 접촉 나면, 씨발 그냥, 아주 개작살 나는 거라-.”

“그럼, 그 속도에 올라갔을 때, 희열이나 의미 이런 건….”

“그게 있나?” 준석이 다시 졸린 눈으로 말을 받았다. 하지만 김상협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도 타봤잖아. 아니, 얼마나 정신 사납고 바쁜데. 그런 것 뭘 느끼겠어. 그리고 말이다. 저건 소모품이야. 속도 더 개선된 디자인 해마다 쏟아진다. 결국, 사람 하기에 달렸고. 사람이 타는 거지 뭐. 네가 말하는 고차원적인 것, 나는 잘 모르겠다. 존나 시발 달리다 우승한 거고. 코너 외우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연습 안 하고 되는 게 있냐? 야야, 의미는 그걸 물어보는 순간 사라지는 거야. 그냥 애마에 탄 나만 기억하면 돼. 그래야 안 자빠지고 완주하는 거야.”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입으로 묻고 있었지만, 입으로 말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때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마음이 묻는 말이었던가? 그는 입으로만 대답하려 했던가. 기술과 절차, 행동에 익숙한 사내는 더는 <브로마이드 엄지척> 우상이 아니었다. 김상협을 통해서 나는 빠름의 의미를 묻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를 통해 듣고 싶었다. 우리는 누구보다 빠르다는 것을. 빠르다는 건, 바로 살아있다는 것. 그러니까 그건, 그 질주는 내 번뇌의 탈출구이자, 해결책이라는 것을. 아니 열반의 경지라는 것을. 해탈, 그래 다 갖다 붙여도 너네는 모르겠지. 에이, 젠장.

두 달 후 은섭의 오토바이가 충주 강변 국도에서 전복되었다. 우리는 병원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갔다.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고 했는데, 녀석은 다행히 반신불수가 되었다. 왼쪽 마비가 왔고, 팔과 다리를 쓰지 못했다. 살아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은섭은 아스팔트에 갈린 한쪽 입술로 웃었다. 뭐든 다행이었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애마가 비를 맞고 있었다. 나는 바이크를 걷어찼다. 이제 의미를 알겠다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속도는 은섭을 갈아먹었다. 나는 쓰러진 기계 뭉치를 일으켜 세웠다. 그건 미련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아비의 그 말이 떠 올랐다. 나는 처음으로 수긍이라는 감정을 지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목격한 사고의 끝이 나를 흔들었다. 애마를 세워두고 세월을 하염없이 보냈다. 제 꼴을 비방하던 은섭은 화창한 봄날 병원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에이, 너 같은 게 뭔 오토바이냐구? 제 명에 죽지 않으려면 당장 돌아가! 내가 녀석을 자극하지만 않았더라도, 녀석은 절뚝거리며 옥상으로 오르지도 않았겠지. 연습한답시고 요리조리 철근을 용접해서 붙이거나, 짭새랑 경주도 하지 않았을 게다. 나는 바이크를 팔아 치웠다. 시간이 지났고, 그 세월 동안 아버지의 수저가 쌓여갔다. 나는 느리고 또 느린 공구가 있는 공방으로 다시 기어들어 갔다.

손으로 돌리는 공구와 발로 밟아 구동하는 족답기가 공방 구석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에 금방 익숙해졌다. 마치 재봉틀처럼 삐걱거리던 수공구는 나의 손과 발에 가까웠다. 나는 쏜살같이 지나가던 나의 시야의 자극과 탐닉에서 벗어났다. 비행기를 갖고 놀던 아이의 장난감,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축대에서 뛰어내리던 아이의 호기심은, 이제 사라졌다. 바야흐로 다시 겨울이었던 것이다.


******


나는 공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열었다. 함석으로 막아둔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와 가라앉은 먼지를 깨웠다. 칼로 찌른 듯한 예리한 빛이 나의 눈에도 밝게 빛났다. 공방은 그렇다, 허전했다. 이 안에 아버지의 움직임은 이제 없다. 병원은 요양원이 딸린 입원실을 권유했고, 밤마다 병원 복도를 다니며 호통을 치던 노인은 쓸쓸히 그 말을 알아들었다. 아버지가 굼뜬 동작으로 쇳물을 붓고, 연마기에 금속을 갈아내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 앞으로 주욱 그럴 것이다. 내가 여길 다시 움직이지 않는다면.

