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비건, 그 네 번째 이야기
<당당한 비건> : 시즌 1의 메인 키워드이자 주제는 ‘당당한 비건’입니다. 친구이자 소비자, 시민 등 다양한 주체로 살아가는 비건 지향인들이 삶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가져야 할 ‘당당함'을 고민합니다.
요즘 전보다 일상생활에서 ‘비건’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고 느껴요. 비건 식품을 취급하는 마트가 늘어나고 있고, ‘비건 뷰티’, ‘비건 영양제’ 등의 키워드를 활용한 광고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죠.
‘비건’이라는 이름이 붙은 행사의 빈도 수가 크게 늘기도 했어요. 지난 7월에는 코엑스에서 비건 페어가 열렸죠. 저에겐 정말 천국과 다름없는 공간이었어요. 맛있다고 소문났지만 동네 마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제품부터, 초면이지만 시식하고 반해버린 제품까지. 마침 월급날이겠다, 집도 가깝겠다. 잔뜩 신이 난 저는 이것저것 쓸어 담기 시작했어요.
당시 제가 샀던 제품 중에는 '마늘잼'도 있었는데요. 제가 워낙 마늘을 좋아해서 그날 저녁에 바로 빵에 발라서 맛있게 먹었어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저는 SNS에서 충격적인 글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잔 마늘잼이 우유가 들어간 논비건 제품이었던 거예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사면서 받아온 팜플렛을 다시 살펴봤는데, ‘1등급 우유와 동물성 크림’이라는 말이 자랑스럽게 적혀있더라고요.
‘어떻게 이럴 수가..’하는 배신감과 ‘왜 이걸 발견하지 못한 거지?’하는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제가 구매한 논비건 제품은 이게 끝이 아니었어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구매한 고체 치약 성분표를 봤는데 거짓말처럼 '프로폴리스'가 적혀있더라고요.
(*프로폴리스는 벌집의 향균, 향염을 위해 꿀벌이 식물의 수지에 자신의 효소를 섞어 벌집 출입구에 발라놓은 것으로, 꿀과 유사한 이유로 논비건에 해당됩니다.)
당시 아직 비건페어가 진행 중이었는데, 마늘잼 문제는 다른 분의 제보로 해결되었지만 그 고체 치약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어요. 바로 찾아가서 부스에 문의했더니 ‘비건 페어라고 비건 제품만 판매하는 건 아니다’라는 황당한 답변을 듣고 환불도 받지 못했어요. 고객센터 측은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지만, 제가 행사장을 나가기 전까지 치약은 버젓이 매대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비건의 탈을 쓴 논비건 행사는 사실 역사가 꽤 깊어요. 논비건 제품 없이 진행된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죠. 저는 지난 2월 개최된 비건페스타로 비건 행사를 처음 접했기 때문에 당시의 논비건 이슈를 단순 해프닝이라고 생각하고 '저번에 그런 일 있었으니 이젠 더 조심하겠지?' 하며 마음껏 소비했던 거예요. 위에서 말했듯 ‘여기가 바로 천국’이라고 느끼면서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듯, 저는 행복했던 만큼 큰 분노를 느꼈어요. 분명 저처럼 많은 분들이 이 고질적인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안전하다는 믿음으로 소비할 텐데,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혹시나 자책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죠.
그래서 한 달 뒤인 8월 비건페스타는 단순 소비자가 아닌 '비밀 모니터링단'으로 다녀왔습니다. 모든 부스를 돌아다니며 성분표를 확인하고 담당자분께 비건 여부를 여쭤보다가 논비건 제품이 발견되면 트위터에 이를 알렸어요. 저희가 모든 논비건 이슈를 잡아낼 수는 없었겠지만 누군가 저처럼 논비건 제품을 비건인 줄 알고 소비하는 불상사를 최대한 막고 싶었어요. 모든 제품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느라 행사를 즐기기 어려웠고, ‘이걸 왜 주최 측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목소리를 내야 변화가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죠. 그게 이엪지가 말하는 ‘당당한 비건’의 태도이기도 하고요.
참고로 그 날 저희는 적발 2건, 제보 2건으로 총 4건의 논비건 이슈를 발견했어요. 어떤 부스에서는 새싹보리분말을 팔고 있었는데 시음은 우유로만 가능했고, 또 다른 부스에서는 계내금이라는 논비건 원료가 들어간 영양제를 팔고 있었죠. 내심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길 빌었는데… 뿌듯했지만 씁쓸했습니다.
논비건중심사회에서 비건은 소비할 수 있는 제품이 많지 않아 일상적인 불편을 겪고 있고, 이게 정말 비건이 맞는지 잘 모르는 찝찝한 상태로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그런 비건이 ‘비건을 위한 행사’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하다는 현실이 참 안타까워요. 행사장 안에 논비건 제품이 존재하는 이상 이 행사에 '비건'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차라리 채식페어, 채식페스타라고 하면 안되는 걸까요?
비건 행사는 논비건에게 비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긍정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고마운 자리이고, 앞으로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비건을 단순히 상업적으로만 보는 시선은 어쩔 수 없이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비건 행사에 논비건 이슈가 자꾸 발생하는 것은 그런 제품을 가지고 온 부스 측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사전에 엄격하게 검열하지 않은 주최 측의 문제일까요? 비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행사에 참여한 부스 측의 잘못도 있지만,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 데에는 분명 주최 측에도 책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의 비건 행사는 지금보다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까요? 검열과 불안의 연속인 일상을 보내는 비건들이 잠시나마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비건이라는 이름을 어지럽히지 않는, 그런 공간만이 만들어지는 날이 오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