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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 Oct 09. 2023

30대 직장인의 나 홀로 스위스 여행기 - 4일 차

알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봉우리를 보다

오늘 12시 즈음 체르마트에 구름이 낀다는 청천벽력 같은 예보에 불안했던 나는 아침 5시에 잠에서 깨자마자 날씨앱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하늘이 나의 마음을 알아준 것일까. 체르마트에 구름이 끼는 시간이 점심에서 저녁으로 바뀌어 있었다.


'휴... 좀 더 여유 있게 보고 올 수 있겠어'.


더 늦게 일어나기로 했던 룸메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알고 보니 나보다 조금 더 일찍 깼었고 기차 시간을 확인해 보니 7시 즈음에 있는 기차를 놓치면 한 시간 뒤에나 다음 기차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 그래도 더 일찍 출발하자고 말하려 했단다. 마터호른에 진심이었던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다른 이유로 일찍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한 뒤 6시 30분에 인터라켄 동역으로 향했다.


마터호른(Matterhorn)은 융프라우와 프랑스의 몽블랑과 함께 알프스의 3대 미봉이자, 토블론 초콜릿의 포장지에도 그려져 있던 산이다.  그래서 SNS에서는 토블론 초콜릿 포장지를 마터호른에 겹쳐서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것이 유행이다. 하지만 지금은 스위스에서 토블론 초콜릿의 일부 공장을 슬로바키아로 이전하면서 법적으로 포장지에 마터호른을 넣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실 제대로 인증샷을 찍으려면 예전 포장지의 토블론 초콜릿을 준비해와야 한다(스위스의 마트에는 이미 새로운 포장지의 제품으로 모두 교체되어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나도 한국에서 구입해가려 했지만 이미 주변 마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서 온라인으로 주문해야 했는데, 한 번에 여러 개씩 묶음으로 구입하거나 비싼 가격에 낱개로 구매해야 해서 그냥 구입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난 룸메는 인터넷에서 토블론 초콜릿을 한 개 구매해 왔다. 게다가 사진이 더 예쁘게 나온다고 하는 흰색 포장지의 제품을 사 왔다. 나는 이를 빌려 인증샷을 찍기로 했다. 룸메의 이런 준비성과 철저한 계획 덕분에, 동행하는 동안 나는 한 번도 헤맨 적 없이 항상 효율적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 있었다. 룸메는 이번 여행에서 시간 단위로 세운 모든 계획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뿌듯하다고 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정말 인복이 좋다고 여러 번 느꼈다.


토블론 초콜릿을 활용하여 찍은 인증샷


스위스의 청정마을 체르마트


기차를 타고 체르마트에 도착하니 오전 9시 30분 경이되었다. 역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뒤쪽에서 마터호른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다른 산에 가려져 조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순간 넋을 잃었다. 햇빛이 강한 날씨 덕에 마터호른에 쌓인 눈에 빛이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체르마트에서 맑은 날씨에 마터호른을 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오늘 우리 3대가 덕을 쌓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팔에 얇은 바람막이를 입은 나는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꽤나 추웠다. 이 때는 후리스를 입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몇십 분 뒤 햇빛을 받기 시작하니 금세 굉장히 더워졌다. 우선 쿱에 들러서 간단한 점심거리로 바나나, 또띠아, 에비앙 생수를 샀다. 스위스에서 에비앙은 기본 생수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삼다수나 아이시스 같은 느낌이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제품도 있었다. 그중 몸체를 손으로 꽉 누르면 물줄기가 나오는 형태의 편리한 뚜껑을 가진 제품이 마시기 편리해서 매일 1병씩 샀다. 가격은 한화로 천 원 대.


마시기 편한 뚱뚱한 에비앙 (출처: 에비앙 공식 홈페이지)


체르마트에서 마터호른을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보통 관광객들은 마터호른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 다른 곳에 올라가 멀리서 바라본다. 이때 올라가는 곳이 다양한데 일반적으로는 2가지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한다. 하나는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보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수네가(Sunnegga) 5대 호수 트레킹(Zermatt five-lake trail) 코스를 돌며 마터호른을 바라보고, 또 날씨가 좋다면 호수에 비친 마터호른을 보는 것이다. 여행하며 만난 일부 여행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외에도 다양한 곳에 올라가 마터호른을 바라보았던데 한국 관광객들이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보통 고르너그라트와 수네가 5대 호수 트레킹 중 하나를 선택한다. 둘 다 해도 하루 만에 충분히 소화할 수 있지만, 둘 다 충분히 좋아서인지 굳이 그러지는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우리는 수네가 5대 호수 트레킹을 간소화하여 3개의 호수를 보기로 했다. 왜냐면 5대 호수 중 가장 첫 번째 호수이면서 마터호른이 가장 아름답게 비치는 슈틸리제(Stellisee)('제' 어미는 독일어로 호수라는 뜻이다)에 반사되는 마터호른의 모습을 보고 싶었고, 5개의 호수를 모두 도는 것은 앞으로의 일정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기 때문에 체력 안배를 위해서였다.


