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그리고 타칭 '호구'인 나는 회사생활이 참 힘들다. 거래처(갑) - 우리 회사(을) / 우리 회사(갑) - 가공처(을)의 관계인 비즈니스에 종사하면서도 여기서도 을, 저기서도 을이다. 물론 사내에서도 막내이자 허허실실의 포지션으로 나는 을이 아닌 병을 지나 저~기 정 즈음에 있으려나. 심지어 그 모두와 연락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영업지원 직무여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차를 내고 연인과 드라이브를 하던 중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우리보다 을의 입장인 가공처에서 본인들이 실수한 게 있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대뜸 "이렇게 바쁜데 연차를 내면 어떡해요?"로 시작한 통화에서 상대는 너무나 당당하게 실수했다고 말하며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그런 기색조차 비치지 않았다. 알겠으니 내역을 다시 보내달라고 이야기 한 뒤 전화를 끊으며 "감사합니다."라고 했는데, 아이러니하게 "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하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을 찜찜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저분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데 전화를 받기 전 유달리 긴장되고 예민해지곤 했다. 나를 본인의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확실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애매하게 조금 가라앉은 기분에 연인에게 속상함을 토로했다. 본인이 잘못을 했음에도 오히려 당당한 태도와 결국 감사하다는 말은 나만 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연인이 습관적으로 하는 "감사합니다."를 버리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감사하지 않거나 감사할 일이 아닌데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습관이 배어있었다. 전화는 물론, 실제로 만났을 때에도. 그 어조가 끝을 짐작하게 해 주어 대화를 수월히 끝맺음하기에 이만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네." 혹은 "알겠습니다."로 대체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근황
그리고 지금, 약간의 쌈닭이 되어가는 듯하다. 방금 전 위 일화의 상대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제대로 듣지도 않고 무작정 내 탓을 하는 말에 딱딱하게 되받아치며 침착한 대응을 했다. 매번 전화를 끊기 전에는 내용을 상기하며 감사해야 하는 일인지 아닌지 따져보고 있다. 다소 피곤하다 느낄 수 있지만 원하지도 않는 말을 내뱉고 스스로 '호구 잡힘'을 자책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며칠 전에는 요구가 합당하든 부당하든 불쾌한 언사로 기분 나쁘게 하는 차장님과 말씨름을 하기도 했다. 회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위아래가 엄격하고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의 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는구나', '내 생각과 요구를 말하니 들어는구나'를 몸소 체험하며 더욱 K-직장인으로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