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사무직은 어디에도 합격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일찌감치 포기한 것도 있고,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다간 건강을 다 망칠 것 같아서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나는 취업을 거부하길 택했는데, 반은 자발적이었고 반은 타의적이었다.
잡코리아나 사람인에 들어가 보면 별 거 없는 20인 미만 회사도 경쟁률이 60:1~100:1을 상회한다. 지금 듣보잡 좋소 회사도 이런데, 다른 곳은 오죽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저 몇십 명을 제치고 1이 되는 사람이 나일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너무나도 희박해 보였다. 희망이 생기기도 전부터 좌절과 불안에 허덕였다. 희망이 꺾이면 그게 절망인데, 요즘 청년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절망도 아니고, 무망(無望)이다. 애초에 싹 틀 희망조차 없는 거다.
대학시절, 처음 1학년은 멋모르고 날려 보냈다. 2학년 때는 코로나가 터져 집에서 놀고먹고 게임만 조졌다.(덕분에 정신 건강은 그 어느때보다 좋았다.) 3학년 올라가면서 이렇게 살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 편입에 도전했고, 장렬하게 실패했다. 실패라고는 해도 그 때의 실패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기에 오히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구나' 생각하고 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꿈이 사업가에서 자유인으로 변했으니.
다만 후회되는 건 그냥 편입을 할 시간에 기술을 배울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림, 코딩, 디자인, 게임... 뭐가 됐든 간에.) 그렇게 아까운 1년을 정신병과 함께 또 날려 보내고 3학년을 맞이했다. 솔직히 대학교 3, 4학년 때는 취업 준비랄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때의 내 화두는 오로지 기후/생태 위기 뿐이었고, 이 망해가는 지구 위 인류 문명을 어떻게 끝장내고 새로 쓸 수 있을까. 종일 그 고민 뿐이었으므로.
그 때의 나는 이미 돈을 좇는 삶과 작별을 고했다. 당연하게만 여겼던 스펙 경쟁이 사실은 "생명"을 "상품"으로 만드는 반인륜적인 역겨운 행태임을 알고 더 이상 가담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마침 편입 여정을 끝내고 채식을 시작하면서 모든 '살아있는 것'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일, 돈, 명예만 좇을 때와는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누군가의 죽음과 폭력에 무던해진 사회를 보며 세상이 그토록 추악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한동안 나는 늘 절망했고, 분노했고,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 속에 살았다. 인간이 이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원래도 늘 우스갯소리로 인간이 제일 싫다 말할 정도로 동족 혐오가 있었고, (누군가 나에게 너도 인간이잖아 따위의 말을 하면 그래서 나도 내가 싫어, 라는 말로 응수해 주었다.) 인간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남을 착취하고 자기를 착취하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 우울해서 빵 샀어. 그러니까 위로해 줘." 라고 말하는 시대정신이 눈꼴 사나웠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대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그런데 네가 산 빵에 들어간 유제품은 여자 젖소를 학대해서 만들었고, 그 밀가루는 캐나다에서 농약과 화학 비료를 잔뜩 투입해 재배한 밀이며, 수입해 올 때 엄청난 양의 탄소를 배출해 들여온 방부제 덩어리란다. 심지어 그 빵을 만든 빵 공장은 직원들을 갈아 넣기로 유명한데, 그 사실도 모른 채 우울하다는 이유로 백밀과 흰설탕을 버무린 정제탄수화물을 먹고 충동적으로 네 몸에도 사회에도 안 좋은 일만 골라 한 너를 내가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모르겠구나. 게다가 결과적으로 네가 충동구매를 했기 때문에 너는 너를 우울하게 만드는 직장 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하게 됐는데, 아무 생각 안 드니?"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말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회 악에 가담하는 도시 생활자'에서 벗어나길 바랐고, 사람들은 그런 것보다도 더 편리한 삶, 더 사치스러운 삶, 더 거저먹는 삶을 원했다. 설령 그렇게까지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개는 "오늘을 견디느라 지친 나"를 위로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넘어져도 괜찮다는 얄팍한 자기 위로 에세이와 건실함은 개나 줘 버린 천박한 방송이 불티나게 팔렸다. 사람들은 ott와 술안주로 오늘을 잊고서, 갈구는 상사 대신 다독여 줄 곰돌이 푸를 찾으며 매일 쳇바퀴처럼 살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부자가 되어 '경제적 자유'를 일구기를 원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는 게 뭣같으면 뭣같은 사회에 엿을 날려 줘야지, 왜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고 자기 파괴적인 '일시적 위로'에 목을 매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야 남 탓하기가 특기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죄다 안되면 내 탓(우울증), 잘되면 내 덕(능력주의)만 하고 있기 바빴다. 그렇게 잠깐의 쾌락으로 고통을 지우고 또 다시 자기 자신을 고통으로 내모는 현실에 출석한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 괴로운 건 똑같을 뿐인데.
