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비건, 그 세 번째 이야기
<당당한 비건> : 시즌 1의 메인 키워드이자 주제는 ‘당당한 비건’입니다. 친구이자 소비자, 시민 등 다양한 주체로 살아가는 비건 지향인들이 삶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가져야 할 ‘당당함'을 고민합니다.
저는 새로운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좋아하는 걸 보고 또 보는 편이에요. 아무리 유명해도 끌리지 않으면 보지 않거나, 뒤늦게서야 보는 편이죠. 최근 에미상을 휩쓴 화제작 <오징어 게임>도, 두 번 세 번 봐야 한다며 모두의 추천을 받은 영화 <헤어질 결심>과 <기생충> 모두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적고 보니 왠지 부끄럽네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마찬가지였어요. 드라마 내용을 둘러싸고 진지한 논의들이 쏟아지는 걸 보면서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늘 그렇듯 생각에서 그쳤죠.
그러던 어느 날, SNS에서 우연히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게 됐어요. 클로즈업된 화면 속에서 “비건식 추가 가능한가요"라는 글을 보자마자 제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죠. ‘아닛, 내가 드라마에서 비건식이라는 단어를 보다니?’ 약간의 흥미가 생겨 포털 사이트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검색해봤어요. 그런데 글쎄, 우영우가 돌고래 해방 시위를 하고 있더라고요. ‘대체 이 드라마는 뭘까?’ 하고 단숨에 호기심이 가득해졌죠. 이런 이유로, 모두가 종방을 선언했을 때 저는 그제야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요. 오늘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우영우'라는 인물을 비건지향인의 관점에서 본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만큼, 여러분의 해석과 의견을 환영해요)
※ 본 기사에 사용된 이미지와 영상은 저작권법 제28조에 따라 인용하였습니다.
“고래에게 수족관은 감옥입니다. 좁은 수조에 갇혀 냉동생선만 먹으며 휴일도 없이 1년 내내 쇼를 해야 하는 노예제도예요. 평균 수명이 40년인 돌고래들이 수족관에서는 겨우 4년밖에 살지 못합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아시겠습니까?”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4화 중
‘우영우’를 검색하면 연관검색어에 ‘돌고래’가 나올 만큼, 우영우의 돌고래 사랑은 드라마를 본 적 없는 저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데요. 사실 미디어에서 동물이 소비되는 것에는 이 글에서 어느 정도 저희의 생각을 담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려스러웠는데, 막상 드라마를 보니 돌고래를 대하는 우영우의 태도에서 오히려 배울 점이 있다고 느껴졌어요.
우영우는 고래 이야기를 할 때 누구보다 당당하고 생기가 넘쳐요. 수족관에 오랜 시간 있었던 범고래의 지느러미는 옆으로 휘어져 있다는 것. 야생방사 후 세계 최초로 야생 번식에 성공한 것이 확인된 돌고래가 ‘삼팔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등지느러미에 ‘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는 것 등등. 제가 몰랐던 사실을 우영우를 통해 꽤 많이 알게 되어 상당히 놀랐습니다.
또 우영우는 고래가 싫어할만한 행동을 결코 하지 않아요. 제주도에 가서도 배를 타지 않고 멀리서 망원경으로 남방큰돌고래를 기다리죠(선박 관광은 지느러미가 다칠 수도 있고, 돌고래가 스트레스를 받는대요). 그 밖에도 썸 타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는 날에 플로깅을 한다던지, 돌고래 해방 시위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영우는 비건지향인일까?’ 하고 혼자만의 재미있는 상상을 하기도 했답니다. 우영우만의 비건적 태도와 사랑이 느껴졌어요.
생각해보니 저는 동물권에 관한 책은 읽지만, 동물에 관한 책은 읽지 않았더라고요. 저도 그를 따라서 비인간동물을 잘 아는 비건지향인이 되고 싶어졌어요. 그들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알면 내가 그들을 더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비거니즘은 살림이고, 살림은 곧 사랑이라는 글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답니다.
*드라마에서는 삼팔이, 춘삼이, 복순이 등 남방큰돌고래에 관한 이야기가 꽤 나오는데요. 관련해서 최재천의 아마존 영상과 남종영 기자의 저서 《잘 있어, 생선은 고마웠어》는 돌고래를 비롯한 물살이, 나아가 동물과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에요. 따로 봐도 좋고, 드라마와 함께 보면 더 좋답니다! (+벨루가와 더불어 돌고래와 수족관 이야기를 다룬 이엪지의 글은 여기서 볼 수 있어요.)
“80년 전만 해도 자폐는 살 가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지금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의대생이 죽고 자폐인이 살면 국가적 손실’이란 글에 ‘좋아요’를 누릅니다. 그게 우리가 짊어진 이 장애의 무게입니다."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3화 중
전에 영화 <어른이 되면>을 리뷰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장애를 장애로 만드는 건 결국 비장애중심적 시선이 아닐까 싶어요. “너 결정장애야?”라는 말이 장애를 결여와 하지 못함, 능력 없음의 상징으로 만드는 것처럼요. 관대할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거죠.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와요. 우영우와 그의 직장 동료인 준호가 함께 길을 걷던 중, 준호의 후배가 그를 보고 “오빠 아직도 봉사하는구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요(심지어 우영우가 바로 옆에 있는데!). 우영우가 비장애인이었다면 결코 듣지 않았을 말이라는 점에서, 이 사회가 얼마나 비장애중심적인지를 체감했어요.
