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있는 파스타 1. 청양고추 브로콜리 두부 알리오 올리오
인생 첫 요리를 기억하시나요? 저마다 각자의 계기가 있겠지만 저의 경우엔 홀로 갇혀있던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하고 생각정리를 위한 생산적인 활동을 찾던 중 막연하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년 전, 서툰 표현 탓에 주변인들과의 관계 속에 어려움을 겪으며 갖은 푸념들이 머릿속을 맴돌던 그 무렵, 일상 속 도피처와 집중할 거리를 찾던 중 처음 요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요리가 가장 만만할까 고민하던 중 평소 즐겨 먹던 파스타, 그중 가장 기본이라 손꼽는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괜한 객기 속에 평범함을 거부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던 탓에 어딘가 삐딱한 한 그릇이 나왔습니다.
재료
마늘 12쪽, 청양고추 1개, 브로콜리 1/3개, 양파 1/2개, 삶은 계란 1개, 두부 반 모, 링귀니 1인분
올리브 오일과 마늘, 페퍼론치노 등 단순한 재료구성이 특징인 기존의 알리오 올리오와는 다소 다른 모습의
재료들이 나왔습니다.
페퍼론치노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탓에 청양고추면 알싸한 향미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삐딱한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맵기만 하면 속상한 기분이 더해질 것 같아 부드러운 맛을 떠올리며 두부를, 그리고 또 다른 담백함을 찾던 중 엉켜있는 제 머릿속을 닮은 브로콜리를 더하게 됐습니다.
조금은 답답해 보여도 포근한 느낌을 주는 삶은 계란은 덤으로 올려보았습니다.
4컷 레시피
1. 마늘 6쪽은 다지기, 나머지 6쪽과 청양고추는 편 썰기 하며 양파는 잘게 썰어줍니다.
2. 두부 반모와 브로콜리 1/3조각을 각각 뜨거운 물에 데친 후 키친타월을 통해 물기를 제거해 줍니다. 이후 잘게 썰어준 후 섞어 줍니다.
3. 8분가량 링귀니 면을 삶는 동안 올리브 오일로 코팅해둔 팬에 마늘·청양고추-양파 순으로 볶아주며 소금 반 스푼, 후추 한 스푼 정도로 미리 간을 맞춰줍니다. 면은 1L의 물에 소금 한 스푼을 넣어 삶아 줍니다.
4. 면이 익은 이후 올리브유로 볶은 채소들에 면과 약간의 면수와 올리브유를 곁들이고 이때 미리 준비해둔 두부와 브로콜리 또한 넣어주며 골고루 휘저어 섞어줍니다. 접시에 플레이팅 한 이후 고명으로 삶은 계란 반 개를 올려 마무리해줍니다.
사실 맛을 기대하고 만든 요리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저 잠시나마 잡념을 잊은 채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그 행위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한 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알싸하게 베인 마늘과 청양고추의 향을 부드러운 두부와 브로콜리가 감싸주는 듯한 그 파스타의 맛은 예상외로 조화로웠고, 극과 극의 성향을 지닌 재료들이 한 그릇 속에 사이좋게 어우러진 느낌이었습니다. 함께 곁들인 키위주스도 자칫 심심할 수 있는 파스타의 맛에 생기를 더해주었습니다.
함께해도 서로 다른 마음인듯한 관계에 지쳐있던, 그럼에도 애써 외면하며 부딪혀 볼 용기 한 번 내지 못했던 그 당시의 저와는 다른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진 않았을까 하는 늦은 후회가 떠올랐습니다.
그렇지만 요리에도 순서가 있듯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깨달은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빨리 서로 진솔하게 터놓고 대했다면 우리의 오늘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만 남았습니다.
그 이후로 틈틈이 메모를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홀로하는 고민에 너무 오래 갇혀 있지 않으려 하나하나 종이 속에 흘리고 정리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너무 늦기 전에 매 순간의 어려움과 마주하려 노력 중입니다.
평소 우유부단하고 추진력이 부족하던 저는, 요리를 통해 작은 생각의 전환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급해하지 않고 무언가를 새롭게 내 방식대로 만들어 가면서 엉킨 마음을 추스르고 일상 속 숨은 깨달음을 얻어가는 이 과정을 즐기게 됐습니다.
비록 어떠한 잣대에선 비전문적이란 비판을 피할 순 없겠지만 '잘하려고'가 아닌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취미생활을 통해 나만의 새로움을 만들고 찾아가는 성취감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년 전 해괴한 파스타가 건넨 포근한 맛의 위로 속에서 엉킨 생각의 고리를 차근히 풀어내던 그 날의 기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