나는 자본주의가 서로의 목을 조르는 동시에 자신의 목까지 조르게 만든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싶었다. 우리가 상품을 구입하고 살면서 그 이면에 감춰진 착취에 쥐도새도 모르게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또한 삶의 미덕이 "더 좋은 상품을 더 많이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얘들아, 안 사면 일을 안 해도 된다니까?
돈으로 삶을 해결하지 말자. 자급, 공공재, 공유, 나눔, 봉사, 돌봄으로 삶을 해결하자. 예컨대 의식주가 남의 영업 실적이 아니라 내 손 안에 있다면 자아실현만 하며 사는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말은 이상주의자의 망상으로 여겨지거나 옛 향수와 미화정도로 치부되었다. 미화나 망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수백만 년을 살면서 실제로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해 왔던 삶의 방식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고루한 삶에서 우리가 벗어났으며, 혜택을 보게 되었다고 철썩같이 믿었다. 그러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는 대신 자유를 잃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자유롭다.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그런데 인간은 어째선지 자발적 노예 제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구르며 고통스러워 한다. 고통을 잊기 위해 남의 피를 마시면서. 기후위기, 생태위기, 경제위기, 사회적 갈등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착취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다.
나는 이런 기구하고도 기괴한 현대 문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이 시스템에 이끌리듯 살아가야 하는 취업을 거부하기로 하고,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다. 덕분에 3, 4학년은 돈 되는 일을 위한 준비 따위 전혀 하지 않았다. 죽어도 직장인은 되지 말아야지, 그게 내 목표였다.
그런데 올해 시골에 갔더니, 청년이 할 만한 일이 너무 없었고 역설적으로 자동차와 로켓배송이 아니면 살 수 없었다. 해외로 나왔더니 외노자 신분 달고 노동 착취만 죽어라 당했다. 운동을 해보려니까 약해져 있던 몸이 견디질 못했다. 그나마 오키나와에서 좋았던 건 어딜 가도 바다가 보이고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는 건데, 이 경험을 토대로 하루 빨리 바닷가로 귀촌하고 싶었다. 귀촌을 목표로 잡고 집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만 자본금을 벌어 보자며 결국 그토록 싫어했던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말았다.
웃긴 건 취업이라는 게 하다보니 취업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무언가를 이뤄야지."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어도 차츰 시간이 갈수록 "그냥 어디든 취업에 성공하고 싶다. 이러다 영영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마음으로 바뀐다. 형편없는 경제 불황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채찍이 되어 나를 괴롭히다 결국 지쳐버리고 만다. 와중에 너도나도 불안하다 보니 취준생들 스펙 인플레가 장난 아니게 일어났다. 마치 게임 신규캐릭터가 점점 고성능 사기캐로 출시되는 것처럼. 그러면 또 뒤질세라 다같이 열을 올리고 죽어라 스펙을 쌓는다. 그렇게 해서 남는 건 재밖에 없다. 점점 삶의 원래 목적이나 방향성을 잃어 가고 만다.
2.
그렇게 싫어 죽겠다던 직장인이 되고 보니 사람들이 왜 얄팍한 자기 위로, 우울해서 빵 사기, 죽고 싶어서 떡볶이 먹기, 숏츠와 릴스로 정신 망치기에 꽂혔는지 알 것 같았다.
일단은 세상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내 얘기를 간단히 하자면, 나는 지금 첫 직장치고 나쁘지 않은 좋소에 입사해서 업무 난이도도 그럭저럭인 일을 하고 있다. 문제는 가치관에 정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거다. 동물해방, 여성해방, 자연해방을 목표로 산다는 사람이 성착취물에 버금가는 소설을 읽게 된 것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질이 나쁘고, 제목의 소재로 성범죄를 이용하는 저급한 수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유해매체를 소설이라고 불러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텍스트 포르노에 불과했다.
나는 글을 쓰는, 그리고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글이라는 매체의 단단함과 깊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 글이 시장 논리를 따르니 맥도날드처럼 변질됐다. 웹소설은 빠르고 자극적이며 피상적인 것들을 매일 자판기에서 뽑아내듯 써다 바쳐야 한다. 기본적으로 질이 좋을 수가 없다.(질이 좋으면 기적이다.) 작품에 따라 문장력도 엉망진창인 것들이 부지기수로 널렸다. 맞춤법과 조사를 틀리는 건 기본이고 비문 대잔치에 가끔은 작가 본인도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건지 알 수 없어 보이는 문장들이 심심치않게 보인다. 소설이 장난인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여서 만만하게 여기는데, 이건 그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인체도 제대로 모르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제발 기본은 갖추고 글을 써 주었으면. 답답할 지경이다.
글은 아주 정제된 형태의 수준 높은 전달 매체다. 고민하고, 조심하고, 선별해서 상황에 맞는 가장 최선의 언어를 적어낸다는 건 폭력이나 한시적 쾌락에 물든 사회에서 정 반대의 길을 걷는 일이다. 그런데 이 글을 가지고 아무렇게나 유해한 장면을 마구 써내는 걸 유통해야 한다니. 그냥 고통의 집제다.
