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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가 권서경 Jun 05. 2023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않을 겁니다.”

뮤지컬 <쁠라테로> 관극 후기

기억을 담는 매개가 있다. 나에겐 향기, 소리, 시간이 그렇다. 뮤지컬 <쁠라테로>에서는 시와 음식과 플라멩코가 인물 간의 기억을 잇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숙소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까밀라와, 기억 속 인물인 까밀라를 찾기 위해 딸 마리아와 함께 순례길에 오른 호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언뜻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다. 그리고 까밀라의 곁을 맴돌며 그의 기억을 부추기는 젊은 여인 페넬로페는 둘 사이에 있었던 어떤 사건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죽음을 앞두고 그리운 옛사랑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일까. 안일한 추측은 클라이맥스에 다달았을 때 뒤엎어졌다.

이야기의 무대가 된 스페인은 우리와 닮은 역사를 지닌다. 군부독재와 민주화 운동이라는 뼈아픈 역사가 닮았다. 몸소 겪어보지 않은 소재에 공감하기 어렵다는 사람도 있겠으나, 시간을 조금만 되짚어보면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 우리에겐 아직 기억에 생생한 아픔이 있었다. 진실이 묻히고 세상에서 잊히길 바라는 이들이 있었다.
오늘의 나는 100년 전이든 10년 전이든 모든 시간을 통틀어 과거라 말하지만 당사자에겐 영원히 현재라는 사실을 누군가 일깨워주지 않으면 자꾸만 망각하고 만다. <쁠라테로>는 그걸 일깨우는 극이다.
침묵이 넘치는 세상에서, 호세처럼 나중에나마 용서를 구하면 양반이라 해야 할까. 다만 호세가 까밀라에게 사죄하려는 건 지독히도 이기적인 이유에서다. 잊기 위해서. 단잠을 방해하는 악몽을 몰아내고 안식의 밤을 되찾기 위해서.
함께 시를 쓰고 플라멩코를 추던 그 시절을 기억해 내라며, 마치 젊은 날로 돌아간 듯 굽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정열적인 플라멩코를 선보이는 호세. 그리고 그에게서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려 하는 까밀라. 그들의 비극적인 대비는 극의 후반에 이르러서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다.
오랜 불면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설득 끝에 듣게 된 호세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인 내용이다. 현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인 세실리아와 파블로가 괴로워하는 것처럼 ‘알지 못했다’는 것을 변명으로 누군가에게 2차적 가해를 저질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극 전반 내내 함께 웃고 환호하던 객석마저 숙연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군인으로서 윗선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호세 역시 시대의 피해자라 해야 할까, 아니면 이유불문 가해자에 불과할까. 늘 각자의 입장 대립이 팽팽한 논란의 소재다. 자칫 전쟁 범죄자에 대한 옹호의 여지를 줄 수 있는 마리아의 주장은 그러나 이어지는 세실리아의 대사로 깔끔하게 불식된다.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게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하지 않는 건 죄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죄!”

공교롭게도 얼마 전 쓴 글이 기억과 망각에 관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해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그 기억을 잊지 못한 까밀라는 평생을 괴로워함으로써 페넬로페에게 속죄하는 삶을 살아온 셈이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그는 망각이라는 축복을 얻어 모든 슬픔을 몰아내고 끝내 안식의 시간을 맞이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죄만큼은 잊지 않는다. “페넬로페를 잊으려 한 나 역시 죄인이지요, 당신과 같은.”
반면 호세는 일평생 평안하게 살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남은 인생을 시달리게 되고, 용서를 구하고자 어렵사리 찾은 사람에게 잊혀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를 기다림이라는 아집에 가둔다. “기다릴게요. 부디 당신 안의 당신을 만나실 그날까지.” 기억하는 것이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이란 것도 모른 채.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자신의 나머지 죄를 영원히 인정하지 않으며 말이다. 이런 태도에서마저 그들의 대조적인 인생이 고스란히 비친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점은 과연 까밀라는 용서받았는가에 대한 것이다. 페넬로페는 까밀라에게 “너를 원망한 적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까밀라의 망상 속 인물의 대사이며 실재하는 페넬로페의 말이 아니다. “침묵하는 법만 가르치는 선생들이 부끄러워 학교를 때려쳤다”던 까밀라는 막상 자신에게 일이 닥치자 두려움에 떨며 침묵함으로써 페넬로페를 외면했다. 결국 까밀라와 호세 양쪽 모두 상대에게 용서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가벼이 면죄부를 쥐어주지 않는다는 게 이 작품이 더욱 처절하고 진실되게 느껴지는 이유가 아닐까.
“살다 보니 다 잊혀지네요. 살다 보니 다 지워지네요.” 페넬로페가 묻힌 곳을 알고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기로 한 까밀라는 비로소 환하게 웃으며 불꽃처럼 뜨거운 플라멩코를 춘다. 그런 까밀라가 떠나는 호세에게 기꺼이 부엔 까미노를 외쳐주던 건 그의 어떤 앞날을 응원하기 위함이었을까. 나는 혹시라도 그게 호세의 짐을 덜어주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그걸 통해 보여주는 관용의 덕목이란 결국 수많은 까밀라들을 절망 속에 매장할 뿐이니까.

역사를 기반으로 한 작품인 만큼 속 시원한 권선징악은 아닐지언정, 현실은 그보다 참담하니 가해자의 손을 들어준 결말이 아니라는 점에 그나마 위안을 느끼며 극장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꿈같지 않은 결말이 캄캄한 현실을 다시금 조명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었던 호세가 마냥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은 건 일종의 사이렌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당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에게 가담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러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창작 초연임에도 훌륭한 각본과 음악, 베테랑 배우들의 노련함이 어우러진 보물 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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