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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Nov 13. 2024

에코와 오타쿠

디지털과 온라인 콘텐츠는 증상인가 산물인가

나는 오타쿠다.

아이돌에 살고 아이돌에 죽는 빠순이면서, 캐릭터에 살고 캐릭터에 죽는 유구한 역사의 OTK다. 특히 그중에서도 요즘 한국에서도 급부상하고 있는 서브컬처 게임을 좋아한다.


1차 여성향(BL) 상업지로 시작해서 동인지(2차 창작), 애니메이션을 거쳐 오타쿠 게임에 미쳐 살았다. 어릴 때부터 눈이 우주에 달려 있었던 나는 현실에 없는 초미남 알파메일 캐릭터의 등장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원래도 게임 자체를 좋아했는데 게임 속에서 이상형을 만나기까지 해 버렸다. 그 길로 나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졌다.


생태적인 삶에 눈 뜨기 전까지 그렇게 덕업일치를 꿈꿨다.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여겨지는 게임계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게 싫었고, 인권투사적 성향이 있었던 나는 여성친화적 게임 기업을 만들어 성공하고 싶었다. 게임 벤처를 목표로 창업 강의도 찾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꿈이 여성 인권 회복이나 인간다운 삶과 거리가 멀다는 걸 느끼고 접었지만.


문명과 기술의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집어 삼키고 있다는 걸 알게된 이후, 나는 네오-러다이트가 됐다. 반(反)문명 반기술 반자본을 외쳤다. 내가 보는 현대 사회란 그저 자연을 인간과 분리된 것으로 보고, 자연을 극복해 보겠다는 교만의 집합체였다. 그린 어쩌고나 에코 어쩌고, 기후테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지속 가능한 지구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이윤이었다. 대기업 ESG팀은 사실상 환경부 감사에 변명하는 팀이었고, 그린 워싱이라도 해야 착한 기업으로 위장해 지속적인 소비자층을 확보할 수 있으니 하는 거였다. 기후위기는 생존이 달린 문제다. 목숨이 걸려 있는데 "척"하면서 살고 싶진 않았다.


쓸데없는 것들을 덜어 내고 싶었다. 불필요한 노동, 생산성 강요, 성장에 대한 압박. 물론 좋아하는 것을 더 잘하고 싶은 건전한 열망은 부정하지 않는다. 나도 글을 더 잘 쓰고 싶고,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고, 더 참신한 아이디어로 재밌는 것을 만들고 싶다. 누가 나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해도 잘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게 아니라 더 많은 부를 위한 맹목적인 스펙 경쟁, 더 많은 결과물을 빠르게 생산하기 위한 자동화 공정, 분업화, 더 나아가 부품화, 첨단 기술 같은 것들을 덜고 싶었다. 그것들은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본에 봉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파격적인 무(無)의 철학에 빠지기도 했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 삶을 원했다. 무위자연이 곧 진리이니라. 먹고 사는 일이 하루 일과의 전부이자 나머지 시간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농땡이나 피우는 삶.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벤처 CEO만큼이나 철 없는 꿈을 꿨다. (그리고 꾸고 있다.) 별을 노래하고, 돌고래와 함께 헤엄치는 낭만적인 미래를 그렸다.


그런 삶을 찾아 과감하게 농촌으로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생각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무지하게 심심해 한다는 거였다.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 심심해서 우울증이 올 지경이었다. 뼛속까지 오타쿠였던 나는 생태적인 삶을 지향하게 된 이후에도 손에서 게임을 놓은 적이 거의 없었다. 해남까지 내려가서도 나는 아이돌 육성 게임을 했고, 일본에 가서도 동물의 숲을 했다. 물론 물리적인 생을 가능케 만들어 주는 의식주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으로 궁핍하면 그 또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농촌에 간다고, 시골에 간다고 정신적 궁핍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사람마다 자기를 살게 해주는 무언가가 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나를 살고 싶게 만들어 주는 건 "덕질"이었다.



