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비건베이킹』을 읽고
그는 이끼로 엉덩이를 닦으라는 권유도, 당장 밖으로 나가 밭을 경작하라며 등을 떠밀지도 않는다. 자신처럼 살면 된다는 무책임한 말 대신 서랍을 열고 구멍 난 양말을 찾아 꿰매보라고 말할 뿐이다. 남은 털실로 올 풀린 스웨터를 짜깁고, 천가방의 터진 구멍은 자투리 원단으로 덧대면서 야금야금 시도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라세 씨는 웃음기를 섞어가며 조금도 진지하지 않은 얼굴로 알려주었다. 그제야 마음이 풀어진 나는 가족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좀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처음부터 이런 삶을 꿈꾼 건 아니라고, 결코 쉽지 않았다고 회상하는 마리아 씨의 말간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
『비건베이킹』p58
저는 교훈을 좋아해요. 성취감을 좋아하고, 어제보다 1mm라도 나아지는 느낌을 좋아하지요. 하다못해 지하철역 플랫폼, 공중화장실에 붙은 흔해빠진 글귀에도 뭉클할 때가 있습니다. 남몰래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다짐하지요. 그리고 이런 자신을 부끄러워 합니다.
작가님의 책에서는 언제나 제가 까무라칠 정도로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작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의 ‘귀여운 우동’ 할머니 이야기는 힘들 때마다 떠올리고 있지요. 이번에는 양말부터 꿰매보라는 핀란드 아저씨 이야기에 꽂혔습니다.(제 이야기 상자에 잘 넣어두었습니다.)
작가님. 작가님도 사실은 교훈을 좋아하시는 거죠! 작가님은 용기를 주는, 힘이 나는 이야기들을 수집하면서도 동시에 너무 힘이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해요. 작가님의 삶에서 힘빼기와 힘주기란 어떤 의미일까요? 작가님만의 힘빼기와 힘주기의 기술이 있을까요? 베이킹에서의 예시를 들어주셔도 좋고요.
이렇게 콕 짚어 주시니 저 또한 교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저는 성공한 사람들이 쓴 자기계발서보다 보통 사람들이 발휘하는 일상 기술에 보다 흥미를 느낍니다. 작가님의 책 <무리하지 않은 선에서>에 등장하는 생활의 지혜들처럼요. 다만 이런 지혜에 힘입어 갑자기 저의 능력치가 올라간다거나 삶이 획기적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양말처럼 인생을 교환/반품할 순 없으니 올이 풀릴 때마다 알뜰살뜰 수선해가며 살아야 하는데, 그때마다 생활의 지혜로부터 이런저런 도움을 받는 정도이지요. 스스로도 그것을 저 나름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일상 기술들을 습득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대신 그 과정에서 무엇이 되었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것만큼은 경계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매사 그런 태도를 유지해왔던 것 같기도 해요. 요즘 저는 운전과 수영을 배우고 있는데요, 능수능란하게 잘하고 싶다는 욕심은 거의 들지 않습니다. 저의 능력과 한계를 얕잡아 보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저는 제 인생이 재밌게 굴러가기를 바랄 뿐이고, 이런 제게 필요한 기술은 폭설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퀴에 체인을 장착할 수 있는 정도의 요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세상에는 의욕을 발휘할 수록 되려 헛발질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게 바로 저입니다.
나와 남편은 식습관이 꽤 달라서 각자 저녁을 차려 먹는다. 내 쪽에서 먼저 거절한 것이라 그가 식사를 챙겨주지 않는 것에 대해선 조금의 섭섭함도 없다. 오히려 나는 피곤할수록 더욱 요리에 집착하는 편이다. 괴로운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기대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서, 열심히 먹이고 위로한다. 줄곧 이런 태도를 뿌듯하게 여겨왔지만 사실 이제는 그마저도 잘 모르겠다. 어쩐지 그 사람은 뒷짐을 진 채 헛기침만 하는 외로운 노인으로 늙을 것 같기도 하다.
