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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곤 Aug 22. 2022

관계망: CONNECTWORKING

피정원 Jungwon Phee

 

글을 적는다와 읽는다는 건 다르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책이란 하나의 안내서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일종의 시험지였으며, 지뢰밭으로 변해버린 현대사회 속에서 지녀야 할 태세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했다. 이젠 시간이 흘러 시험지의 만듦 이를 자처한다. 시험지의 내용은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경험, 기억 그리고 감정이 중심이 된다. 이를 통해 독자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이끌어내며 때론 그들만의 새로운 해석의 이끌어 냄을 기대한다. 한편, 시험지를 만듦을 자처한다고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글을 읽으며, 예술품을 감상하며 그리고 자연을 관찰하며 끊임없이 순수한 추상의 경험을 한다.



피정원

Jungwon Phee

피정원〈Untitled The Black Path LXXXIX〉, 162.2 x 130.3cm, Oil on canvas, 2022



무제(無題) 

그림 옆에는 아무런 설명도, 심지어 작품의 제목도 쓰여있지 않다. 따로 찾아본 그림의 제목은 <Untitled> 즉 '무제'로, 이름의 부재는 관람자의 해석에 있어 작가의 개입을 제거한다.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다는 때론 많은 것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림 앞에 서서 하는 추상의 경험 그 모든 것이 정답이며 이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음'이 뒷받침한다.




순수와 순진

그림 앞에 다가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배경색이었다. 마치 눈물 자국처럼 흘러내린 먹이 지나는 곳이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캠버스인지 아님 흰색으로 칠해진 캠버스인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누군가 나에게 순수와 순진의 차이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순수는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도와지라면 순진은 그 위를 흰색 물감으로 덧칠한 도와지가 아닐까?’ 우리는 간밤에 내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의 상태로 태어난다. 이후 아직 색을 찾지 못해 손에 쥔 건 흰색 크레파스인지라 하얀 도와지를 흰색 크레파스로 칠해간다. 그 옛날 우리들 모두 순진했으며 순수했다.





검은색

작품을 보고 있으면 확연히 구분되는 구도가 보인다. 화면의 검은 부분과 표현된 부분. 소년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마음 한편에 검은색이 자리함의 인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에게 검은색이란 슬픔과 외로움, 공허가 응축된 색이다. 때로는 슬프게 또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나를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어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 때론 생각한다. 빛을 충분히 감상하기도 전에 너무나도 일찍 어둠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빛이 너무 빨리 그 자리를 내어준 것은 아닌지. 어쩌면 마음의 창이 서쪽으로 나버린 탓에 해가 지는 서쪽 하늘만을 바라본 것은 아닌가 하며 말이다.




눈물

흰색과 검은색으로 나뉘어 떠받치고 있는 것은 피로와 절망의 시간들이다. 어른이 되곤 몇 번의 이별을 경험했다. 만남과 헤어짐의 미학. 이것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그리곤 그 모순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리움과 외로움 슬픔뿐이었다. 나에게 사랑은 태양이라든가 바다 등 영원을 떠올리게 하는 너무나 크고 영속적인 것들이 아닌 피로와 절망의 시간이었다.  


삶은 패배로 얼룩졌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지 않겠는가? 비록 삶이라는 게 역설과 양면성을 띈다지만, 또 다른 사랑에 패배할 것을 알지마는 '실패 작전을 이고 힘껏 실패함'은 이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분수이자, 추호도 잃지 말하야할 태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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