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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 괴물 대소동

서울 한복판에 액체 괴물이 나타났다?

by 윤슬

0.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던 내가, 지금은 키보드로 괴물 몸뚱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평범한 회사원에서 괴물 잡는 히어로(비슷한 것)로 전직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대충 계산해도 로또 맞을 확률보다 낮거나 그에 버금갔다. 나는 쓸데없는 계산을 멈추고 눈앞의 검고 말랑한 몸체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제대로 피격당한 녀석은 괴랄한 소리를 내며 순두부처럼 터졌다. 하얀 사무실 바닥 위로 검은 형체가 후두둑, 흩어졌다.


"연화 님, 청소기요."

"아, 여기요."


내가 손을 까닥이며 청소기를 가져다달라 말하자, 연화가 사무실 구석에 놓여 있던 진공청소기를 끌고 왔다. 못 쓰게 됐구만, 이거. 나는 연화가 끌고 온 진공청소기를 한 손에 잡으며 혀를 찼다. 곧 박살 난 점액질의 검은 얼룩이 코하쿠토처럼 반짝이는 결정체로 변했다. 나는 잽싸게 청소기의 전원을 켜고 그것들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결정들이 청소기 목구녕으로 꾸역꾸역 넘어갔다. 청소기 몸체의 LCD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Excellent! ><]


꼴에 먹여 준 밥이 맛있었는지, 기계 주제에 웃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실소를 한 번 터뜨리고는 무전을 연결했다.


"태성 IT 타워 12층, D구역. 완료했습니다."

-수고했어요, 곧 올라가겠습니다.

"네."


무전기 너머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건조한 말투였다. 대화할 때마다 AI와 말하는 것 같아서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요즘 AI 스피커도 이보다 친절하지 싶다. 나는 괜히 오싹해져서 어깨를 한 번 떨었다.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게 등 뒤가 싸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렸다.


"현장 상태는 좀 어때요?"

"아, 동장님."


곧 올라오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동장님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동장님은 나와 연화 옆으로 다가와 엉망이 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의자고 화분이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데도 크게 이상 없다 판단했는지 그가 이번엔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형체가 흩어져 있던 자리에 이제 거대한 액체 괴물 대신 웬 남자가 누워 있었다.


"완전히 못 쓰게 됐구만, 이거."


나와 똑같은 감상을 늘어놓은 동장님이 손에 들고 있던 직원 명단을 넘겼다. 그러고는 발끝으로 엎어져 있는 남자를 툭툭 쳐서 그 몸을 뒤집었다.


"콘텐츠 기획팀 강영준 부장."


동장님은 들고 있던 명단과 누워 있는 남자를 대조하며 그렇게 말했다. 눈을 까뒤집고 있어 흉측하긴 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분명 술에 취해 떡이 된 강부장님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술과 야근을 좋아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가 버렸다. 나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드러누운 그 몸을 보다가 짧게 묵념했다. 옆에서 멀뚱한 얼굴로 나와 부장님을 번갈아 보던 연화가 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왜들 이래요? 그냥 기절만 한 건데."

"쉿, 애도 중입니다."


동장님은 그런 나를 못 말린다는 듯 쳐다보았다. 삼각 고인돌에 면봉을 비빕니다. 내가 대충 중얼거린 뒤 고개를 들었다. 동장님이 구둣발로 강부장님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거, 직원 휴게실로 옮길 수 있겠어요?"

"시도......조차 못 하겠는데요."


불룩 튀어나온 강부장님의 배를 보며 답했다. 아무리 내가 운동이 취미라곤 해도 저 정도의 중량은 무리지 싶었다. 동장님이 연화에게 턱짓하자, 연화도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뭐, 알아서 일어나겠죠. 그럼 그냥 여기 두고. 동장님은 예의 그 무미건조한 말투로 넘겼다. 저 차가운 태도에 아군이라 다행이다, 하는 안도감이 절로 들었다. 저러면서 어떻게 괴물이 안 되고 버텼지. 나는 인간성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오늘까지 누적 포인트는 얼마죠?"