『비건베이킹』p109
결혼 15년차인 저는 지금껏 수없이 많은 이혼의 위기…를 지나 왔습니다. 때때로 이 남자와 아이를 키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안 맞는 인간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반대로 아이를 키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싸우고 힘들어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종종 했습니다. 작가님과 남편분을 만나뵈었을 때 조용조용, 도란도란 생활과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 또는 동지 같은 인상이 들었어요. 아이가 있는 저에게는 아이가 없이 오랫동안 함께 사는 부부의 삶이 미지의 세계입니다. 아이가 없는 두 분의 결혼 생활은 어떠한가요?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그 실존적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또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사실 저와 남편은 결혼에 몹시 회의적이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 서로를 미워하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배경 때문인지 가정을 이루기보다 제 몸 하나 잘 건사하고 살자는 주의였지요. 그런 두 사람이 만나 법적인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건 4년간의 적응 기간 덕분이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저희는 결혼 전부터 꽤 긴 시간을 함께 살았는데 그 시간의 대부분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실패하고, 체념하는 데 썼습니다. 하다못해 행거에 옷걸이를 거는 방향 따위에 신경전을 벌이며 서로를 비난했지요. 물론 9년이 흐른 지금은 각자 자기 맘대로 옷걸이를 행거에 겁니다.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리차드 링클레어 감독의 영화 <비포 미드나잇>이 절로 떠오르네요. 비포 시리즈 중 저는 이 편을 가장 좋아합니다. 영화에는 어느덧 중년 부부가 된 두 사람이 한바탕 싸움을 벌인 뒤 노천 카페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와요. 아마도 줄리 델피였을 겁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앞으로 50년 동안 나를 견딜 수 있겠어?”라고 묻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남편에게 항상 묻고 싶은 질문이었거든요. 저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 서로를 견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저를 견뎌주어서 정말이지 고맙게 여기고 있어요. 견딘다는 표현이 다소 서글프게 들리려나요. 하지만 저는 서로 두 팔을 맞대고 견디는 힘과 균형, 애씀이 관계의 지속을 가능케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남편의 알 수 없는 면면을 견디는 그 일에 저는 기꺼이 참여하고 있어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저희 둘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년시절 내내 늘 ‘애들 때문에 버틴다’는 분위기를 감지하며 자랐거든요. 저의 결혼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이혼을 결정한 부모님을 지켜보며 그 의구심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섣부른 염려겠지만, 아이를 빌미삼아 버티는 일만큼은 맞닥트리고 싶지 않습니다. 두려워요. 작가님과 반대로 저야말로 아이와 함께하는 삶이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호기심은 여기까지일 뿐 저는 그 세계를 더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아이가 생기면 전에 없던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고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들 제게는 그것이 딱히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아이가 생기면 치맛바람깨나 나부끼는 학부모가 될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정말입니다.
유난히 자주 빵을 구운 지난겨울, 나는 글쓰기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심지어 겁나고 창피하기까지 했다. 이틀 동안 겨우 한 문단을 쓴 날도 있었다. 책상에 쌓여 있는 수십 권의 책과 내 글을 비교하다 보면 글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가 문제의 원인일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마저 들곤 했다. 불에 덴 사람처럼 별안간 마음이 뜨거워질 때마다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오븐이었다. 『비건베이킹』p148
전작인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에는 작가님의 잔잔한 작가 생활 분투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책을 읽을 때는 정말로 작가님이 분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매일 자리에 앉아 글을 쓰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비롯해 다음 책을 출간하기 위한 노력, 계속해서 작가로 살기 위한 노력 같은 것들이 치열하게 담겨 있었지요. 동료가 없었던 저에게는 작가님의 그런 고백이 정말로 큰 위안이 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너 어떻게 쓰니?” “난 이렇게 쓴다.” “나 이걸로 계속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내 이번 책 어땠어?” “니 이번 책은 정말 구렸어.” “너나 잘해.” 같은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기는 쉽지 않지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어떠신가요? 이번 책에서는 한결 여유가 느껴졌는데요, 요즘도 그렇게 성실히 글을 쓰시나요? 작가님이 열심히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가님의 원동력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몇 년 전, 전화 통화 중에 엄마의 폭탄 발언이 대뜸 날아든 적이 있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통화 중에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 중언부언하다 전화를 끊은 뒤 그야말로 서럽게 울고 말았어요. 그때 엄마가 제게 남긴 마지막 말이 두고두고 잊히지 않습니다. “신경쓰지 말고 넌 글 써라.” 다른 큰 뜻 없이 ‘넌 네 할 일이나 잘 챙겨라’ 정도의 의미였을 텐데, 당시에는 그보다 더 크게 부풀어진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무슨 영화 속 대사같더라고요. 동시에 언젠가 내가 이 순간을 글로 남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어딘가 튀는 장면, 상황을 목격할 때면 이걸 어떻게 이야기로 풀까라는 생각부터 듭니다. 단순히 직업병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런 류의 사고 회로를 가진 스스로가 자주 싫습니다. 넌덜머리가 나기도 하고요. 뭘 써보겠다고 나서는 그 마음이 부담스럽습니다. 아마도 이런 의문 때문일 겁니다. “네가 무슨 대단한 작가라도 된다고.” 저는 이렇게 자기비하로 가득찬 마음으로 매번 글을 시작합니다. 고백하고 보니 정말 피곤한 사람이구나 싶네요.