자동차가 다 너무 귀여워


수네가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차들이 다 너무 귀엽다는 것이었다. 체르마트는 청정마을이라 내연기관 자동차는 올 수가 없고 전기차만 허용된다고 한다. 그래서 택시, 버스, 트럭, 심지어는 레미콘이나 공사용 덤프트럭까지 모두 귀여운 미니 전기자동차였다. 레미콘이 작다 보니 일부 공사 현장에는 레미콘이 10대 가까이 서있는 것도 봤는데 너무 귀여웠다. 지나가는 버스에는 잘해야 4~5명 정도의 사람만 구겨져 타고 있었다.


체르마트 어딜가도 보이는 귀여운 전기 자동차들
수네가로 가는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찍은 마터호른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수네가로 올라갔다. 수네가에 올라 마터호른을 바라보니 또 새로웠다. 후에 보게 될 스위스의 또 다른 유명한 산인 아이거(Eiger)는 거대하고, 웅장하고, 든든한 느낌이 강했다. 남자 연예인으로 치면 마동석 같은 느낌. 반면 마터호른은 날렵하고, 세련되고, 용맹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강했다. 남자 연예인으로 치면 차은우 같은 느낌이랄까..


수네가에서 바라본 마터호른. 신기할 정도로 구름이 없는 날이었다.
수네가에서 찍은 마터호른


우리는 열심히 사진을 찍고 슈틸리제에 가기 위해 또 한 번 케이블카를 탔다. 블라우헤르트(Blauherd) 곤돌라 정거장에서 내린 우리는 이정표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듣기로는 길이 꽤 험하다고 했는데 그렇지가 않아서 우리는 의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돌이 많아지면서 길이 험해졌다. '이래서 험하다고 한 거구나..'.


나 5대가 덕을 쌓았나..?


트레킹 코스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뒤만 돌아보면 마터호른이 보였다. 가는 중간중간 서로 사진과 영상을 찍어주다 보니 슈틸리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슈틸리제로 내려가는 진입로 근처 바위 위에는 작은 돌을 쌓아 만든 귀여운 탑이 여럿 있었다. 왠지 동양인들이 이 돌탑과 마터호른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을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도착하니 한쪽 구석에서 포클레인이 공사를 하고 있었다. 사실 전날 이미 현재 공사 중이라는 사실을 오픈카톡방에서 듣고 굉장히 걱정을 했는데, 또 다른 분께 문의하니 사진 찍을 때는 보이지 않는 각도라고 해서 안심하고 있긴 했다.


포토스팟으로 가는 길에 뒤를 돌아 조금씩 호수에 비치기 시작하는 마터호른을 계속 사진으로 찍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호수에 완벽하게 반사되기 위해서는 바람도 세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이미 날씨앱으로 풍속도 봐 둔 상태였는데, 오늘 바람도 굉장히 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완벽한 반영을 볼 수 있었다. 여행 기간에 마테호른에 구름이 끼지 않은 맑은 날씨가 있을 확률, 그날이 딱 마테호른을 보러 가는 날일 확률, 그리고 슈틸리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바람이 약하게 불 확률. 이를 모두 만족시켜서 이렇게 완벽한 반영을 볼 확률은 매우 낮지 않을까. 우리는 운이 정말 좋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우리는 3대가 덕을 쌓은 게 아니라 최소한 5대는 덕을 쌓은 게 아닐까?


포토스팟에서 다양한 사진을 찍고 나서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마터호른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다. 마터호른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와..' 하는 감탄과 어이가 없다는듯한 웃음이 절로 나올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블라우헤르트에 올라가는 곤돌라 안에서 찍은 영상
좌: 슈틸리제 근처 쌓여진 돌탑, 우: 슈틸리제에 비친 마터호른
슈틸리제 포토존에서 찍은 사진
이번 여행에서 손꼽는 최고의 영상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스위스에서 어떤 산에 올라가도 개를 데리고 같이 온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해발 2,500m 정도의 슈틸리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숫가에서 물고기와 노는 강아지도 있었다. 이 정도 높이에 올라오면 보통 호흡이 가빠지고 심하면 호흡곤란이나 두통 등의 고산병 증세를 겪는 사람도 심심치 않은데 개들은 괜찮나 보다.


