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비 내리는 오전, 먼 동네 조식 식당을 떠올리며
"엄마, 오늘은 도서관 개관 안 하는 월요일이야. 아침 늦게 먹자."
수강 과목 때문에 개학이 좀 늦어진데다 도서관도 노는 월요일이어서 게으름이 아주 당당한 연짱이는 양상추를 산처럼 넣어 만든 계란 샌드위치를 늦은 아침으로 먹자고. 커피는 내가 내려줄게.
"엄마, 써니 사이드 업 계란 후라이하고 곡물 빵하고 양상추, 토마토 냄새에 드립 커피 냄새가 어우러져서 우리집 부엌 아니고 시뽀 숙소 조식 식당 냄새 같아. 엄마하고 나하고 둘만 아침 먹던 시뽀 식당 냄새야."
"시뽀? 껄로 아니고?"
"시뽀든 껄로든 매일 아침 엄마하고 나하고 조식 식당 첫 입장자여서 식당에 우리 뿐이었고, 그래서 채소도 촉촉하고 신선했었고, 계란 후라이도 갓 해놔서 따뜻했었잖아. 식당이 갓 내린 커피 냄새로 가득했었고."
나는 기억의 많은 부분은 시각보다는 후각이나 청각에 기댄다고 믿는 편이다. 내게는 늘 해가 뜨기도 전에 아침을 여는 사람들의 부지런한 연기 냄새로 기억되는 미얀마 시뽀, 혹은 껄로. 특히 우기에 방문하였던 파인힐 껄로는 고도가 꽤 높고 산에 폭 싸여 있는 산골 마을인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맑고 투명한 주렴 같은 빗줄기가 내렸다 개었다를 반복하는 변덕스러운 날씨와 내린 비로 한 뼘씩 자라나 파들거리던 풀냄새와 어디를 가든 소나무 향 짙게 배어 있는 동네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00년대 후반 판매종료된 필립 베넷 향수 냄새. 내게 '크릿(CRETE)' 집의 단정하고 잘 마른 나무 판재 바닥과 도서관 단행본과 필립 베넷은 '동후어'이다. 그런 단어가 있다면. 비 흔한 한여름날 파삭한 공기와 나무 바닥 집과 책 넘김이 편한 단행본 도서와 잘 다린 셔츠 같던 필립 베넷. 단 한 번의 오류 조차 없는 필연적 연동이어서 내게 기억과 후각은 당연한 한 쌍, 혹은 오목조목한 하나의 보따리이다. 느긋하고 단정한 필립 베넷과 젖은 길 가장자리의 짙고 무성한 풀냄새와 새벽 연기의 근면성실한 냄새. 모자람없이 행복하였던 기억의 향이다.
"엄마가 행복해하니까 한 잔 더 내려줄게. 토마토하고 초코 과자도."
오늘, 인심 쓴 연짱이가 내려준 콜롬비아 원두 커피향과 동그란 토마토 향, 초코 과자의 냄새 역시 늦은 여름날 내리는 오후 비 냄새와 동후어로 내 기억 한 켠에 저장될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내년, 후년, 혹은 더 먼 늦여름의 비 내려 서늘한 어떤 오후, 어딘가에서 갓 내린 커피 냄새를 맡는다면, 통통한 손으로 향긋하게 내린 커피를 내어주던 연짱이와 흐리고 시원한 늦여름 오후의 비 냄새를 떠올리겠지.
내가 지금 가난하든 부유하든, 행복은 그저, 주어진 그 순간의 반짝임을 누리면 바로 깨달아지는 것인가 보다. 아, 요즘 한창 삐딱해진 내가 이런 뻔한 맺음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