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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her Schipper Feb 08. 2023

그뢴룬드-니수넨, 료지 이케다, 카렐 쿠리스마

베를린 전시 소개


에스더 쉬퍼는 2023년 1월 20일부터 2월 25일까지 그뢴룬드-니수넨, 료지 이케다, 그리고 카렐 쿠리스마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전시는 두 섹션으로 나눠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갤러리의 메인 공간은 그뢴룬드-니수넨과 료지 이케다의 작품들로, 그리고 북스토어 공간은 카렐 쿠리스마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뢴룬드-니수넨 Grönlund-Nisunen


핀란드 출신의 토미 그뢴룬드(Tommi Grönlund)와 페테리 니수넨(Petteri Nisunen)은1993년부터 그뢴룬드-니수넨 이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 함께 활동해 왔습니다. 특히, 건축공학,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것을 바탕으로, 중력, 자기력, 방사선과 같은 모티프들을 중심으로 인간과 공간을 둘러싼 건축적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즉, 그뢴룬드-니수넨의 작업은 예술, 디자인, 건축, 과학 등 서로 다른 다양한 분야를 융합하는 학제적 접근으로, 단순한 오브제의 사용과 같은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빛과 소리와 같은 비물질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다양한 재료와 기술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물이나 공기와 같은 액체나 기체 형태는 그뢴룬드-니수넨의 작업에서 시간, 압력, 전류, 에너지로 치환되고, 빛과 소리는 전자파와 음파로 치환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적 과정은 주문 제작 또는 사전 제작된 산업 재료로 실행되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간결함은 그들 작품의 핵심으로 이끄는 촉발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Grönlund-Nisunen, Scattered Horizon, 2023. Esther Schipper, Berlin (2023)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인 <Sacttered Horizon>(2023)은 어두운 전시 공간의 벽을 따라 경미하게 흔들리는 붉은 레이저 광선이 지평선을 그려 시각적 간결함을 연출합니다. 그리고 이 간결한 지평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용히 진동하며 세 개의 선으로 변형되었다가, 하나의 선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레이저 광선과 더불어 음향 요소로 작동하는 세 개의 사인파(sine wave) 톤은 관객에게 낮은 주파수의 진동을 전달함으로써, 또 다른 물리적인 감각을 더해줍니다. 따라서, 관객은 이 작품을 “봤다”고 말할 수 없고, “경험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간결한 빛과 소리로 관객을 에워싸고(immersive), 눈에 보이고(visible), 들리고(audible), 감촉적인(palpable) 방식 즉, 다감각적인 경험으로 관객을 개입시키기 때문입니다.


Grönlund-Nisunen, Scattered Horizon, 2023. Esther Schipper, Berlin (2023)


<Sacttered Horizon(흩어진 지평선)>이라는 작품명에서 암시하듯, 지평선은 더 이상 하나의 고정된 절대적, 일반화된 물리적 자연 현상이 아니라, 경험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여러 개로 ‘흩어지며’ 변형되며, 관객의 신체적 존재와 감정적 반응을 조용히 환기할 수 있도록 이끄는 하나의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중력, 자기력, 방사선과 같은 물리학적 힘으로 이루어진 자연 공간과 그 안에 존재하며 능동적으로 경험하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재해석하는 그뢴룬드-니수넨의 핵심적인 작품 세계관을 관통합니다.



료지 이케다Ryoji Ikeda


관객은 그뢴룬드-니수넨의 흩어지는 지평선들의 빛과 소리를 지나,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음악 작곡가이자 시각예술가인 료지 이케다의 작품 <Point of No Return>(2018)이 생성하는 또 다른 빛과 소리를 마주합니다. 료지 이케다의 음악과 시각예술은 그것을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들을 탐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음악에서는 사인파 톤(Sine wave)과 노이즈와 같은 다양한 ‘날 것(raw)’상태의 소리(sound) 그 자체를 다루고, 종종 인간의 청각 범위의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주파수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시각예술에 있어서도 시각예술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단위를 ‘빛’으로 보고, 빛 그 자체의 시각적 특성을 탐구합니다. 이러한 작업 세계관은 수학적 미학에 준거합니다. 그리고 빛과 소리라는 두 근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몰입형 라이브 퍼포먼스(immersive live performance) 및 설치작업으로 구조화합니다.


Ryoji Ikeda, point of no return, 2018. Esther Schipper, Berlin (2023)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Point of No Return> 역시 동일한 세계관 안에서 작동합니다. 이 작품은 물리적 지지체로서 정사각형 벽의 앞면과 뒷면에 빛을 투사합니다. 벽의 한쪽 면은 극장의 강력한 스포트라이트처럼, 빛이 닿는 면만이 하얀 원형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벽의 다른 한쪽면은 컴퓨터로 생성된 영상으로서, 검은 원형이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그 패턴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작품 제목은 물질이 더 이상 블랙홀의 중력을 벗어날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에 있는 점, 즉 돌이킬 수 없는 지점(Point of No Return)을 정의하는 천체 물리학 용어에서 따왔습니다. 되돌아가는 것은 위험하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어렵거나,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므로 자신의 현재 행동 방침을 계속 해야 하는 지점을 의미합니다. 한쪽 면에서는 고정된 환한 빛, 다른 한쪽 면에서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관객의 감각을 양극단으로 자극함으로써, 그러한 극단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상상력을 유도합니다.