콘텐츠를 만드는 삶

나는 소위 말하는 "씹덕 콘텐츠"를 향유하는 것도 좋아하고,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물론 요즘 유행하는 '헐벗은 미소녀 육고기 전시회 포르노'는 논외로 치자. 양산형 미소녀 동물원이 아니라 그림체가 예쁘면서 인간적인 수준의 캐릭터 디자인을 하고 있으며 적당히 욕망이 반영된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보면 마음이 그렇게 풍요로울 수가 없다.


그들이 만드는 서사는 미슐랭 쓰리스타 저리 가라다. 보고만 있어도 2차 창작 욕구가 불타오르는 '서사 맛집', '성격 맛집' 캐릭터들을 데리고 온갖 망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그걸 소재로 글을 쓰거나 혹은 오리지널 IP를 만들어 1차 창작을 하는 일이 말도 안되게 재밌다. 나는 BL 소재라면 환장해서 종류와 장르를 가리지 않는데, 한창 재밌는 BL 웹드라마를 보면서 "그냥 평생 이런 거나 좋아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매 분 매 초 했다. 이걸 업으로 삼는다면 스트레스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심심한 것을 견디지 못 한다는 것, 덕질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로 했다. 물론 지금도 끊임 없이 고민 중이다. 내가 이런 것들에 빠져 사는 이유가 관계의 단절, 자연으로부터의 단절, 고립, 거지같은 현실로부터의 도피 등등 때문인지. 건전하지못한 현대 사회의 생활 방식때문에 도피하듯 스트레스 분출구 삼아 가상 세계에 빠지게 된 건지 말이다.


하지만 백수 생활을 하면서 크게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고, 그렇게 원하던 바다와 자연이 눈앞에 있었는데도 게임과 덕질을 했었다. 게다가 창작이 오히려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도 있었다. 무언가를 지어내는 작업은 체력소모가 상당했다. 고작 취미로 하면서도 잘하고 싶어서 머리를 쥐어 뜯었고, 재능이 있는 게 맞는지 괴로워하며 유명한 사람들의 글을 분석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않을 정도면 그냥 좋은 것 같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냥 이 분야가 좋은 거다. 만약 반농반X의 라이프를 실현하게 되더라도 인디 개발을 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게임 기획 학원에 등록해 게임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원비를 내기 위해 적당한 곳에 취직했고, 지금 직장과 병행하면서까지 게임 회사로 이직하는 것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게임이 정말 하고 싶은 게 맞나. 하루 아침에 프로젝트가 망해 퇴사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인 업계 상황을 보며 회의감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웬 미친 개발자 새끼한테 잘못 걸리는 바람에 작업하고 있던 외주 프로젝트도 계약 사기를 당하기까지 했다. 국내에서 개발 중인 게임 프로젝트는 하나같이 미소녀 동물원 1, 2, 3... 이었다. 여성 인권 퇴보에 숟가락을 얹는 기분이라 뭔가 석연찮았다. 남성이 여성을 인격체로 보는 게 아니라 성인 용품 정도로 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사회에 올바른 방식으로 기여해 밥값을 해야 할 텐데, 유해 매체 만드는 일에 생체 에너지를 써가면서 밥만 축내는 게 맞는 일인가 싶다.


게임 벤처 CEO를 꿈꾸다 생태 문제, 인권 문제에 부딪혀 결국 포기했던 그 때와 같은 딜레마를 느끼고 있다.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상상하는 것을 가장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궁극적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종합 예술은 단지 예술의 영역에만 그치지 않고 상품의 범주에 포함되며 무엇보다도 상업성과 이윤이 우선시 된다.