공방 내부엔 아비가 쓰던 도구와 공구들과 기계들, 그리고 납품하려다 시일을 넘긴 수저와 포장재 등속으로 어지러웠다. 문 앞에 무형문화재 로고가 금박으로 박힌 수저 박스가 잔뜩 쌓여있었다. 제품 진열과 작업장이 공존해 있는 이곳에는 그 경계가 없었다. 아비는 아무렇게나 버려둔 공구 속에서 필요한 것을 곧바로 찾아냈다. 또 제작이 완료되어 광을 낸 수저들도 그 완성도에 따라 놓인 곳이 달랐어도, 아비는 그 순서에 따라 물건을 콕 집어 찾아냈다. 공구들은 모두 아비의 손때가 묻어 꼭 그에 손에만 맞추어 제작된 것인 양 형태가 변해있었다. 아비가 오른손으로 쓰던 대줄은 꼭 그의 손에만 맞추어진 듯 약간 휘어져 보였다. 내가 이거 휘어진 거 아녀요? 하며 새 줄로 바꾸어 놓으려 하면, 아비는 그것을 다시 찾아 제 오른손 앞에 다시 가져다 썼다. 백여 개나 넘는 수저 본(本)들은 왼편 진열장 위쪽에 가득 매달려서 흔들렸는데, 마치 주인이라도 잊은 양 고개를 모두 떨구고 있었다. 뒤쪽 구멍을 철사로 동여맨 수저 본들은 합판을 자른 것들과 두꺼운 마분지를 잘라 만든 것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주물 먼지를 눈처럼 제 어깨에 쌓고 있었다. 몇 해 전 대학 강사 두엇이 찾아와 저 본들을 디지털화한다며 모두 벡터(vector) 방식의 파일로 만들었었다. 하지만 그 본을 저장한 시디 역시 뚜껑이 열린 채 진열장 안에서 먼지를 덮고 잠들어 있었다.

이곳 공방에 들어온 지도 삼십여 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집기며 물건 등속을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시장길 맨 뒤 과일 창고를 허물고 새로 공방을 지었다. 당시 충주 충인동 일대는 모두 고추밭이었다. 시장 골목을 따라 하천이 흐르고 하천 끝에 닭이며 토끼, 염소를 도축하는 사람들이 칼에 묻은 피를 닦으며 살던 시절이었다. 하천 먼 쪽으로 큰길이 나더니 금방 시장 입구가 정비되어 약국이며 과일가게가 자리를 잡았다. 칠금동과 지현동에 분분히 훑어져 있던 사람들은 방앗간을 위시하여 그 하천을 따라 상점을 열고 창고를 사들였다. 5일, 10일이 되면 작은 시장이 열려 텃밭에서 고추나 오이를 따던 할머니들이 너도나도 보자기를 이고 나와 좌판을 벌였다. 사람들이 종이컵 커피를 서로 사주고 웃음을 나누는 동안 그 할머니들은 모두 세상을 버렸다. 그리고 그 2세대들은 모두 제가 문을 닫고 여는 매장을 하나씩 열어 오래된 업소가 되었다. 짠지를 만들어 파는 이도, 채소를 배달하는 이도, 순대를 썰어 팔던 이도 모두 제 어미나 시어미를 제 손으로 묻었다. 가업을 물려받은 이들은 그것을 알 겨를도 없이 새벽에 나와 채소를 볶아 김밥을 말았고, 토끼의 목에 칼을 찔러 피를 뽑았다. 충인동 재래시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기 오 년 전 통풍이 들어 양손을 쓸 수 없게 되자 시장 사람들은 자신이 팔던 물건을 가져와 그에게 먹어보라며 주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그것들은 텃밭에서 길러온 채소와 털을 막 뽑은 오골계 몇 마리였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한편 일을 하지 못한다니 은근히 기뻐했다. 시장통에 날리던 쇳물을 녹이느라 피운 불 냄새와 먼지 재가 사라질 것이었다. 고추밭 한가운데에서 시작한 아버지의 공방은 마침내 먼지와 그을음, 그리고 재가 날려 괴로운 환경오염 장소로 변했다. 건물 통로를 이어 붙인 시장 사람들은 구씨 공방 때문에 혹여 땅값이라도 떨어지면 어쩌나 늘 노심초사했는데, 아마도 나중에 난 털이 먼저 난 털을 빼내려는 심사이거나, 아니면 그게 더 오래 길게 자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생수병을 열어 포트에 부었다. 포트 뚜껑에도 먼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익숙한 솜씨로 종이컵에 커피를 부었다. 잠이 깨려면 도리가 없었다. 마누라가 봤더라면 비명을 지르며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당신, 아버님 통풍에 걸렸던 거 몰라? 누굴 괴롭히려고 이래? 믹스커피는 안된다고 내가 말했지?

