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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30. 202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살하는 대한민국, 위기 이후의 경제철학을 읽고

제가 일 중독이라고요?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몰랐는데, 내가 상당히 일 중독적인 사람이라는 거다. 최근 갑자기 일이 몰아쳐서 들어왔다. 게임 시나리오 외주부터 원고 교정 교열 외주, 웹소설 교정 교열 편집 부서 합격 등. 일이 많아서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행복했다. 전부 내가 하고 싶어 했던 분야와 관련된 일이어서 기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이 많아진다는 것은 수입도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렇게 많은 일들을 하려고 들면서도 나는 커다란 금전적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쁨 자체가 워낙 컸고, 취업 준비생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무도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 마음이 나를 일 중독 기믹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나는 잠시라도 시간이 비거나 일이 없으면 평생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봐 유독 불안했다. 무엇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했다. 다시 말해 중독의 원천은 불안이다. 일에 중독되는 사람들은 쓸모와 인정에 대한 불안을 떨치기 위해 일을 찾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쓸모와 가치, 능력을 보여줄 방법이 오로지 경제 생활밖에 없다. 나라는 인간이 쓰이기 위해서는 돈벌이를 제공하는 곳에 들어가 일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취업난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님을 증명하듯, 직원이 열명에서 스무명 남짓 되는 회사 공고도 100:1의 경쟁률을 자랑한다. 내가 아무리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다고 한들, 회사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짱 꽝이다. 


거절 당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집 밖으로 나가 나라는 사람의 가능성을 펼쳐 보일 기회가 박탈당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무기력해진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능력을 의심하게 되고, '나는 무능충이야'같은 자기 비하에 시달리게 된다. '아무도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과 '내가 정말로 가치 있는 사람이 맞긴 한가'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의 쓸모가 곧 사회의 경제적 가치 창출에만 국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취업의 여부가 한 사람의 영혼을 지지하거나 혹은 무너뜨린다. 비록 우리가 먹고 사는 일을 전부 돈주고 거래해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는 해도, 인간은 물리적 기본 욕구 충족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즉, '일'이라는 것은 '돈'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는 거다. 이 사실은 새롭게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에서 돈을 위해 일해온 건 아주 찰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한 번 생각해보자. 인류 역사에서 돈 없이도 살아 왔던 세월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돈이 일상의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 지금으로서는 놀라운 일이지만, 인간은 돈 없이도 살 수 있다. 


돈보다 우리 역사에서 더 오랜 시간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관계'이다. 인간의 '종특'은 혼자서는 못 산다는 것이다. 인류는 관계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도록 디자인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돈보다도 필요했던 건 관계였다. 나를 지켜줄 사람, 내가 지켜줄 사람, 힘들 때 서로 돌봐줄 사람.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가까이 지내왔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도움을 주고 받으며 언제든 자신의 쓸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내가 쓸모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감각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 기여할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우리는 상호작용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이유를 깨닫고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개인이 흩어지고 고립되어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어디 진실된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그마저도 사회가 나에게 나설 기회를 주지 않으면 히키코모리로 전락하는 건 순식간이다. 심지어 아무리 회사에 다니고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게 나의 숨통을 트게 해준다는 보장마저 없는 상황이다. 마음이 편해지는 따뜻한 기업 문화를 겪어본 사람보다 삭막하고 숨막히고 꼴도 보기 싫으며 연락도 받고 싶지 않은 새끼들이 회사에 더 많다는 걸 겪어본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이로써 우리는 사람이 사실 "돈"으로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먹고 사는 존재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성애적 사랑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고, 함께 하면 마음이 좋아지는 사람들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내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에 대한 주변의 인정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매 순간, 사랑을 주고 받고 확인하며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아무리 먹고 입고 자는 일을 모두 해결해도 이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사람은 공허한 빈 껍데기에 불구하다. 그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연명과 삶은 엄연히 다르다. 


일에 중독되는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사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일이 없는 상태가 공허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더는 내게 "내 존재의 가능성을 펼쳐 보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삶의 주도권을 자본에게 몽땅 넘겨주고 수동적인 인생을 선택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꽃들이 어디 자기 존재의 이유를 다하는 데에 남의 허락을 받는가? 꽃이 허락받고 피어나지 않으며 씨앗이 허락받고 뿌리를 내리지 않듯이 인간도 보람을 느끼는 일을 하기 위해 자격을 허락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격보다 법인격, 사람보다 자본이 우선인 시대에선 하극상이 벌어진다. 제발 기회를 주십사하고 여기저기 빌어야 하는 꼴이 됐다. 그렇게 빌빌 기어서 간신히 얻어냈으니, 잃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인구 수가 무지막지하게 늘어난 것에 대해 걱정하는 비관론도 많지만, (물론 나도 국가 소멸이니 어쩌니 하며 무식하게 단위 면적 당 개체 수를 늘리는 것에 급급한 데에는 비판적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에게 큰 걸림돌이 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사람이 늘어난 것은 더 많이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함이다. 전 세계 인구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소통하게 된 것 역시도 더 많은 것을 보고 사랑하고 수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내가 만든 작품이 한 사람에게라도 제대로 와닿으면 물론 행복하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열광해준다면 어째서 기쁘지 않겠는가. 지역에서 만든 문화 컨텐츠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해외에서 만든 컨텐츠까지 시야를 확장하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컨텐츠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자원 분배의 문제 역시도 그렇다. 자연과 경쟁하지 않고 협동하면, 자연은 반드시 우리에게 보답해준다. 지구를 치유하고 보살펴주며 대지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랑꾼들이 늘어나면 자연은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제대로 자리잡은 자연농이 관행농보다 더 많은 생산량을 올릴 뿐더러 생산물의 맛과 영양까지 가득하다는 자료는 조금만 찾아봐도 나온다. 꼭 사람간의 소통만이 답이 아니다. 자연과의 소통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힘을 펼쳐보일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영혼이 단단해짐을 느끼게 된다. 




