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가 동의될 때, 독단적 주장도 가치를 갖는다.
공허한 주장, 치사한 주장, 그리고 독단적 주장. 생각할 수록 기가 찼다.
기가 차면서도 기가 막힌 말들이 아닌가 싶었다. 뇌리에 자꾸 그 말들이 맴돌았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면서 살아온 대부분의 것들이 의미없는 것들이었나 싶기도 했다.
나: 세상엔 의미없는 주장들이 너무 많군요?
노인: 의미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 그렇다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나: 의미는 없는데 가치가 있다구요?
노인: 그렇다는 얘기지.
나: 어떤것들이 그렇죠?
노인: 이것부터 얘기해보지. 자네는, 공허하면서 치사한 주장 중에 어떤것을 알고 있나?
나: 공허하면서 치사하다구요? 글쎄요... 공허한건 공허하지 않나요?
노인: 내 생각엔, 그런 주장이 하나 있다네. 꽤 유명한 것이지. 통 속의 뇌라고 익히 알려진 것이야.
나: 통 속의 뇌요? 그건 공허하다기보다는 치사한주장 아닌가요?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제 몸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잖아요?
노인: 일단 오히려 치사한 주장인지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네. 치사한주장을 내가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론적으로는 반증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지.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반증이 불가능할 때 치사한 주장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네. 그래서 우리는 통 속의 뇌 주장이 이론적으로나마 반증가능성이 있는지를 먼저 얘기해보아야 한다네.
나: 음... 반증하려해도, 다 막힐 수 있겠네요.
노인: 그렇지. 모든 증거가 다 뇌의 자극이라고 해버리면, 어떤 반증도 불가능해져 버려. 이런것을 공허하면서 치사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 통 속의 뇌 주장은 반증가능성이 이론적으로도 열려있지가 않아. 동시에 공허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지. 왜냐면, 내가 통속의 뇌던 아니던 간에 내가 지금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네.
나: 네, 그런데 그게 왜요?
노인: 공허한 주장이나, 치사한 주장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네. 실질적으로 어떤 행동을 요구하지도 않아. 하지만 독단적 주장에는 어떤 윤리적 가치를 주장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어. 어떤 요구가 포함될 수도 있지. 어쩌면 자기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있을걸세.
나: 음... 뭐 길에 쓰레기를 버려선 안된다, 이런 주장들 말씀하시는거겠죠?
노인: 그렇다네. 거기엔 사실 어떠한 의미도 없어. 어떠한 사실도 전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지. 하지만 거기엔 가치가 있다네. 실제로 그 말에 따라 사람들은 행동을 바꾸고, 어딘가에 동참할 수도 있을거야.
나: 그러면, 제가 과학연구실은 과학적 지식이 많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말 한 것에도 가치가 있지 않나요?
노인: 그래 가치가 있을 수 있지. 그런데, 독단적주장의 가치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생긴다네.
나: 이건 또 어떤 얘기신거죠?
노인: 유클리드 기하학을 알고 있지?
나: 이젠 또 유클리드 기하학까지 가시는군요. 하하.... 당연히 알죠.
노인: 유클리드 기하학을 참된 것으로 생각 하고 있나?
나: 뭐 기본적으로는 그렇지만, 현대수학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지 않는 공간을 더 많이 연구하고 그렇잖아요?
노인: 그렇지. 그런데 왜, 현대 기하학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진리로 생각하고 있었겠나?
나: 뭐.... 사고가 아직 발달하지 못해서요?
노인: 하하하!!! (한참을 웃었다.) 자네가 유클리드보다 사고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나?
나: 물론 제가 그때 태어났으면 유클리드처럼 기하학을 발전시키진 못했을 수 있죠. 하지만 지금 발달된 수학들을 알고 있으니 어떤 면에선 그렇지 않을까요? 사고의 폭이 넓다고는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노인: 사고의 폭이라... 뭐랄까, 모호한 표현같구먼. 유클리드가 평생 했던 사고의 폭을 자네와 비교했을 때, 자네가 더 넓다고 자신할 수 있나?
나: 참 자꾸 할 말을 없게 만드시는군요.
