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의 여왕 리기산
스위스 여행에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마트를 포함한 대부분의 가게가 일찍 문을 닫기도 하고, 일찍 갈수록 관광객이 적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적으면 사진도 예쁘게 나오고, 대기 시간도 적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일찍 일어나 일정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오늘은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7시쯤 일어나 씻고 조식을 먹으러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는 전날 단체로 온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있었다. 잼을 바른 토스트, 시리얼을 넣은 요거트, 그리고 주스 한 잔을 가지고 자리에 앉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음식을 든 한국인 남자가 말을 걸었다.
"혹시 여기 앉아도 될까요?"
흔쾌히 그래도 된다고 했다. 알고 보니 자리가 없어서 내가 앉은 테이블에 앉아도 되겠냐고 한 것. 뒤를 돌아보니 비어있던 자리가 어느새 모두 차 있었다. 그렇게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어제 온 한국인 단체 관광객 중 한 명이었다. 자신들은 한 달 동안 유럽 9개국을 여행하는 패키지 상품으로 단체 여행 중이고, 나이는 모두 20대라고 했다. 해당 패키지 상품의 비용은 식비 미포함 500만 원이고, 스위스에서는 이틀을 묵으며 융프라우와 피르스트를 하루 씩 가는 일정이라고 했다. 보통 짧게 머무는 관광객이 융프라우와 피르스트를 가장 많이 선택하는듯하다.
나도 20대 때 이런 여행을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잠시,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스를 시작으로 유럽의 국가들을 조만간 하나씩 정복해 나가리.
식사를 마치고 나와 한국인 룸메는 어디를 갈지 고민을 했다. 메테오스위스를 통해 시간대별 구름의 이동방향을 봤는데, 오늘은 저녁 전까지 거짓말처럼 스위스 전역에 구름이 없는 날이었다. 나는 이런 날씨에는 융프라우나 체르마트를 가고 싶었다. 이 둘을 좋은 날씨에 가는 것은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쉽지 않기 때문에 날씨가 좋기만 하면 당장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체르마트에 가는 것은 꽤나 힘든 일정이고, 앞으로도 분명 오늘만큼 좋은 날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결국 리기산에 가기로 했다(신기하게도 실제로 여행하는 동안 거의 항상 맑은 날씨였다. 듣기로는 이러기 정말 쉽지 않다고 한다). 리기산도 날씨에 따라 전망이 차이가 많이 나는 곳이다. 리기산은 스위스 패스가 있으면 추가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가성비가 좋은 여행지. 스위스에 왔다면 유람선도 한 번쯤은 타 주어야 하는데, 마침 리기산 가는 길에 유람선을 타야 하기 때문에 굳이 따로 시간을 내 유람선을 타러 갈 필요도 없어져 일석이조다.
리기산을 가기 위해서는 인터라켄 동역에서 열차를 타고 루체른으로 이동한 뒤, 유람선과 산악열차를 차례로 타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루체른행 기차를 타서 창밖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풍경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중간에 모습을 드러낸 마을 '룽게른'은 굉장히 한적해 보였고 호수의 색깔도 아름다워서 트레킹을 하기 좋아 보였다. 이곳은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시간이 부족해서 갈 수 없겠지만 나중에 다시 스위스에 온다면 반드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루체른 역에 도착해서 우리는 미그로(Migros. 쿱과 함께 스위스 최대 마트 체인 중 하나)에서 점심거리를 사서 카펠교 앞에서 먹기로 했다. 카펠교는 유럽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목조다리인데, 루체른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카펠교 자체는 생각했던 대로 큰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루체른 특유의 오래된 도시의 느낌과 여유로운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유람선 시간이 되어 유람선을 타고 산악열차 탑승장으로 향했다. 유람선의 가장 앞쪽 갑판에 있는 자리에 앉으니 강렬한 햇빛 때문에 너무 더웠다. 그리고 어차피 앉아있으면 배의 앞 쪽 풍경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배 옆쪽에 그늘이 있는 자리로 이동했더니 이번엔 또 추웠다. 내가 간 시즌에 스위스의 날씨는 일교차가 꽤 컸다. 아침과 저녁에는 쌀쌀하고 낮에는 햇빛이 강렬해서 더웠다. 그래서 낮에는 반팔을 입어야 하는 날씨였는데, 그늘로 가면 또 추워서 항상 겉옷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산악열차를 타고 리기산 정상에 도착했다. 리기산은 해발 1,798m로 '산들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있다.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알프스의 여러 산들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이래서 산들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나 생각했다. 한쪽에는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내가 있었던 루체른도 아주 작게 내려다 보였다. 잔디밭에서 사진을 몇 장 찍어보니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 느껴지는 탁 트이고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과 산의 높이감이 온전히 잘 담기지 않아 아쉬웠다.