"3,700 포인트입니다."


동장님의 질문에 전기 충격기처럼 생긴 디바이스를 확인한 연화가 답했다. 생각보다 많이 못 모았는데. 동장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래서 1만 포인트 모을 수 있겠어요? 그 물음에 한숨밖에 안 나왔다. 사원들 쥐꼬리만 한 월급에 포괄임금제인 거 알면서도 야근 강요하는 꼰대 부장이 고작 400 포인트라니. 갈 길이 구만리였다.


"됐으니까 둘 다 오늘은 이만 쉬어요. 괜히 더 무리시켰다가 나까지 괴물 될라."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다 우리 히어로들이 하는 일에 숟가락만 얹는 건데."


동장님은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나와 연화는 멀어져 가는 동장님의 뒷모습에 대고 인사를 남겼다. 히어로. 벌써 그 오글거리는 명칭으로 불린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이쯤 되면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너무 허무맹랑한 일이라 그런지 도무지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연화의 손에 들린 디바이스를 바라보았다. 포인트를 다 모으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1.

도시에 갑자기 괴물이 출현하기 시작한 건 딱 한 달 전 즈음이었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천근만근인 몸을 겨우 일으켜 출근 준비를 했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터덜터덜 지옥철에 올라탔다. 그렇게 이동형 지옥에 실려 월급 노예의 하루가 시작되는 회사에 도착한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건물 안은 그야말로 혼비백산이 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다들 좀비처럼 앉아 피 대신 카페인을 수혈하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데,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었다. 인간들은 비명을 지르며 돌아다녔고, 사무실을 점령하고 있는 건 임원들이 아니라 검고 둥그런 괴물들이었다. 대관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불가능했다.


차마 내 자리로 갈 생각도 못 하고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구로동 행정복지센터 동장이었다. 그는 민원 받고 왔다는 말과 함께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동장이 대뜸 나에게 이름을 물었다.


"성함이...... 한리나 씨 맞으시죠?"

"예, 그런데요."

"지금 상황에 대해서 알고 계신 바는 없으신가요?"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잘......"


저승사자처럼 올블랙으로 무장한 동장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잠시 따라와 달라고 말했다. 그 포스에 짓눌려 찍소리도 못하고 얌전히 뒤를 따라갔다. 동장은 나를 데리고 사무실 옆에 딸린 회의실로 향했다. 거기엔 나처럼 연행당한 여자가 한 명 앉아있었다. 시스템 관리 부서 신입, 연화였다.


나는 먼저 와서 앉아있던 연화에게 떨떠름한 얼굴로 눈인사를 건네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구로동 행정복지센터 동장이라던 사람은 우리 둘을 데리고 갑작스러운 브리핑을 시작했다.


"두 분, 오늘 반응을 보아하니 처음 목격하신 것 같네요. 사실 며칠 전부터 도시에 괴물들이 나타난다는 민원과 신고가 접수되고 있었습니다. 저희 구로동 행복센터에서 관할 경찰서와 협력해 이번 사태에 대해 조사한 결과, 아직까지 비슷한 현상은 구로구 디지털 밸리 내에서만 일어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니, 이런 내용은 뉴스에서 다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동장을 쳐다보았다. 동장은 특유의 높낮이 없는 딱딱한 어투로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내 표정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께만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동장이 나와 연화에게 서류철에서 종이를 뽑아 한 장씩 배부해 주며 말을 이었다. 종이에는 큼직한 글씨로 '협약서'라고 쓰여 있었다.


"괴물 퇴치를 부탁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네?"


집 나간 정신을 따라 어이가 가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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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공동체, 탈성장, 탈자본주의, 자연식, 자급자족 기후위기 시대에서 근대성을 넘어서기 위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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