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나야
1. 나는 생성형 AI를 쓰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다. 나는 생성형 AI를 사용하지 않는다.
요즘 같이 그림을 못 그려도 원하는 그림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고, 글을 못 써도 AI에게 부탁만 하면 원하는 글을 볼 수 있는 시기에. 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강사와 교수들도 챗 GPT를 활용하는 시기에 말이다.
남들이 다 과제할 때 챗지피티 돌리고, 번역기 대신 생성형 AI를 사용하고, 참고 자료로 미드저니나 AI가 만든 그림을 집어넣고, 모르는 게 있으면 챗지피티에 물어보고, AI가 써준 초안으로 기획서든 소설이든 쓰고 있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다.
연극 대본을 쓸 때도, 과제를 할 때도, 영어 논설문을 작성할 때도, 소설을 쓸 때도. 나는 막히면 내 머리를 쥐어 뜯을지언정 인공지능에게 도와달라 요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우선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이 생각을 기계에 위탁한다는 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AI를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도 이 고집은 여전하다.
작가로서 작품을 설정하고, 스토리 뼈대를 구축하고, 시놉시스를 짤 때도 AI의 도움은 일절 받지 않는다. 창작은 인간의 영역이다. 이것을 기계에게 부탁하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을까. 창조적 상상력은 인간이 가진 무기이자 능력이며, 그것을 발휘하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욕망이다. 나는 그 인간다움을 기계에게 양도하고 싶지 않았다.
'정보'의 영역이라면 모를까, '창작'의 영역은 기계가 접근해서도 안 되고, 접근할 수도 없는 배타적인 영역이다. 정보와 계산은 기계의 땅일지 모르겠으나, 창작과 사유는 인간의 땅이다. 데이터와 이야기, 그리고 정보와 창작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두 가지가 모두 온라인 공간에 올라와 있다 해도 같은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다.
AI의 재앙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에서 시작된다.
2. 저작물은 정보가 아니다.
AI는 정보를 학습하는 도구다. 문제는, AI가 스스로 인터넷 공간 상의 정보와 저작물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AI는 모든 것을 '정보화'한다. 예컨대 AI는 이전에 다른 사람이 창작하여 게시해 둔 소설도 네이버 지식인의 정보성 답변과 동일하게 판단하고 학습한다. 그러나 창작물은 정보와 달리 저작자의 인고 끝에 '탄생'하는 것이다. 그 '탄생'의 순간을 위해 작가는 수천, 수만 시간을 들여 노력하고 고민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더 탄탄한 인체, 더욱 생동감 있는 묘사를 위해 수없이 노력한다. 자기에게 맞는 그림체와 채색법을 찾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땀흘려 작품을 완성한다.
글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본인에게 잘 맞는 장르를 찾고, 필체를 다듬고, 문장력을 기르기 위해 매일 쓰고, 또 쓴다.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전달할 수 있을 때까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비단 글이나 그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곡도 마찬가지고 영상물도 마찬가지다. 실력을 쌓아 좋은 작업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 공을 들인다. 우리는 여기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안다. 알기에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창작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보장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창작물과 창작을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무너지게 되었다. 생성형 AI는 '학습'을 필요로 한다. 학습의 재료는 다른 사람의 저작물이다. 이때 저작물은 창작의 결과, 창작품으로서 작용하는 대신 정보로 치환된다. 가령 AI가 누군가의 작품을 학습하게 되면, 그 작가가 노력한 흔적들 -문체, 서사, 그림체, 표현 기법-은 모두 정보가 된다. AI는 그것이 작품인지 아닌지 인지하지 못한다. 그림은 단순한 이미지 정보로, 글은 단순한 텍스트 정보로 입력된다. 그래서 마구 가공하고, 변형하고, 짜깁기하고, 혹은 그대로 붙여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AI는 계란 후라이 레시피(정보)와 매일 아침 계란 후라이 해 먹는 자취생의 이야기 (창작물) 속 텍스트를 동일하게 정보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AI를 학습시키는 사람들은 작품을 바라볼 때 그 이면에 있는 창작자의 노력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유용한 정보와 데이터 정도로 치부한다. 그렇기에 21세기에도 손으로 한 장면 한 장면 그려내는 애니메이터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을, 지브리풍 AI 그림으로 일축시키겠다는 발상이 가능한 것이다. AI의 사용이 만연해지면 사람들의 저작권 의식 역시 흐려질 것이다.
일러스트레이터가 이렇게 그림을 그려낼 수 있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문필가가 이런 소설을 써내려가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이해한다면 감히 AI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훔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우리도 누군가에게서 혹은 기존의 창작물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창작을 시작한다. 하지만 AI와 인간이 다른 점은, '자기화'의 유무에 있다. 비록 처음은 모방과 동경에서 시작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에서 창조가 시작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통으로 모방할 순 없다. 그건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인간은 스스로와 맞지 않는 것을 할 때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고통 속에서 결국 인간은 자기 안에 잠재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새롭게 시도한다.
반면 AI는 스스로 시도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표현 기법을 고뇌하고 연출 방식을 고민하지 않는다. AI는 인터넷에 떠도는 모든 것을 정보로서 습득하고 필요할 때 출력한다.
만약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챗GPT를 사용하는 순간, 이미 그 안에는 누군가가 사용했던 플롯, 문장, 설정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을 의심 없이 가져다 쓴다는 건 스스로 본인의 작품을 '모방작'으로 한계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림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원작자가 있어야만 AI는 그림을 학습할 수 있다. 생성형 AI로 그림을 만들겠다는 것은, 타인의 그림을 그대로 도용하겠다는 일종의 의사표시나 다름없다.
3. AI가 과연 인간보다 훌륭한 이야기꾼일까
이야기는 계산이 아니다. 이야기라는 건 순식간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야기의 본질이다. 이야기는 반드시 시간의 흐름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겪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 꽃이 지고 눈이 오고 얼음이 녹고 다시 꽃이 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은 존재한다. 만남과 이별을 겪고, 생과 사의 사이를 걸어간다. AI는 새 인연을 기다리는 설렘을, 지나간 인연에 대한 그리움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시간을 겪는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런 AI가 과연 인간보다 좋은 이야기꾼이 될 수 있을까?
그럴듯한 전개, 그럴듯한 플롯, 그럴듯한 문장을 제시할 순 있겠지만 거기엔 고찰이 없다. 그런 글은 결국 인간에게 울림을 주는 이야기가 되기엔 부족하다.
스스로의 가능성과 창의력을 불신하고 기계의 정보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힘들더라도 오롯이 자력으로 작품을 만들어낼 것인가? 우리 인간에게는 인공 지능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인간 지능이 있다.
AI에 의존하는 대신, 나 자신을 믿어보는 것은 어떨까.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깊은 열망이 있다. 그 열망의 씨앗을 꺼내 스스로 꽃피우도록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