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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Jan 22. 2024

여행자로 살아보기

 아내와 함께 한 달간의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막 돌아왔다. 냐짱(나트랑)행 편도 티켓만 들고 베트남에 입국해서 모래사막으로 유명한 무이네와 내륙 고원 도시 부온마트옷, 마지막으로 달랏을 거쳐 돌아온 것이다. 베트남 한 달 여행은 작년에 이어서 두 번째요, 산티아고 순례가 한 번이니 코로나 기간을 빼고는 은퇴 후 매년 여행을 한 셈이다. 이쯤에서 사람들이 하기 쉬운 오해가 있다. 마음대로 다닐 만큼 돈이 많을 것이다, 영어를 아주 잘할 것이다, 그리고 여행계획을 철저히 세울 것이라는 오해 말이다. 물론 모두 사실이 아니다. 연금 생활자이며 생존 영어 수준인 우리 부부가 어떻게 해외 자유여행을, 그것도 매년 한 달씩이나 다닐 수 있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요령이 있다.


 첫째, 여행지는 물가가 싼 곳으로 정한다. 피부로 느끼는 베트남의 물가는 대체로 우리나라의 1/3 수준이다. 숙소는 호텔이나 에어비앤비를 찾는데 보통 3~4만 원 수준이면 깔끔하고 만족스럽다. 식사는 한 끼에 3~5천 원 정도면 제법 괜찮고 여기에 간식과 오토바이 대여료 등을 합쳐도 하루에 7~8만 원, 시골에서는 그보다 적은 돈으로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 결국, 비행깃값을 포함해서 300만 원이면 둘이서 한 달 여행이 가능하니 연금 생활자라도 해볼 만한 수준이다. 

 둘째로는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이나 투어를 피하고 유명한 관광지나 맛집 등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대신 현지에서 정보를 모으고 날씨와 체력, 느낌에 따라서 나만의 여행코스를 그때그때 욕심내지 않고 정한다. 남들이 권하는 코스를 검색해서 숙제하듯이 돌아보고 사진 찍는 여행패턴을 버리고, 여행지의 소소한 풍경과 일상에서 재미를 찾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냐짱의 경우 우리 부부는 빈펄 아일랜드나 원숭이 섬 등의 유명 관광지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바닷가를 산책하거나 그늘에 누워 책을 읽으며 일주일을 보냈고, 부온마트옷에서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호숫가를 걷거나 석양을 바라보면서 열흘간 뒹굴거렸다. 그럴 거면 집에 있지 뭣 하러 해외까지 나가느냐고 물을 사람도 있겠지만, 막상 해보면 그 재미가 쏠쏠하다. 현지인들이 먹는 걸 먹고, 택시 대신 로컬버스를 타고, 뒷골목과 재래시장에서 뜻밖의 재미들을 발견하고, 피곤하기 전에 숙소에 돌아와서 뒹굴거리며 캔맥주 한잔을 나누다 보면 은근한 행복감이 슬금슬금 찾아온다. 이른바 여행에서 찾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셈이다. 경치만 해도 그렇다. 이번 여행 중에 본 최고의 풍경은 저녁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석양이었다. 한적한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서 갑자기 시야가 트이면서 논들이 퍼즐처럼 이어져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논에는 붉게 물든 하늘과 어두운 나무 그림자가 데칼코마니처럼 담겨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구불구불 길옆에는 반딧불이가 꿈처럼 날아다녔다. 50여 년 전 어린 시절로 돌아온 것일까, 판타지 영화에라도 들어온 것일까? 나는 잠시 현실감을 잊고 멍하니 취해 있었다. 유명한 유적지나 관광지를 찾아다녔다면 절대로 맛볼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세 번째로는 언어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베트남어는 물론이고 영어도 겨우 몇 마디 늘어놓는 수준이다. 그런데 실제 여행에서 언어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웃으며 ‘신짜오’하고 다가가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도우려고 하니 말이다. 게다가 요즘은 스마트폰에서 무료로 통역해주는 앱들이 많다. 직접 대화하는 것에 비해 조금 불편할 뿐, 소통하지 못해서 낭패 볼 일은 없다. 중요한 것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태도이지 언어가 아니다. 이렇게 현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수다를 떨고 술을 권하며 낄낄거리다 보면 언어와 국적을 넘어선 일종의 공감대가 생긴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넓어진 것이다. 사실상 내게 여행은 세상을 이해하면서 행복까지 충전하는 좋은 기회다. 은퇴자 형편에도 매년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이 글은 2024년 1월 11일자 주간 '보은사람들'에 실린 본인의 글을 옮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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