애초에 게임 학원 비용을 대기 위해 적당히 취업한 거지만(이게 된 것도 사실 엄청난 운이긴 하다.), 일이 잘 맞으면 계속 다닐 의향도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이를 악물고 이직을 준비하게 됐다.
문제는 이직을 할 수 있을까, 이 걱정에 숨이 막힌다는 거였다. 일단은 먹고 사는 데에 돈이 필요하니 백수가 될 용기는 없고. 그런데 이직하려는 업계는 불황에 구직난이고. 포트폴리오만 몇 달을 깎아도 받아 줄지 불투명한 극악의 취업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임 업계. 업무 강도도 꽤나 빡세고, 당장 포트폴리오를 쓰는 데만 해도 머리에 열이 오를 지경이라 체력 소모도 대단하다. 일과 학원 공부를 병행하고 있으니 일 평균 수면 시간은 서너시간이다. 이렇게 공들여 투자했는데 이직이 되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플랜 A, B, C... 쭉쭉 세워 가며 어떻게든 여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자니 그것만으로도 골머리가 썩었다. 수영을 괜히 관뒀나 매일같이 후회도 했다.
이런 상황에 놓이니 다른 걸 살필 여유가 없다. 당장에 그제도 거의 기후 재난 수준의 폭설이 내렸는데 기후 위기 걱정도 잠깐이고 다시 내 지갑사정과 커리어 걱정에 정신이 쪼그라들었다. 급기야는 존재통까지 느꼈다. 내가 왜 살고 있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지? 난 도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거지? 세상에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게 내 신조인데, 그렇다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대관절 그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와중에 웬 미친 개한테 물려서 사기까지 당했다. 자연을 배신하고 돈을 벌러 왔다면서 하늘이 벌이라도 주는 건가 울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회사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결정권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뽑아주는 회사에 가서 시키는 업무를 하고, 인사 평가에서 살아남아 잘리지 않는 게 목적이 된다. 내 인생인데 늘 남의 손에 쥐락펴락당하면서 사는 거나 다름없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당장에 내 미래가 늘 불안하고, 돈이 없으면 또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인 데다 주변 시선까지 신경 쓰여 백수로 있기도 눈치 보이니 다른 걸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오직 내 눈앞에 닥친 일을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거다.
게다가 삶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일은 더 어려워지고, 세상은 더 번잡스러워져 간다. 이러니 일이 끝난 다음에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지는 거다. 안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 힘든 세상의 불편한 진실까지 꾸역꾸역 자발적으로 파헤쳐 가면서 고뇌할 만큼의 여유가 없다. 그동안 내가 이런 일을 고민하고, 공부할 수 있었던 건 다 대학생을 빙자한 백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살다보니 우리는 잘못된 방식으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삶이 점점 복잡해지니 생각은 점점 가벼워진다. 코드는 점점 난해해지는데 사고는 점점 단조로워진다. 세상을 이렇게 만든 죄로 머리는 가볍고 몸은 무거운 인간이 되어간다. 반대로 삶을 단순하게 살고, 지성과 교양을 끌어올릴 수는 없을까. 기껏 뇌가 무거운 동물로 진화해서 챗GPT한테 생각까지 외주 주는 건 인간으로서 자존심 상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일을 하느라 지친 나머지, 존재를 이루는 것들에 대해서는 소홀해졌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에 대한 고찰, 구성원에 대한 존중, 나의 의식주가 되어 주는 지구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 건 사치가 되고 말았다. 당장 나만 해도 계몽이고 운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좋아하는 게임이나 실컷 하면서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니. 그런 사람들한테 위의 저 건방진 말이 들리기나 했을까. 나같아도 귀를 막고 싶었을 거다.
3.
하지만 이렇게 외면하고 산다면 언젠가 자연의 철퇴를 맞을 것이다. 이번에 내린 폭설도 서해안 바다의 열기가 수증기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발생한 것이라는데, 결국 지구가열화가 문제였던 거다. 지구를 끓여 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나는 그 해답이 "백수로 살기"에 있다고 본다. 성장을 위한 맹목적인 화폐 창출을 멈추고, 다같이 놀고먹기나 하면 이렇게 지구를 망가뜨릴 이유도, 필요도 없다. 솔직히 왜 이렇게까지 돈, 돈 거리는지 한 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밥을 지을 수 있는 건 쌀이지, 삼성전자 주식이 아닌데 말이다.
그러려면 우선 도시의 구조와 노동의 구조가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금 노동을 줄이고, 도시 안에 마을을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을 안에서 경제가 선순환되도록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마을 안에서 먹거리와 에너지를 자급하고(텃밭과 재생 에너지로 녹지 조성 및 탈석탄), 서로 돌봄(가사, 수선, 수리 등의 재생산)을 수행하고, 창조적인 활동(엔터테인먼트)을 해나가야 지옥같은 노예의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