나는 커피를 들고 아비가 평소 앉았던 의자에 엉덩이를 걸쳐 보았다. 철제 다리가 4개 있는 동그란 가죽 의자였다. 시트는 이미 돈을 내놓으라고 한지 오래라며 입을 벌렸던 터라 수건이며 헝겊으로 동여매어 근 30년을 함께한 의자였다. 그래도 앉아보니 궁둥이가 뜨듯해져 왔다. 아직도 이 의자는 쓸만하구나. 나는 아비가 버리지 못하고 들고 온 그것에 앉아 다시 추억에 빠졌다.

똑바로 잡으라고 몇 번 말했겠어! 아따, 그렇게 했다가는 손가락 날려 버리기 딱 좋지요. 못마땅한 거? 어디 뭐 한 두 개라야지. 집게를 손이며 뭐며. 에이, 이거 잠깐 쉬었다가 가십시다.

아까부터 불이 꺼져가니까 잘 봐라, 재가 날리니까 쑤석거리지 말라고 지청구를 늘어놓았지요. 근데 지가 볼 때는 항시 잘 타오르고 있던 불인디 왜 저리 잔소리를 해대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드만요. 배울라면 제대로 하고, 아니믄 말어야지. 아, 그거 풀무요. 풍로를 치워버리고 새로 나무 구해 다시 짰죠. 송풍기는 이미 버린 지 오래고요. 손에 익을 때까지 해 보라고 했어요. 누가 모면 아들 골탕 먹이려고 사는 놈 같네요이? 그래도 내가 맨날 소리치고 그러죠. 야 이놈아 풀무질도 못 하는 놈이 무슨 망치질을 한다고 그랴!

그때부터 오른쪽 인대와 어깨를 풀무에 바쳤다. 오전 오후 여덟 시간 풀무질하다 집에 들어오면, 멘소래담이나 파스를 뿌리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끙끙 앓다가 잠에서 깬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풀무 두 개가 아작이 났다. 나는 은근히 송풍기를 연결하겠거니 했지만, 아버지는 목공 김 씨에게 전화를 걸어 아예 두벌을 더 맞추어 왔다.

“이거 뜯어라.” “예?” “너 이거 안에 어찌 생겼는지 봤냐?” “아뇨, 그게….” “뜯어.” 당신은 장도리를 내게 던졌다. “아버지, 이거 고장 나면 뜯어요. 새로 칠까지 해온 것을….” “뜯어. 나중에는 나무 사다 니가 맹글어라.” “예에?” “구조니 뭐니 니가 다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언제까지 김 씨 손 빌려서 주문해다 쓸거여?” “그래도 이 멀쩡한 걸.” “부시지 말고. 뜯어봐. 그래야 안다. 네가 팔로 무슨 바람을 넣고 있는지.”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가져다 쓰던 모루를 구석에 처박았다. 불려 온 사내들은 모루와 프레스를 옮기느라 끙끙대고 있었다. 뭐 하다 이리 늦었냐고 또 한 소리 듣기 전에 나는 장갑을 껴고 덤벼들었다.