주객전도 사회 

물리적인 생존 조건의 충족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생존 조건의 충족이 곧 사랑임을 짚어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물리적 생존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의 신체를 지지해주고, 생존을 가능케 해주는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일까? 


이건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정답은 의,식,주다. 그 중에서도 먹거리다. 더운 곳에서야 안 입고도 살 수 있지만 안 먹고는 어디에서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먹어야 산다. 모든 유기체는 먹고 먹히는 존재로 태어났다. 인간은 이기적이게도 먹기는 오지게 먹으면서 먹히기는 죽도록 싫어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간에 이 먹거리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1차 산업이다. 1차 산업을 수행하는 농어촌 지방이 결국 모든 인류를 지탱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존 욕구 피라미드 상으로도 식욕이 우선 충족 되어야 그 다음 일을 할 기력과 의지가 생긴다는 걸 설명할 수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기후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것도 이 먹거리의 수급이 점차 불가능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위협받는데 안전하다고 느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류는 지금까지 먹기 위해 일하고 먹기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렵채집의 시대부터 농경사회까지 모든 일의 중심에는 먹거리가 있었다. 여기에서 벗어난 건 현대 사회가 예외적이다. 진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를 축하하지만, 나는 별로 축하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먹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니 사람들이 점점 고마운 줄 모르고 소중한 줄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점점 소멸해가는 시골이 점점 팽창하는 도시를 먹여 살리려니 땅에서 먹을 것을 착취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사람들은 땅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매 년 먹을 것을 내어주는 대지의 인심에 경의를 표하는 대신 밥을 내놓으라며 지구를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마치 노인네가 되면 밥통 뚜껑하나 못 열면서 일 하고 돌아와 밥 내놓으라 명령하는 누구들처럼 말이다. 사실 이 둘의 정신 기제는 다르지 않은 곳에서 출발하긴 했다. 


각설하고, 우리는 대지가 먹을 것을 내어 주지 않으면 아무리 끝내주는 대저택과 요트와 수백억 단위 재산의 소유자여도 꼼짝 없이 굶어야 한다. 워낙 쌓아 놓은 게 많으면 한참은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혼자 버텨내면서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는 것도 잔인한 형벌이다. 


그런데 이런 먹거리를 생산해내고 서비스하는 일이 한국에서는 무엇보다 천시받는다. 그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배가 항상 든든히 차 있으니 먹거리에 대한 고마움을 모른다. 밥이야 뭐 돈만 있으면 당연히 먹을 수 있는 거고. 더 중요한 게 있다며 사람들은 차갑게 등을 돌린다. 그러고선 가상의 숫자들을 만지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누누이 말하듯, 밥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고 그 외 나머지는 생존에 부수적인 요소다. 예컨대 월가에서 수 조 단위의 돈을 굴리는 일이 따지고 보면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 일 안하고도 인류는 잘만 살 수 있고, 실제로도 잘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부차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일들이 어째선지 지식 산업이라며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분류되고, 몸을 쓰는 일은 저열하고 저급하고 저차원적인 노동으로 인식된다. 사람들이 하도 컴퓨터를 만져대다 보니 자기 자신을 공중에 떠있는 뇌나 계산기 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인간은 엄연히 몸을 가진 생명체다. 몸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나의 뼈와 살을 유지해주는 산업이 정작 소멸위기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가려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갈 지경이다. 


자살하는 대한민국의 저자 역시도 이 부분을 짚어낸다. 고도 급속 성장의 부작용으로 대가리만 크고 팔다리는 비실비실해졌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해결책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팔다리가 부실한 것이 우리 농민들이 주로 영세하기 때문이며 기업농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업농을 해야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데, 이는 영세 농민의 손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식품 기업과 종자 기업의 손을 들어주는 해결책이 되기 때문이다. 


농업을 캐나다나 미국처럼 너른 들판에 작물 하나 쫘악 심어놓고 헬기로 비료를 뿌려서 해결하자는 뜻인가? 한국은 땅덩어리가 좁아 애초에 그런 농업이 적합하지 않거니와 미국, 호주, 캐나다의 농장이 어떻게 농작물을 "경영"하는지 보고나면 아무도 수입산을 먹고 싶어 하지 않을텐데도 말이다. 농업이 작고 영세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안전하고 다양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다. 수입산보다 국산이 가격 측면에서 매력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염병할 보조금 때문이다. 1차 산업을 기업화 하거나, 완전히 외주를 돌려버릴 게 아니라 모든 것을 기업화하는 현 시대를 해체해야 하는 게 맞는 거다. 삶이 기업화 되면, 우리의 존재 이유마저 '거래'가 된다. 



우리가 사는 진짜 이유 

나는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그 "진짜"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회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통장 잔고의 0을 씹어 먹으며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고, 자본의 노예나 부품으로 팔리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다. 우리의 쓸모가 단지 화폐 창출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을 혼자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이렇게 납작하게 일축시켜버리고 불필요한 것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진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돈이 아니라 손으로 해결할 수 있고, 거래가 아니라 관계로 도움받을 수 있으며, 많이 사랑받고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능력자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비로소 행복으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기도 하다. 


오늘도 돈이 되지 않을 글만 잔뜩 쓰는 나지만, 이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가 사는 진짜 목적과 이유는 따로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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