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고 하면 할수록 절필하고 싶어진다
작가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글이라는 것은 '전달'을 위해 탄생한 도구다. 기록은 본질적으로 전승과 전달, 소통을 위한 것이다. 글은 메세지다. 메세지에는 수신인이 존재한다. 불명확할지언정 글에는 '대상'이 있다. 대상은 다시말해 독자다.
글이라는 것은 독자들이 모르는 또 하나의 세계를 전도하는 매개다. 그런 의미에서 글은 본질적으로 계몽의 성질을 띤다. 또한 내가 옳다는 믿음,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작가에게는 자기 확신이 필수적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옳다고 믿어야만 누군가에게 전파할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이는, 그만큼 본인부터 해박해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앎을 좇으면 좇을수록 세상은 무궁무진하게 넓고 천재는 많으며 내가 아직 모르는 영역이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아는 이는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기만의 세계에서 뛰쳐나오는 순간, 작가로서 기능할 수 없어진다. '내가 안다'는 독선이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인데 세계의 앞에서 나라는 존재의 무능과 무지와 무력을 깨닫는 순간 겸손해지므로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덴마크의 심리학 교수인 스벤 브링크만 역시 그의 저서 [불안 해방]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본질적으로 확실성은 독선적이다. 반면에 의심에는 중요한 윤리적 가치가 있다. 생각해 보라. '나는 안다'는 확신 뒤에는 맹목성이 뒤따르기 쉽다. (...) 내가 안다면, 나는 다른 사람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가 의심한다면, 다른 사람의 관점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현대 사회는 '일단 하라'고 강제한다. 나이키의 just do it은 현대사회의 '무궁히 발전하는 나'라는 자아상과도 맞닿아있다.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돌아볼 틈도, 쉴 틈도 없이 그저 인생에서 가능한 많은 '프로젝트'를 달성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덴마크 철학자 포그 옌센은 '프로젝트'사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이 성장하며 변곡점을 맞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누구든 하루아침에 자신을 둘러싼 알을 깨고 나올 수는 없다.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웹소설 한 편을 출간하고 또 한 편을 계약했다. 한 편은 계약 논의 중에 있으며 (내가 아직 수락하지 않았다.) 구상 중인 소설만 또 두 편이 있다. 연말에 있을 공모전에 대비해 장편소설도 하나 집필중이다. 다작 작가가 되는 것이 목표였고, 여전히 목표하는 바가 맞긴 하지만, 자꾸 집필에 제동이 걸린다. 시대에 경종을 울릴 만한 글을, 재밌게 풀어 보자는 나의 작품관이 무너질 것만 같아서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그런 글은 아직 제대로 해낸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단단한 오산이었다. 이미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이러한 문제 의식을 오락적인 포맷에 녹여 좋은 글로 풀어내고 있는 작가들이 무수히 많았던 것이다.
나만의 우물 안에 갇혀 있던 것이 부끄러워졌고, 동시에 내가 그들을 뛰어넘어 더 좋은 글을 쓸 역량이 될지 의심스러웠다.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 같은 범인이 글은 무슨 글이냐. 접어야지. 이런 생각이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내가 좋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배우려고 하면 할수록, 그 배움에는 끝이 없으며 난 평생 완벽하게 이상적인 글을 써낼 수 없을 것이라고 느꼈다. 얄팍한 글이 되지 않도록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다작을 하지 않으면, 차기작을 빠르게 내지 않으면 나의 '가치'가 떨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런 불안감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성장 시대의 강요'가 아니던가. 내가 이 자리에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을, 내 삶의 프로젝트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어딘가에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는 두려움. 미신과도 같은 공포. 그런 것들에 잠식되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가 이러한 감각, 그러니까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감각'에 집착하는 이유는, 고립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상호부조 속에 살아가던 종족인 우리 인간은, 이렇게 타인에게 무심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인생만 보며 고립되어 살아가는 아파트 속 햄스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케이지에 갇힌 인간들이 자기 효능감을 느끼는 순간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케이지에 몰아 넣은 체제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뿐이다. 인정은 가치를 창출하여야만, 생산해야만 받을 수 있다. 체제에서 주어지는 '인정'은 먼 옛날 공동체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친밀감을 나누고 내가 이 공동체에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감각을 모방하지만, 결코 대체할 수 없다. 그것은 같은 종류의 인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어떻게 해도 충족될 수 없는 고독 속 심리적 허기와 공허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프로젝트'에, 사회의 '인정'에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실험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