“야야, 냅둬라이. 허리 다친다. 잘 봐. 두었다가 다시 쓸 건 게. 근데 이따 모루 새로 온다. 그때나 좀 도와라.” 오후가 되자 온갖 철물이 한 트럭 도착했다. 아버지는 근처 대장간이 망했다면서 그래도 쓸만한 놈을 골랐다고 기뻐했다. 우선 양모루를 모두 조선 모루로 바꾸었다. 손에 익은 걸 바꾸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 모루를 바꾼다는 것 말이다. 모루가 작업장 가운데로 자리를 잡자 주변 불대와 망치 모탕들이 제자리에 놓였다. 어느새 드라마 세트 같은 조선 시대 대장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모든 전기 장비를 수동공구로 바꾸고 있던 참이었다. 스승님이 쓰셨다는 활비비와 돌대 송곳까지 꺼내두자 눈앞에 KBS 대하사극이라도 새로 촬영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그 후로 몇 년을 아버지는 수공구의 기본과 원리를 새로 가르쳤다. 활비비와 족답기도 새로 만들었다. 재봉틀을 개조해서 만든 목재 족답기도 두어 대 더 들였다. 하지만 그것도 성에 차지 않은 듯 아버지는 연마기 옆에 큰 자전거 체인을 달았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돌렸는데, 아버지는 마침내 그것 또한 나무 상자로 가두고 기계 체인이 돌아가는 것을 눈앞에서 가려버렸다. 실제로 아버지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김홍도 그림 같은 조선 시대 민속화를 구해왔다. 출처는 독일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그림들은 조선의 민중과 노동자를 그린 그림이었다. 김준근이 그렸다는 그것은 노동과 삶에 찌든 민중의 모습들이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림 안에서 사용하는 목선반이며 온갖 물레나 수공구들이 현재 것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따라 그려보라 했고, 나는 그것을 현재 물건으로 다시 규격화해 보았다. 비록 사용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지만,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도구의 원형에 대해선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력은 말이나 소가 아니면 모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모두 손이나 발이 움직여야 기능이 가능한 인체공학적인 기계의 발명이었던 것이다. 원통형의 둥근 쇠 모루는 각이 지고 뾰족한 서양 모루로 바꾸었다. 아버지는 처음엔 인천 어느 촌구석에서 구해온 철로를 끊어다가 그것을 만들어 쓰다, 의정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앤빌을 가져다가 썼는데, 이제는 한국적인 데다 동양적인 위대한 모루쇠로 바뀌었다. 프레스로 찍어내던 수저틀은 어쩔 수 없이 공장 한쪽에 세워두었다가, 약 오 년 뒤에 새로 공장을 짓고 다시 그것을 재개했다. 수저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었던 호시절에 우린 다시 공장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한동안 수공예품을 생산하는 작은 공방처럼 우리는 모두 망치로 쳐서 그것을 만들었다. 한 번은 민속박물관에서 사진 여러 장을 들고 조선의 마지막 옹주의 부장품이라면서 수저를 복제해 달라고 했다. 수저는 도대체 사람 입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길고 뾰족했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정성스레 제작해 주었다. 후에 이 경험은 아주 큰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나에게 속도는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는 산을 오르는 사람처럼 한 길에 매달렸다. 장인 정신이라고 사람들은 부른다. 칭송하기까지 한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철없고 배고플 때 잘려 사라진 손가락에 대해서도 아직 그 연유를 모른다. 프레스에 잘린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그가 기계를 탐탁지 않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피라미드를 옮기듯이 노예처럼 일했다. 다만 그것밖에 없던 일이라 여긴 아버지는 산에 올라가 산이 되었다. 바보처럼 옮긴 산이 아래에서 언덕이 되고 구릉도 되어주었다. 아버지는 자연처럼 굳건해졌고, 곧 자연이 되었다.

그 사내의, 돈도 없고 배알도 없는 사내의 가난을 이어받은 그 일로 입에 풀칠하며 산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다. 할아비는 딸이지만 그 일을 물려받지 않는다고 지청구한다. 녀석은 미디어 콘텐츠학과에 들어가 먹방 찍는 유튜버가 되겠다고 했다가 집에서 쫓겨날 뻔했다.

인터뷰어가 나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이 장인의 일을 물려받았느냐고. 어쩌다가 이런 일을 30년 가까이하게 되었느냐고. 평생 하다가, 통풍에 치매까지 걸린 아버지를 둔 사람한테 한 참으로 재미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뭐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의 취지이냐고도 물었다. 취지가 어디 있겠는가. 나도 그저 일에 뛰어들었을 뿐이고 세월이 지나가 버렸을 뿐이다. 속도와 기계와 빠름만을 종교처럼, 신처럼 여기던 시절이 지나갔을 뿐이라고 말이다.