노인: 자네와 유클리드는 공리가 다른거라 볼 수 있을걸세. 보통 기하학에서 삼각형 세 각의 합을 가지고 이야기하기도 하지. 유클리드는 하나만 택해서 그안에서 끝까지 사고를 밀어붙인걸세. 선택지를 몇가지 더 둔다고 해서 사고의 폭이 넓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그보다는 서로 다른 공리를 채택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지. 자네는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도가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고. 유클리드에게 현대기하학의 근본적인 사고를 이야기한다면, 받아들이지 않고 나름대로 그에 반대되는 이야기들이 나올 걸세.
나: 네 그래요. 그런데 유클리드 기하학은 왜 얘기하신거에요?
노인: 공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지. 결국은 독단적 주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네. 자 그러면 독단적 주장이 가치를 갖는 범위를 다시 이야기해보지. 독단적 주장은 그 주장이 전제하는 공리를 공유하는 사람들 간에는 가치를 갖게 된다네. 심지어 그 공리 안에서는 진리가 될 수도 있지. 유클리드기하학은 유클리드가 설정한 공리 안에서는 확연한 진리였다네. 물론 유클리드기하학에서 제시되는 명제들의 성격이 독단적 주장과 같다는 것은 아니야, 단지 공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였다고 이해해주게.
나: 뭐가 다른지 물어보고 싶긴 한데 일단은 더 중요한 얘기부터 나눠볼까요. 그러면, 공리를 공유하는 사람들사이에서는 어떤 주장도 진리가 될 수 있다는거에요?
노인: 그렇지. 심하게 말하면, 사이비종교에서 서로 나누는 이야기들도 가치를 갖는다네. 그들 사이에서는.
나: 그러면 그냥 공리를 공유하는 사람 사이에서만 이야기를 나누면 그만이란 건가요?
노인: 지금 하는 주장 자체가 독단적 주장을 질문의 형식으로 나에게 제시한거라네. 그리고, 하나의 공리로서 제시되는 것이기도 하지. 만일 내게 자네가 말한 내용을 공리로서 동의 하느냐 묻는다면, 동의한다네.
나: 그러면 폐쇄적으로 같은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대화를 나누고 살면 된다는 건가요?
노인: 방금 내가 동의한 공리에 입각해도, 자네가 지금 물어보는 것까지 동의할 이유는 없네. 나는 어떤 공리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찾아서 만나는것도 좋다고 생각하거든. 여기서 잠시 정리를 좀 해보는게 어떻겠나? 일단 독단적 주장이란 것이 무엇인지 다시 얘기해보겠네. 어떤 사실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당위에 대한 내용을 담는 주장들을 이야기한다고 했지. 유클리드 기하학과는 다른걸세.
나: 유클리드 기하학은 사실에 대한 서술이다, 이거죠?
노인: 그렇다네. 사실에대한 서술이라 해도, 결국 공리에 입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야. 공리가 공유될 때에만 제대로 이야기 나눌 수 있지. 꼭 독단적 주장이 아니어도 공리가 동의되지 않는 사람끼리는 관련된 주제에 대해 대화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네. 그럴 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 사실에 관한 명제를 얘기 나눌 때에는 그만 얘기해도 될걸세. 당위에 관한 내용일 경우엔 적당한 힘싸움으로 합의점을 찾는게 고작일거야.
나: 하지만 더 나은 공리가 있잖아요? 현대기하학의 공리가 유클리드기하학보다 더 폭넓고 좋은 것 아닌가요?
노인: 유클리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 자네는 어떤 절대적인 더 좋다는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절대성은 같은 공리 안에서만 성립한다네.
나: 음.... 그런데 누가 봐도 동의 가능한 공리들이 있지 않을까요?
노인: 그것을 사유하는게, 근대철학자들이 노력해온 일이겠지. 그에 관해 얘기하기전에 저녁이나 먼저 먹는게 어떤가? 오늘 사온 고등어가 지금 자네를 기다리고있다네. 소금간은 내가 해뒀으니, 저기 불좀 피워보게나.
절대성, 공리, 사유. 그 모든 것도 밥 때의 고등어보다 중요하진 못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