정상에서 풍경을 충분히 감상한 후 트레킹을 하면서 유람선 선착장까지 가는 산악열차를 타는 곳으로 걸어내려 갔다. 내려가는 길에는 에너지가 넘치는 귀여운 요크셔테리어 두 마리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주인과 함께 산을 내려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현지인들이 사는 것으로 보이는 시골 집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내려가니 곧 산악열차 정거장이 보였다. 이번에 출발하는 열차는 올라올 때 탔던 신식 열차가 아닌 클래식한 매력의 구형 열차였다. 구형 열차에만 있는 바깥 자리에 앉았는데 올 때 탔던 열차보다 훨씬 좋았다. 유람선을 타고 다시 루체른역에 돌아가 인터라켄행 기차를 탔다.
둘 다 많이 피곤한 상태로 숙소로 돌아가 저녁을 먹었다. 오늘의 메뉴는 룸메 분이 가져오신 신라면 두 봉지와 전투식량(물론 맥주는 기본). 이 분께서는 스위스의 비싼 물가 때문에 전투식량 여러 개를 구입하여 가져왔다고 하셨다. 나는 전투식량을 군 시절 딱 한 번 밖에 먹어보지 않았는데 막 맛있지는 않고, 그렇다고 맛없지도 않은 애매한 맛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룸메 분이 가져오신 전투식량을 먹어보니 맛이 꽤 괜찮았다. 신라면은 말해 뭐 하겠는가 정말 너무 맛있었다.
우리가 한 가지 놓친 사실이 있었다. 우리는 리기산 기념품 샵에서 판다는 예쁜 곰인형을 사고 싶어 했는데, 경치 감상하는데 몰두하여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인형은 나중에 그린델발트 기념품 샵과 제네바 공항 면세구역에서도 판매하는 것을 발견했고, 결국 나는 다양한 크기와 디자인으로 3개나 구매했다.
방에 들어와 미국 플로리다에서 온 룸메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이 친구는 오늘 융프라우요흐에 갔다 왔다고 했다. 사진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는 쨍한 날에 사방에 눈이 쌓인 모습이 너무 예뻤다. 속으로 '오늘 리기산이 아니라 융프라우요흐를 갔어야 됐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린델발트에서 2박을 할 예정이었는데, 융프라우요흐는 그린델발트에서 더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린델발트에 묵을 때 융프라우요흐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날씨가 좋다면 조금은 비효율적인 동선이더라도 감수할 의향이 있기는 했다.
리기산이 좋은 여행지이기는 하지만 스위스 트래블 패스가 있으면 100% 무료로 다녀올 수 있는 가성비 여행지라 더 알려진 감이 있고, 융프라우요흐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게다가 맑은 날의 융프라우요흐를 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쉽지 않은데 이렇게 맑은 날을 리기산에 썼다는 게 약간 후회가 될 뻔했지만, 또 맑은 날이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오늘 리기산에서의 경험이 너무 좋았어서 '좋았으면 된 거지'라고 생각했다.
자기 전에 내일 마터호른을 보러 체르마트에 가기로 했다. 왜냐면 메테오스위스에서 내일은 맑지만 모레는 구름이 낀다고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터호른을 하루라도 빨리 맑은 날에 봐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룸메 분도 이번 여행에서 마터호른 보는 것을 가장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체르마트는 스위스의 청정마을인데 마터호른이 아주 잘 보인다(난 처음 체르마트를 들었을 때 나는 무슨 마트 이름인 줄 알았는데 도시 이름 Zermatt를 한글로 표기해서 체르마트였다).
하지만 자기 전에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날씨 앱에서 점심 즈음부터 체르마트에 구름이 낀다고 나와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래 우리가 출발하기로 한 7시 반이 아닌, 좀 더 이른 시간에 체르마트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룸메 분은 이미 잠에 들어, 일단 나는 내일 일찍 일어나서 룸메 분이 일어나자마자 최대한 빨리 이 사실을 말하기로 하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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