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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곤 Jul 08. 2023

걱정과 고민이 많은 이들에게

새옹지마(塞翁之馬)


 당신은 지금 얼마나 많은 걱정과 고민에 빠져 계신가요? 세상살이는 참으로 쉽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고민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겠지요. 인생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너무 걱정만 하는 것보다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요?


 ‘인생은 새옹지마’ 어른들의 입을 통해 자주 듣던 말입니다. 은유를 통한 이 표현은 ‘인생=새옹지마’라는 등식을 만들죠. 인생을 새옹지마에 대치함으로써 원관념인 인생은 뒤로 숨고 보조관념인 새옹지마는 텍스트의 표면으로 드러냅니다. 형태적으로 단순한 병치로만 이루어진 이 문장은 사실, 인생(人生)의 원뜻이 감춰지는 동시에 새옹지마로 대치되며 문장의 깊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문장을 우리네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은유의 형식 속에 선조들의 경험이 녹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 타코마 해협에 놓여있는 견고한 다리가 무너진 사건을 아시나요? 물체는 고유의 진동수를 가집니다. 진동수가 같은 두 물체가 가까이 있을 때 공명이란 현상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공명이란, 특정 고유진동수를 지닌 물체가 그와 같은 진동수를 가진 힘을 주기적으로 받을 때 진폭이 급격하게 커지는 현상입니다. 공명의 힘이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죠. 타코마 대교는 190km의 태풍에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설계된 다리였습니다. 하지만 190km의 강풍에도 끄떡없는 그 대교는 산들바람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죠. 그것은 타코마 대교가 가진 고유진동수와 산들바람의 진동수가 우연찮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공명이란 참으로 대단하지 않나요?


 ‘인생은 새옹지마’조차도 고유 진동수를 가집니다. 하지만 문장이 지닌 진동의 힘은 천천히 알아감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천천히’는 마음에 전해져 오는 어느 지점의 속도이기도 하지만 느끼는 사람의 연령과 인생의 어떤 주기이기도 합니다. 즉, 뒤늦게, 나이 들어서 깨닫는 편이 낫다는 뜻입니다. ‘인생은 새옹지마’를 10대에 혹은 20대에 읊조리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니깐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이 가정이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진동을 지금 꼭, 국어교육과 학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유는 나의 마음, 한 시절의 우울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새옹지마’가 가진 고유진동수에 공명함은 천천히 일어날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일찍이 느껴봄은 더 좋습니다. 일종의 구급약으로 말이죠.

새옹지마란, 직역하자면 “변방에 살고 있는 늙은 노인의 말”이란 뜻입니다. 그 속뜻은 “사람의 앞날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죠. 여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유래는 옛날 중국의 변방에 한 늙은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노인이 키우던 말 한 마리가 오랑캐 땅으로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노인을 위로하였지만, 노인은 이것이 복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고 말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집나 갔던 말이 짝을 지여 새로운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웃들은 기뻐하며 노인을 축하하였지만, 노인은 이것이 화근이 될 수도 있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을 타던 노인의 아들이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쳤지요. 이웃들은 노인을 위로하였지만, 노인은 이것이 복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지요. 그리고 얼마 후 나라에서는 큰 전쟁이 일어나 모든 청년들이 전쟁터에 나가 대부분이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전장에 나가지 않아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노인의 자세, 그것이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닐까요? 4학년이 되면 나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로부터 멀어진다는 게 무엇일까요. 혼자 밥을 먹어도 별로 여의치 않다는 것일까요. 나로부터 멀어지면 세상, 서정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우리는 우주를 거닐어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나와 주변 그리고 지난 삶들을 돌아보게 되죠. 입학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마주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들은 경이로움을 경험합니다. 반대로 떠날 때가 다 되니 그 세계는 어그러지는 것만 같은 상실을 느끼기도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그 세계는 몰락하고. 또다시 조우하며, 그것 또한 속절없이 무너지는 그 경계에서 우리의 생은 잠시 흔들립니다. 이러한 과정애서 우리는 새로운 좌표를 부여받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겠죠.


 20학번 동기들에게 임용고시란 우리를 너무나도 흔들어 재끼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흔들림을 견뎌야 새로운 좌표 즉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시련이 견디면 그 연장선에는 달콤한 성취가 있을 것이니깐요.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에 심한 공명을 일으키는 저도 때론 이 흔들림이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 하지만 어디 말만큼 쉬운 일인가요. 12시까지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고 나오는 길이 너무 적적해 크록스 신발의 뒷부분을 고쳐 맨 적이 있습니다. 이 파란색 고무 끈에라도 제 발목을 의지하고 싶었었나 봅니다. 그런 제 자신이 너무 처량해 도서관에서 집까지, 흘러나옴을 주채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왔습니다. 새옹지마라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도 힘든걸요.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란 말처럼 국어과 동기분들 모두가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주위에 온통 당신의 도전과 꿈을 비웃음과 조롱으로 아니면 걱정하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웃으면서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대의와 포부를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보여주면 됩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행동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심히 흔들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의’ 일 것입니다.

3월 11일 쓰기 교육론_비평적 에세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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