Ryoji Ikeda, point of no return, 2018. Esther Schipper, Berlin (2023)


Ryoji Ikeda, point of no return, 2018. Esther Schipper, Berlin (2023)


카렐 쿠리스마Kaarel Kurismaa


그뢴룬드-니수넨과 료지 이케다의 빛과 소리의 공간을 지나, 북스토어 공간으로 이동하면, 에스토니아의 사운드아트와 설치예술에서 선구적인 인물인 카렐 쿠리스마의 작품 다섯 점을 마주합니다. 카렐 쿠리스마의 작업은 회화, 애니메이션, 공공미술, 무대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감성으로 풀어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1950년대 후반, 학업을 마친 후, 백화점에서 장식예술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비주얼 디렉터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시절의 경험은 많은 기성 재료와 방식들을 접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1966년 에스토니아 미술사 최초로 키네틱 아트 작업을 하고, 이후 1970년대 팝 아트의 영향을 받아 기성품을 결합하고 재사용하는 방식으로 작업 세계를 확장합니다. 그러나 작가의 레디메이드 작업은 단순히 팝아트를 수용했다기보다, 소비재를 자유롭게 거래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당시 에스토니아의 역사적 상황 즉, 에스토니아가 구소련의 연방국 중 하나였다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작업에 나타나는 파스텔 톤의 색채와 장난스러운 형태 및 움직임들은, 소련이라는 어두운 체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감정적 절박함을 역설적으로 연상하게 합니다.


Exhibition view: Kaarel Kurismaa, Esther Schipper, Berlin (2023)


Kaarel Kurismaa, Light Object 134B, 2013, metal, glass, light fixtures, 143 x 58 x 58 cm.


Detail: Kaarel Kurismaa, Light Object 134B, 2013, metal, glass, light fixtures, 143 x 58 x 58 cm.


밝은 색채, 과하게 키워진 크기, 그리고 장난스러운 모습의 <LIGHT OBJECT 134B>(2013)는 언뜻 보면 포스트 모던 디자인의 오브제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분명 전등갓으로 보였던 빛나는 두 물체는 더 이상 그것이 아닌 것 같고, 조명의 스탠드를 고정하는 작고 둥근 디스크에서는 구식 타이머의 손잡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련된 레디메이드 디자인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요소들을 더함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유머러스하면서도 기발하게 비틀어냅니다. 이와 유사하게 <TIMERS>(2016) 연작은 세련되고 미니멀한 디자인의 평면 작업 같아 보이지만, 가운데에 구식 타이머 다이얼이 똑딱 소리를 내며 돌아갑니다.


Kaarel Kurismaa, A Timer, 2016, ready-made, wood, 90 x 90 x 7 cm.


<GREEN WIND (MOBILE I)>(1986)는 레디메이드 찬장에 작은 부속품을 부착시켜 회전시키는 키네틱 아트 작품입니다. 바람을 일으키기에는 턱없이 작고 약해 보이는 이 작품은 <푸른 바람>이라는 제목과 상반되어 반전의 재미를 유발하고, 하찮은 회전이지만 그것의 형태적 디테일은 쓸데없이 정교하다는 점에서 블랙 코미디와 같은 연출이 돋보입니다. 이처럼 상충하는 형식과 내용을 통해 상상력을 자극하고 생기있는 작품은 카렐 쿠리스마 작업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Kaarel Kurismaa, Green Wind (Mobile I), 1986, ready-made, metal, electronics, 81 x 82,5 x 35,7 cm.


한편 카렐 쿠리스마는 소리를 사용하는 작업을 펼치기도 합니다. <RINGING GREY>(2022)의 경우, 구 소련 시절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벨을 변형시킨 작품입니다. 이 키네틱 작품에서는 간헐적으로 소리가 납니다. 또한 <A GROWLER>(1993)는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나는데, 작품 속 램프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빛이 나는 작업입니다. 카렐 쿠리스마의 작업에서 소리는 단순히 음향적 효과가 아닌 에스토니아의 역사적 맥락과 관계된 발화로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Kaarel Kurismaa, Ringing Grey 2, 2022, ready-made, electronics, metal, wood, 43 x 43 x 10 cm.


Kaarel Kurismaa, A Growler, 1993, ready-made, plastic, electronics, light, sound, 173 x 50 x 50 cm.


글쓴이: 이채원 (Digital Humanities, University of Cologne)

Photos: © Andrea Rosse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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