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을 맞아 아이들은 두고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결혼기념일에 부부만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2015년부터다. 둘만의 외식으로 시작해서 호텔에서 1박 후 조식 먹고 나오기, 호텔 1박에 다음날 반나절 여행, 제대로 된 1박 2일 여행으로 발전시켜 오다 올해 드디어 처음으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아이들은 두고 부부만 호텔에 가서 자기 시작한 것은 2016년, 준하 초 6, 민준 중 2 때였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음식을 마련해놓으면 챙겨 먹을 수 있고, 준하가 라면이나 떡만둣국 정도는 끓일 수 있게 되면서 점차 부부만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최근에는 평소 자주 접하지 않는 배달음식을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게 되면서 아이들도 이런 때를 나름 즐기게 되었다. 준하는 "엄카(엄마카드)만 두고 가시라"는 멘트와 함께 기분 좋게 우리를 보내주고, 전에는 "어디 가요? 왜 가요?" 하며 의아해하던 민준이도 요새는 그러려니 하며 "잘 다녀오세요" 하고 평안한 인사를 건넨다.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이라니 짧은 하룻밤이라도 이게 어디냐 했던 처음과는 달리 해가 갈수록 나는 자꾸 욕심이 생겼다. 하룻밤 지나고 퇴실 시간 11시에 쫓겨 나오는 게 항상 영 아쉬웠던지라 이번에는 좀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그래서 2박을 하고 싶다며 남편 눈치를 봤는데 무조건 예약하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내심 많이 놀랐다.
26년 차 회사원인 남편은 항상 바빴었고, 평일에 휴가 한번 내기는 진짜 어려웠다. 그런데 요즘은 연차가 오르며 일도 좀 줄고 눈치 볼 윗사람도 적어진 데다 무엇보다도 남편이 '둘만의 여행'이 주는 재미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돈 쓰며 뭐하러 호텔에 가냐고 했었고, 돈을 조금 더 내며 전망 좋은 방을 고르는 것도 전혀 이해를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무조건 내 선택에 따르겠다며 기대하는 표정을 보여 줄 정도가 되었으니 말 그대로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다.
첫날, 여행지인 삼척으로 출발하며 운전대를 잡은 남편에게 내가 물었다.
"마누라랑 같이 여행 가니까 좋아?"
망설임 없는 남편의 대답이 돌아왔다.
"응. 되게 좋아. 마음이 막 설레"
가족여행을 계획하면 항상 나는 일정을 꼼꼼하게 짠다. 집에서도 일정이 없으면 뒹굴거리는 민준이를 여행지에서까지 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틈만 나면 "아침은 뭐 먹어요? 점심은 뭐 먹어요? 이제 어디 가요?"하고 물어대는 민준이로 인해서 일정을 잡아놓지 않으면 질문에 답할 대답을 찾지 못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과 둘만 가는 이번 여행은 맛집 몇 개와 주변 관광지만 대충 검색해놓고 일정을 확정하지 않은 채로 떠났다.
삼척이 가까워지자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우리 도착해서 이제 뭐해?"
"글쎄... 구체적인 일정은 하나도 안 잡았어"
"내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좋아서 뭘 해도 괜찮다 이거지?"
"응!!!"
나도 망설임 없는 대답을 날려주었다.
결혼 22년 차에 이와 같은 '깨 볶는'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나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이런 종류의 대화는 연애할 때 혹은 신혼 때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기억해보면 그 시기의 우리는 이런 대화를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도 모르는 사이 세월이 훌쩍 흘러 우리는 어느새 한 사람하고 20년을 넘게 산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알게 되는 것은 오래된 부부에게서 나오는 이런 간지러운 대화가 '진짜'라는 사실이다. 사랑은 오랜 시간 서로를 보아오며 상대의 약한 점, 부족한 점도 알게 되고 감싸주면서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함께 하고 헤쳐나가며 서로를 아끼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커지기 때문이다.
삶에서 겪는 어려움들은 누구도 원하지 않고, 기뻐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어려움의 폭풍을 겪고 나서 보니 오히려 그로 인해 얻은 게 많다는 걸 요즘 새록새록 느낀다. 장애가 있는 민준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남편이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 숨겨 놓은 열등감을 극복하고 이제는 어딜 가나 당당하게 우리 큰 아들이라고 인사시키게 된 것이 나는 정말 고맙다. 또한 의사소통 안 되고 고집불통이던 민준이와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지금의 의젓함을 이끌어낸 나에게 남편은 아낌없는 엄지 척을 보내준다. 서로에 대한 이런 스토리들이 밑받침된 가운데 이제 우리는 둘 다 50대에 접어든 22년 차 부부이지만 남들이 들으면 닭살 돋는다고 야유를 보낼만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나누는 사람들이 되었다.
2박 3일간 보낸 삼척 여행은 참 좋았다. 둘째 날인 금요일에는 오후까지 비가 많이 와서 숙소에서 뒹굴뒹굴하며 책 읽다, TV보다, 낮잠 자다 하며 내가 꿈꾸던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 날이 개고 나서는 바다와 주변에 있는 관광지를 둘러봤고, 다음날 새벽에는 애국가 영상에 나온다는 촛대바위 일출을 구경했는데 아주 멋있었다.
작년부터 동해로 여행을 갈 때마다 '바닷가에서 색소폰을 불면 참 멋있겠다'며 남편을 꼬셨었다. 그런데 통 안 넘어가던 사람이 이번에는 주섬주섬 색소폰 가방을 챙겨 트렁크에 싣는 모습을 보였다. 남편은 '방구석 아티스트'답게 사람이 없는 해변을 어렵게 찾아가서 색소폰을 연주했는데,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온전히 나만을 위한 색소폰 연주회가 되었다. 동해바다 파도소리를 반주 삼은 남편의 색소폰 연주는 22주년 결혼 기념 선물로 손색이 없었다.
남편과 나도 한때는 마음이 합해지지 않았고, 나는 이혼도 잠깐 생각할 정도로 부부 관계가 힘든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시간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각자의 이기적인 마음과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으려고 애쓰고 노력해 온 결과 지금은 달콤한 열매를 함께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정말 감사하다. 22주년 결혼기념일 여행을 막 다녀왔는데 벌써 내년 여행이 기대가 된다. 23주년에는 어디에서 어떤 여행을 할까나. 지금부터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지를 물색하며 기대감을 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