더 잘 팔리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더 현실감있고 생동감 넘치는 액션, 리소스, 연출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개발 장비의 성능도 고스펙을 요구하고, 플레이하는 유저들에게도 더 좋은 성능의 기기로 플레이할 것을 요구한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산업이 짝짜꿍 손 잡고 장비 교체 주기를 더 줄이는 데에만 도움이 될 뿐이다. 디지털 기기를 자주 바꾸게 만드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환경에 좋지 않다. 또한 게임 개발에는 막대한 전력 소모가 요구되고, 향상된 품질의 그래픽 카드와 컴퓨터 성능이 따라 줘야 한다. 서버를 유지하는 데에 들어가는 자원 및 전력 소모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데이터 센터는 전원을 차단할 수조차 없어 24시간 내내 돌아가야 한다.


이런 것들이 정말 필요한 일일까?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일인가? 전 세계 사람들이 24시간 온라인에 접속하기 위해 이만큼의 에너지와 자원을 소모하는 것이 과연 올바르고 타당한가? 이런 산업에 종사하며 내 에너지를 쓰고 밥을 먹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밥값인가? 나에게 밥값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밥을 먹고 얻은 에너지로, 세상을 더 살기 좋고 풍요로운 곳으로 만들어 가치있게 환원했을 때 진정한 밥값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식량을 통해 얻은 에너지를 이 세상을 파괴하는 데에 사용한다면 그건 밥값을 하는 게 아니다. 그건 식량을 축내며 지구를 약탈하는 짓이다. 이건 다른 디지털 콘텐츠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웹툰은? 웹소설은? 드라마는? 애니메이션은? 데이터와 전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게임은 나처럼 무언가를 만들고 덕질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실현하는 창작 활동이기도 하다. 게임뿐만 아니라 다른 디지털 콘텐츠도 그렇다. 모든 콘텐츠는 인간의 본능적 창조 욕구, 자기 실현에서 시작되었다. 공책에 쓴 소설도, 종이에 그린 그림도, 동굴 벽에 그린 벽화도,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도 마찬가지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상상하는 능력과 표현하는 능력을 가졌다. 아마 나같은 오타쿠가 고대에 태어났다면 신화 속 신들을 가지고 덕질했을 거다. 창조하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질적 힘이다.


덕질도 콘텐츠를 만드는 일도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디지털 콘텐츠의 확산은 사람들로 더 많은 세상을 보게 해 주었고, 더 많은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다. 여기에는 분명 긍정적인 영향도 있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외산 게임을 국산 게임보다 더 많이 하고 있으며, 덕질하는 콘텐츠는 주로 일본과 중국에서 제작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 안에서 치열한 고민이 이어진다. 우리가 디지털에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은, 온라인 속 세상을 자꾸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증상일까, 아니면 인류 문화의 선물일까? 이러한 "발전"이 더 나은 삶을 위한 결과일까, 더 많은 돈을 위한 결과일까.


현대 사회에서는 더 많은 돈과 더 나은 삶이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에 어려운 질문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더 많은 돈과 더 나은 삶은 분명히 다른 층위의 이야기다. 더 많은 돈이 필연적으로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도 않으며 더 나은 삶이 필연적으로 더 많은 돈을 요하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첨단기술은 더 많은 돈을 위한 결과물이다. 더 많이 생산할 필요가 없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성과의 압박이 없다면 AI나 첨단 기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반면 도자기공이 하는 일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일이다. 도자기공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기초적인 도구를 만든다. 특유의 손길로 빚어낸 고유한 디자인은 쓰는 사람에겐 색다른 기분을, 만드는 사람에겐 보람을 선물한다. 그릇 공장과 도자기공이 하는 역할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마찬가지로 미드저니와 화가가 하는 일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자본에 봉사하고, 후자는 자기 실현이라는 풍요로운 삶에 봉사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 온 길에서 겪었던 일들이 평화로운 22세기를 위한 초석이었다고 믿고 싶다. 지금은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인류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인간다운 삶에 도움이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분별하기 위한 과정. 디지털 콘텐츠가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하는 방향으로 무사히 이동할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삶을 퐁요롭게 만들어 준다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콘텐츠 제작이 자연과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디지털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걸까. 디지털과 온택트가 자연과 대립하지 않고 인류를 연결해줄 수 있는 자유의 도구로써 기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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