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탄절 전날 밤 9시 30분.
오래간만에 야식으로 매운 라면이나 떡볶이가 먹고 싶었는데 '진짜 먹을 거냐'라고 응수하던 남편이 미웠다. 그것 하나 먹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공감해주지 못하는 그이가 얄미웠다. 야식 먹으려니 찔리는 마음을 그이가 알아봐 주길 원했다.
차에 숨겨둔 산타의 선물을 가지러 간다는 이유로 현관문을 열었는데 산타의 선물이 비상계단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착한 산타가 미리 가져다 뒀네.' 남편을 향한 얄미움이 사그라들었다.
성탄절 전날 밤 10시. 집을 나와 걸었다. 단지 안을 걸어 나오는데 배달기사님의 오토바이와 마주쳤다. 난 야식 배달 시켜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저 야식은 어디로 간 걸까? 불 켜진 집들이 부러웠다.
목적 없이 걸었다. 내가 내 맘대로 야식 하나 못 시켜 먹나? 다시금 야식 하나 제대로 안 시켜 먹은 내가 원망스러웠다. 야식이 뭐라고. 그거 먹는다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게 뭐라고 제 맘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 맘대로 먹고 싶어 짜증이 나는지.
걷고 걸었다. 왜 이리 야식이 먹고 싶은 걸까. 낮에 아이스크림과 초코버터링쿠키, 샌드쿠키를 야무지게 먹었다. 저녁에는 크리스마스 타르트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니 생라면을 수프에 찍어먹고 싶었고, 집에 라면이 없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서러웠다. 야식이라도 시켜 먹으려고 배달어플을 켜봤는데 뭐가 맛있는 지도 모르니 답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는 콘 아이스크림을 두 개나 먹었다.)
하루를 뒤집어보니 야식이 먹고 싶은 이유가 떠올랐다. 그래도 성탄절 전 날인데,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내가 먹고 싶은 것들 건강 생각하지 않고 다음날 컨디션 따지지 않고 마음대로 먹고 싶었다. 그냥 다 내 맘대로 어지르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 공부도 안 하고 넘겼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날인데. 이 날만이라도 뒷걱정하지 않고 내 맘대로 살고 싶었다. (뭐 종종 일어나는 합리화의 과정이기는 하다.)
야식 하나에 이리 많은 생각이 오가다니, 그만큼 뭔가를 참으며 시간을 사용했나 보다. 꾹꾹 참으며 욕망과 싸우며 해야 하는 일들을 해내며 말이다. 참 열심히도 살았던 거다. 잘 살아온 나에게 멋진 선물과 칭찬을 주고 싶어서 야식이 그리도 간절했다. 고작 야식 하나 흔쾌히 배달해주지 않는 남편이 그리도 원망스러웠나 보다. 나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보상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아이러니하게도 난 이 글을 롯데마트에서 쓰고 있다. 지갑을 가져오지 않기를 참 잘했고, 삼성페이 따위 사용할 줄 모르기를 참 잘했다 생각하면서. 폰으로 타자를 치는 손가락이 얼지 않는 곳은 밤 11시까지 열려있는 롯데마트가 최고다.
성탄절 전날 밤, 야식 대신 잠옷을 입고 걸었다. 야식도 꿀맛이었겠지만, 걷다가 글로 날 인정해 주는 것도 꿀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