병실에 있던 은섭이 머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었다.

그의 침상 위에 쓰인 이름이 아니면 그 녀석인지 못 알아봤을 것이다. 달려보니 별 것 없더라고 그 녀석이 신음처럼 말했다. 누구나 한때인데, 그 대가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그의 사고가 내 것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자, 바람과 공기가 내 주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녀석이 다시 수술실에 실려 들어갔다. 복도는 아주 길었다. 녀석은 뇌수술 후에도 날 알아볼 수 있을까. 의자에 앉아서 열 시간을 기다렸다. 복도를 거진 백 바퀴 돌았다. 초조하다는 건 이런 것이다. 독서대에 꽂힌 병원 홍보 책자를 다 읽고, 월간지도 다 읽었지만 오로지 시계는 그 자리였다. 의사들이 본다는 칼럼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한참 달리다가 가끔 뒤를 돌아본다고. 그래서 그 속도에 따라오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을 기다려준다고 말이다. 내가 뒤에 두고 온 나의 영혼은 지금쯤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을까.

아버지의 녹음이 들려왔다. 나는 꿈에서 깨었다.

심지가 중요하죠. 심지가 없으면 이 일을 못 해요. 저놈이 한때 좀 저랬어도 심지가 있어요. 어릴 적의 얘기? 그것 해도 되나? 오토바이 타고 나돌아 댕김서 속을 썩였거든. 이건 인터뷰에서 빼주세요. 쟤도 프라이버시가 있는디. 하여간 제 형제들보다, 무엇보다 쇠 갈고 자르고 하는 일을 사랑하게 되었지요. 내 몸 더러워지더라도 금속 일은 다 하고 나면, 고게 반짝반짝 깨끗해져요. 손이고 손바닥이고 지문 간데없이 더러운 일이지만. 하지만은 그것보다 더 고귀한 일이 세상 어디 있겠어요. 제 몸뚱이 굴려서 만들어 놓은 것 팔아 밥 먹는 건데, 안 그래요?

끝으로 그냥 공구 잘 챙겨야 쓴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일하다 보믄, 손에 오래오래 함께 쓰던 망치며 줄이며 또 그 뭐시냐, 응 그렇지. 책상도 그렇고. 공구나 설비여건이 중요하죠. 앉은뱅이처럼 쇠를 밀고 당기더라도 오래 죽치고 앉아 일을 끝내야 하는 것이라서, 도구나 공구가 아주 중요합니다. 도구 간수가 제일 첫 번째여요. 이건 나만의 얘기가 아닐 것이고. 다른 장인들도 다 모두 그리 말할 겁니다. 도구 잘 쓰고 잘 닦아둬라. 그래야 안 다치고 일이 쉽다고요. 아암 그렇죠, 그렇고 말고요.

부끄럽기가 세상 싫었어요. 언젠가 이 일을 물려받을 것을 알고 있었죠. 그랬을 때, 부끄럽지 않은 작업장을, 공방을, 시설을 남겨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뒤에 보이시죠? 제 자랑 같지만은, 저 도구가 바로 접니다. 내 전부죠. 제 자존심이고, 제 인생 전부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아들이 다 쓸 줄 알아요. 느려터진 활비비도, 돌대 송곳도 다 쓸 줄 알아요. 묵묵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구멍이 톡, 하고 뚫려요. 손은 연방 물에 금강사를 적셔서 부어야죠. 오래 걸려요, 뭐든. 아주 느리다니까요.

아버지는 그해 겨울 세상을 버렸다. 나는 그때 무엇보다도 빠른 물체 위에 내가 올려져 있음을 알았다. 무식하게도 그건 힘이 세서, 앞으로만 전진하는 통쇠였다. 망치질도, 풀무질도 되지 않는 통쇠. 줄로도 갈리지 않고, 굳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통쇠. 내 옆에서 나를 따라오던 나의 영혼은 길을 잃지 않았다. 나는 미친놈처럼 달리지 않았다. 그제야 내 영혼도 자꾸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공방 안에서 현기증이 일었다. 세월을 옥 쥔 통쇠 바퀴가 녹을 떨구며 천천히 굴러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