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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썸 Jun 30. 2022

작은 생선을 굽듯이

10주간의 무용 수업이 끝났다. 일주일에  시간씩 지도해 주시는 무용 선생님은 방송댄스가 전문이시다. 쨍한 원색 운동복에 굵직한 액세서리, 길쭉한 팔다리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첫날부터 아이들을 사로잡은 무용선생님은 선곡도 BTS '다이너마이트' 골라 오셔서 환영을 받았다. 1 30초로 짧게 편집해 오신 음원에 맞춰 핵심 동작을 먼저 배운  나머지는 모둠별로 창작하는 부분이 들어가고 동선도 짜야하는 수업 과정이었다.


수업 초반, 동작을 익힐 때는 어설픈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됐는데 모둠별 연습이 시작되고 두둥, 우리 앞에 가시밭길이 펼쳐졌다. 제비뽑기로 모둠을 짤 때부터 서로 마음이 맞니, 안 맞니로 얼굴을 붉히더니 연습이 진행되면서 여기저기 삐꺽 대기 일쑤였다.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안 해요." "제 말을 안 들어요." "연습 안 하고 돌아다녀요." 괴롭다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아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의욕이 넘쳐서 그렇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누가 돌을 던지랴.


아이들이 문제가 생겨서 도움을 요청할 때에는 엉덩이가 무거우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는 이유는 작은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을 수없이 봐 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작은 생선을 굽듯이 하라'라는 말을 책에서 보았을 때, 이것이야말로 학급 운영에 딱 맞는 말이라 생각하고 가슴에 새기고 있다.  


제일 마음고생이 많았던 건 무슨 일에든 열심인 남자 회장 K였다. 평소에도 움직이기 싫어하는 M과 같은 모둠이 되었을 때부터 불만을 표시한 터였다. "K야, 다른 사람이 열심히 안 하는 것처럼 보여서 힘들지? 그런데 그 아이 입장에선 최선을 다하고 있을 수도 있어. 너의 최선이 다른 사람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너만 힘들어진단다." 몇 차례 대화를 거치면서 조금씩 뭔가 완성해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성격이 원만한 여학생 둘이 같은 모둠이었는데 내색은 안 했지만 이들의 공도 컸을 것이다.    


또 한 모둠은 연습 시간 내내 머리를 맞대고 동선만 짜고 있을 뿐 연습을 못했다. 이렇다 할 결과물이 얼른 나오지 않아서 너희는 뭐했냐고 무용 선생님께 뼈아픈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는 아이가 없어서 힘들었던 것 같다. 그 모둠만 보면 나 혼자 속을 끓였었는데 막판에 가서는 아예 신경을 끊었더니 웬걸, 그게 통했나 보다.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 결과물을 보여 주어서 눈물이 날 만큼 고맙고 대견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차, 2차에 걸쳐 연습 영상을 찍고 본 촬영을 하는 날이 되었다. 고정된 카메라로 한 번, 무빙카메라로 한 번, 두 번을 찍었는데 한껏 멋을 내고 온 아이들은 평소보다 더 긴장한 듯 보였다. 무용 선생님과 헤어지기 아쉬워하며 아이들은 이름표에 선생님 사인까지 받았다. 모둠별로 찍힌 1분 30초 영상에 담긴 이야기를 누군들 가늠이나 할까.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아이들과 나만 안다.






오늘, 무용 수업을 마친 소감을 모닝페이지에 써 보라고 했더니 '다른 사람과 같이 작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아이돌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최선을 다해서 속이 후련하다' 등 다양한 생각을 썼다. 그중 내 눈길을 끈 건 두 그룹의 안무 중 독무를 추었던 학생이 있었는데 자신이 못 췄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칭찬에 인색했었구나 반성했다. 다른 사람에게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수없이 강조했으면서 정작 자신을 인색하게 평가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돌볼 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잘했다, 수고했다... 나 자신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는 길은 어디에서, 어떤 말을 찾아야 할까.


아이들은 민감한 영혼이다. 다른 사람 말에 쉽게 상처받고 흔들린다. 나 어렸을 때를 돌아봐도 늘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던 것 같다. 이만큼이나마 단단해지기까지 먼 길을 왔는데 아이들한테 쉽고 빠른 지름길을 찾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결국 겪어야 할 일을 겪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각자의 길을 자신의 몫만큼 걸을 것이다. 아이들 인생에서 나는 잠깐 지나가는 역할이다. 부서지기 쉬운 작은 생선을 조심스럽게 굽듯이, 내 말을 고르고 아이들 마음을 돌보면서 곁에 있어주는 사람, 그거면 된다.  


정들었던 무용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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