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 많다. 방에 책상도 새로 들여놨는데 답답하다며 안 들어가고 꼭 거실 소파에서 거실 테이블에 앉아서 일한다. 그의 일은 노트북과 전화면 준비 완료이다. 업무 메일 확인, 문서 작성(?)과 전화 통화가 주다. 출근하는 자세에서 흐트러짐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일까, 아침마다 출근 복장을 챙겨 입는 남편 얼굴엔 사명감마저 엿보인다. 하의는 집에서 입는 파자마에 수면양말을 신어도 될 것 같은데 꼭 바지에 양말까지 다 갖추어 입는다. 그리고 일명 '콘퍼런스 콜'을 할 때는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준다. 그럼 우리는 밥 먹는 것도 조용조용, 설거지도 조용조용, 말소리도 조용조용해진다.
집안에 남편의 말이 가득하다. 남편은 얘기하길 좋아하고 사교적이어서 전화 통화도 늘 유쾌하다. 그런데 요 며칠, 남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매일 아침 근무가 시작되고 제일 먼저 진행하는 팀 내 회의에서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오늘은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남편이 "엑셀 파일 말인데요, 그거 제대로 확인하고 한 거 맞아요?" 했다. '제대로'라니... 저런 말을 듣는 사람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누가 직장에서 나에게 저렇게 말했다면 기분 나빴을 말이다. 회의에 임하는 남편의 말투는 계속 상대방을 확인하고 추궁하고 가르치는 듯이 말을 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두 명 이상의 아랫사람이 듣고 있는 것 같고 저 너머에서 남편의 말을 들으며 쩔쩔매고 있을 회사 직원이 보이는 듯했다. 10분 남짓하던 회의가 끝나고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지금 같이 회의한 사람들 나이가 어린 가 봐?"
"응. 왜?"
"아니, 대학교수가 학생 지도하듯이 말해서. 당신이 가르쳐야 되는 상황이야?"
"그렇지, 뭐. 답답해. 몇 년째 제자리인데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되네."
"일을 신중하게 하는 사람인가 보네."
"신중한 게 아니라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쳐 줘도 못 한다니까. 안 하는 건지."
"어떻게 당신이랑 똑같아. 그 사람 입장이 있는 거지."
"내가 어떤 마음에서 이렇게 시키고 있으니까 제발 좀 하라고 어떻게 하나하나 다 설명을 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나 듣고 있는 사람이나 다 힘들어 보여."
"그렇지? 도저히 (내가 아닌 그 사람은) 안 될 것 같아."
남편은 IT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이 어린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렵다고 책을 사서 읽던 남편은 어디 갔을까. 지금의 남편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아, 어쩌면 아랫사람들한테 벌써 밉상으로 찍혀서 뒷담화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편의 마음이 상하더라도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조언을 해야 했을까. 남편에게 내 말은 어디까지 가 닿았을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내 발은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시야가 넓어지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더 잘 보기 위한 어떤 노력도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되기 쉽다. 어쩌면 나조차도 남편의 회의 내용 몇 마디를 옆에서 듣고 이렇게 글을 써도 되나 싶어 조심스럽다. 우리는 타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기 위한 겸허한 노력을 멈추면 안 된다.
알 수 있는 모든 사실을 다 펼쳐 놓아도
알 수 없는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사실'이 만능키가 아니라는 점은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 장지연, '소풍 김밥과 사실, 그 너머의 진실' (2022.2.10.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