작가님께서 제 책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를 읽고 위안을 받으셨다 했지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특히 저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에 나오는 이 문장을 무척 좋아합니다. “글은 그냥 쓰면 된다. 누가 읽어주건 말건, 누가 좋아하건 말건 그건 다음 문제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 그게 그렇게 힘들면 안 하면 그만이다.” 제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뼈 아픈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원했어요. ‘와, 맞아. 안 하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하니 괜시리 쓰고 싶은 여유마저 생겼습니다. 앞에서 실컷 징징거린 탓에 멎쩍기는 하지만 저는 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글을 쓰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자신도 모르게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대문호는 아니지만 제게는 그런 막연한 믿음이 있습니다.
일기를 쓸 때 ‘오늘’은 반드시 피해야 할 단어 중 하나라고 배운 기억이 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오늘을 진하게 남겨두고 싶다. 새 다이어리를 펼쳐 “오늘은 보늬밤을 만들었다”라고 쓴다. 오늘 내게 가장 좋았던 것, 중요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비건베이킹』p50
대부분의 성실한 작가들이 그러하겠지만, 저 역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뻔한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언제나 지난번에 쓴 글보다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지난 책보다 못한 새 책을 쓰게 될까 두렵고, 점점 이상한 사람이, 못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에게 송은정 작가님은 매번 똑같은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야말로 성실파 작가라는 인상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다양한 표현이라든가 구성을 시도하려는 것이 눈에 보이지요. 그건 어쩌면 ‘아무도 몰라도 괜찮지만, 어제의 나보다 나아지고 싶다’ 의 느낌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더 신중하고 더 더딜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작가님에게 ‘아, 이렇게 쓰고 싶다’ 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동시에 ‘이렇게는 쓰지 말아야지’ 싶은 글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지도 궁금합니다.(모호하게나마…)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젠가는 이런 책을 쓰고 싶다’ 고 즐겁게 상상하고 계신 아이디어가 있다면 살짝 들려 주세요.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게 되는 질문이었습니다. 최근에 그런 책을 만났거든요. 사노 요코의 <친애하는 미스터 최>입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모든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제게는 이 책이 단연 일등이에요. “성냥팔이 소녀처럼 천국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다시 힘을 내서 팬티를 겹쳐 입고 셔츠도 찾아 입어 불행에서 벗어나야 하겠지요.” “잘 있어요. 끼니 거르지 마시고 영양도 챙기시고,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세요.” 다시 곱씹어봐도 지금의 저는 절대 쓸 수 없을 호쾌한 문장입니다. 티셔츠와 슬리퍼 차림으로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시시껄렁한 느낌도 좋습니다. 읽을 때마다 까무러치고 맙니다.
그런데 저를 매료시킨 문장은 여기 따로 있습니다. “저는 놀라고 무서워서 앵앵 울었지만 오줌이 계속 나오니 울면서 눠야 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저는 이 문장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누구의 입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감각과 경험에 의지해 글을 쓰는구나 싶었거든요. 저는 인용과 비유를 좋아하고 유용하게 사용하지만, 때로는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합니다. 용기가 없달까요. 눈치를 보느라 신뢰할 만한 누군가의 언어를 빌려오지 않고서는 제 의견을 펼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는 사노 요코의 말처럼 “깔보고 싶으면 깔보세요”의 태도를 밀고나가보고 싶습니다. (이것 보세요, 지금도 사노 요코의 문장을 빌려왔네요!) 반면 ‘이렇게는 쓰지 말아야지’ 하는 글이 있다면 글쎄요. 오줌을 오줌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글을 예로 들 수 있을 듯합니다. 예전에는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이리저리 에둘러 가는 미문을 좋아했는데요, 지금은 아룸다움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담백한 글에 감동합니다. 참, 마지막으로 덧붙여주신 질문에 대해서는 속내를 털어놓아도 될까요? 당분간은, 네, 당분간만큼은 마감에서 자유롭고 싶은 생각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