에메랄드 빛깔의 인공호수, 무스이예제


점심을 먹고 나니 바람이 강해진 것을 느꼈다. 포토스팟으로 다시 가보니 이제 아까와 같은 반영은 볼 수 없었다. 바람이 강해진 탓에 물결이 너무 많이 쳤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운이 참 좋았네요.' 안도감을 느끼며 다음 호수인 라이제(Leisee)를 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수네가로 내려갔다. 라이제는 너무 대공사를 하고 있었던 데다 크게 특별할 것이 없는 호수였기 때문에 빠르게 지나쳤다. 마지막으로 무스이예제(Moosjisee)로 향했다. 무스이예제는 5개의 호수 중 유일한 인공호수다. 물 색이 에메랄드 빛으로 예뻐서 유명한 호수다. 그런데 무스이예제로 가는 길은 꽤 멀고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갈 때는 내리막길이다 보니 올라올 때는 꽤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내려갈 때 마주친 올라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대부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순간 에메랄드 빛 호수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은 기쁨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힘든 것도 잊고 걸음이 빨라졌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모습을 드러낸 무스이예제


우리는 호수가 모습을 모두 드러내자마자 마치 지금이 아니면 이 풍경을 못 찍을 것처럼 분주하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후 호숫가로 내려가서 각자 호수와 마테호른이 조화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우리는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우리가 잠시 바위에 앉아 쉬고 있을 때 한국인으로 추측되는 아시아인 여자분이 우리와 호수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이때 우리는 이 분의 모습을 바라보며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저 여자분이 서있던 자리에 서있는 사진을 찍으면 아주 멋진 사진이 나오겠다!'


그 여자분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 우리는 번갈아서 그곳에 가서 서서 사진을 찍었다. 여기서 나는 인생샷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무스이예제에서 얻은 인생샷
한적하고 여유로운 무스이예제의 모습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갈 시간. 역시 무스이예제에 오는 길을 되돌아가는 것은 힘들었다. 육군 수색대를 나왔다는 룸메는, 평소에도 등산을 즐겨서인지 전혀 힘들지 않다고 했다. 앞으로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곤돌라를 타고 다시 체르마트 시내로 내려온 우리는 열차가 올 때까지 쿱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서 기념품을 사기로 했다. 오늘 저녁은 고기를 구워먹기로 해서 삼겹살과 상추를 사려고 했다. 삼겹살이 보이지 않아 목살처럼 생긴 부위를 구매하려던 찰나에 한쪽 구석에 또 다른 고기들이 비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 가보니 삼겹살이 딱 한 팩 남아있었고 우리는 이것을 사기로 했다. 나중에 숙소에서 삼겹살을 구울 때 알게 된 사실인데, 인터라켄에는 매일 '삼겹살 대란'이 있었다고 했다. 아침마다 COOP 마트에 있는 대부분의 삼겹살이 동이 난다는 것이다.


동행 분은 예전부터 체르마트에 가면 예쁘기로 알려진 Alpinte 사에서 제작한 마테호른 글라스 잔을 기념품샵에서 사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몇 개의 가게를 가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아무 데서나 파는 게 아니라 사이트에 공시된(https://en.alpinte.ch/shop) 제휴가 되어있는 오프라인 매장에서만 판매를 한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체르마트에서 숙소까지 가는데만 2시간가량이 소요되는데 이번 열차를 놓치면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기념품을 사는 것은 포기했다.

마터호른 글라스 (출처: https://en.alpinte.ch/product-page/on-the-rocks)

다시 기차를 타고 2시간가량을 달려 늦은 저녁 숙소에 도착하였고, 우리는 체르마트에서 산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딱 한 번 라면 끓인 것을 제외하고 항상 요리는 룸메가 해주었다. 나는 상추를 씻고 테이블을 세팅하는 역할을 맡았다. 인터라켄의 삼겹살 대란을 증명이라도 하듯, 룸메가 공용 주방에서 삼겹살을 굽고 있을 때 수많은 한국인들이 혹시 삼겹살을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해하며 질문해 왔다.

고기가 다 구워진 뒤 룸메가 한국에서 가져 온 쌈장과 함께 먹었는데 쌈장은 정말 치트키라고 느꼈다. 원래도 맛있는 삼겹살에 쌈장을 곁들이는 순간 맛은 곱절이 되었다. 우리 둘 다 쌈장의 위력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숙소로 오는 길에 알게 된 사실인데, 목과 귀까지 선크림을 열심히 발랐는데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낀 부분을 제외하고 얼굴이 모두 새까맣게 타서 뭔가 우스꽝스러웠다. 아침에만 바를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발랐어야 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환상적인 풍경을 마음껏 즐겨 만족스러운 나에게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일은 동행 분이 그린델발트에 묵고 있는 친구 분의 샬레(Chalet. 스위스 전통 가옥)에 놀러 가기로 했다고 해서 나는 혼자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내일은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날. 내일 구름이 많이 낀다는 소식에 일부러 서둘러 예약을 했다. 스카이다이빙은 구름이 조금 껴도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맑은 날은 다른 여행지를 위해 최대한 아껴두기 위함이었다. 나는 내일 아침 8시 30분에 픽업 차량에 탑승하기 위해 서둘러 잠을 청했다.


4일 차에 먹은 저녁. 모두가 부러워한 삼겹살도 맛있었지만 쌈장은 정말 맛 치트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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