또 위 장면을 비거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중심주의’라는 키워드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의대생이 죽고 자폐인이 살면 국가적 손실이 된다’는 말을 듣고 살처분이 떠올랐거든요. 공장식 축산에서는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동물이 죽고 병에 걸린 동물이 살면 국가적 손실이 되잖아요. 나중에는 축사 내 모든 동물을 인간의 편리에 따라 살처분하고요. 주류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소수 집단의 가치가 매겨진다는 점에서 비슷함을 느꼈던 거 같아요.
한국이 반려동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예요. 고양이는 개보다 신경을 덜 써도 된다느니, 웰시코기는 귀엽고 리트리버는 순하다느니 하는 말들이 그 예죠. 손이 많이 간다거나 울음소리가 우렁찬 고양이들의 경우, ‘이렇게 손이 많이 갈 줄 몰랐다’며 파양 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해요. 장애를 가진 동물은 더더욱 파양 되거나 유기될 확률이 정말 높고요. 여러모로 비장애/인간중심적 사회에 대해서 골똘해진 장면이었습니다.
"좌절해야 한다면 저 혼자서 오롯이 좌절하고 싶습니다. 전 어른이잖아요. 아버지가 제 삶에 끼어들어서 좌절까지 대신 막아주는 건 싫습니다. 하지 마세요."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7화 중
장애해방 운동가이자 동물해방 운동가이기도 한 수나우라 테일러는, 저서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이런 말을 해요.
"의존은 종종 착취의 구실이 되는데, 이는 의존이 극히 부정적인 함의를 갖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의존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의존적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끝낼 것이다.” - 352p, <짐을 끄는 짐승들> 중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우영우라는 인물이 가진 의존성을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유명한 명대사, ‘봄날의 햇살 최수연’ 장면에서는 우영우가 로스쿨 시절 최수연에게서 받았던 돌봄을 인지하고 있고 그것에 감사하다는 표현을 했죠.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로스쿨 다닐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 바뀐 시험 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그간 제가 미디어에서 봤던 장애 서사에서 장애인은, 하나부터 열까지 돌봐야 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모습이 무능력한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우영우는 주변 인물들과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보이더라고요. 설령 우영우가 돌봄을 받는다 해도, 그게 장애 때문이 아니라 그저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시민이기에 돌봄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장면이었어요.
비인간동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무리 의존적이라 한들, 자립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라는 거죠(반대도 마찬가지!). 공장식 축산을 없애자는 말에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해요. "당장 공장식 축산이 사라지면 그 시스템에 길들여진 동물들은 어떡해? 오랜 시간 사료를 받아먹어온 가축들은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실제로 제돌이를 비롯한 남방큰돌고래를 야생방사할 때, 동물원 측에서 이런 식으로 반대했다고 해요. 10여 년 가까이 길들여진 돌고래들이 바다로 나갈 경우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입장이었죠. 하지만 우영우가 아버지에게 ‘오롯이 좌절하고 싶다'라고 말한 것처럼, 돌고래도 식사를 거부하는 등 나름의 저항과 의사 표현을 해요. 설령 자립이 어렵고 인간에게 의존적이라 해도, 그것이 제돌이가 수족관에서 계속 쇼를 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는 거죠.
이 드라마는 채식을 독려한다거나, 비건 제품을 쓴다거나 동물권에 관련된 내용이 나오진 않아요. 언뜻 보면 ‘에이, 비거니즘 포인트가 어디 있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죠. 그런데 저는 우리가 ‘비거니즘’이라는 합의된 단어를 쓰고 있을 뿐, 그 안에서 저마다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문장 속 빈칸에 여러분의 답을 채운 적이 있으신가요? 누군가는 “비거니즘은 살림이다”라고 하고요, 또 다른 누군가는 “비거니즘은 흙이다”라고들 합니다. 아마도 우영우라면 왠지 ‘고래'를 답할 것 같고요. 그 밖에도 사랑, 연대, 해방, 다양성 등 다양한 단어와 교차해 볼 수 있겠죠.
저한테 비거니즘은 돌봄이에요. 개인에서 나아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문제와 맞닿는 일이기 때문에 서로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인지 드라마를 보면서 우영우뿐만 아니라 최수연, 권민우, 동그라미 등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의 능력으로 상호의존하는 모습에서 비거니즘을 느꼈던 거 같아요.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 수나우라 테일러는 이러한 교차성을 강조하는데요. 그는 "겉보기에 무관한 다양한 억압들이 사실은 서로 얽혀 있으며 따라서 해방의 길 역시 이어져 있다"라고 말해요. 실은 저도 두 번째 장면과 세 번째 장면을 통해 장애인과 동물이 억압받는 구조를 교차해서 말했는데, 눈치채셨나요?
결국 당당한 비건이 된다는 건, 나의 빈칸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그 빈칸은 꼭 명사가 아니어도 되고요. 비거니즘을 끊임없이 실패해도 계속해야 할 나만의 이유를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모쪼록 여러분이 비거니즘에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원하는 삶, 지향하는 삶이 있다면 추구해 나가세요! 이것만은 놓치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세요!
“책에서 얻은 배움을 일상의 삶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거니즘’은 그런 실천의 한 가지 이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에서 떠올리는 바는 제각기 매우 다를 것이다. 과연 우리는 비거니즘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볼 수 있을까? 비거니즘을 상상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비거니즘에 대한 더 나은 상상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들을 독자들과 나눠보고 싶다.” - 418p, <짐을 끄는 짐승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