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용 May 24. 2021

[역대 UEFA Euro Champion 리뷰] 3편

카테나치오로 재무장한 아주리 군단, 유로 우승으로 암흑기를 탈출을 알리다

UEFA Euro 1968 챔피언 이탈리아


개최지: 이탈리아

본선 대회 기간: 1968년 6월 5일 ~ 1968년 6월 10일

참가국: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잉글랜드, 소련


머리말


2020년에 하기로 했던 UEFA EURO 2020은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으로 1년 뒤인 2021년에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6월 11일 개막하며 터키와 이탈리아의 경기가 열린다. 그렇다 유로 2020까지 약 한 달 남은 것이다.

그래서 유로의 역대 챔피언을 리뷰하는 컨텐츠를 하려고 한다. 월드컵처럼 전 세계인의 축제라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축구 팬들에게는 유로 역시 월드컵 못지않은 큰 행사다.


이탈리아가 우승하기까지



이 대회부터 유러피언 네이션스 컵에서 UEFA 유로로 대회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예선도 토너먼트가 아닌 조별 리그 이후 1위 팀 여덟 팀이 플레이오프를 한 다음 승리한 네 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물론 개최국은 본선에 진출한 팀 중 하나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대회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서독과 이탈리아가 모두 참가했다.

이탈리아의 클럽인 인터 밀란과 AC 밀란은 유럽 대항전에서 잘 나갔지만 국가대표팀은 그렇지 못했다.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에게 패하며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굴욕적인 일이 있었다. 이 때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성난 팬들에게 토마토와 계란 세례를 당했다.

이탈리아는 인터 밀란과 AC 밀란이 성공을 거뒀던 방식인 카테나치오를 적극 받아드렸으며 탄탄한 대인 수비와 빠른 역습이라는 팀 컬러를 입히며 준비했다.

이탈리아는 스위스, 키프로스, 루마니아와 함께 6조에 속했다. 스위스 원정에서 2-2로 비긴 것을 제외하고 전부 승리를 거두며 5승 1무 17득점 3실점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이탈리아는 불가리아 원정에서 3-2로 패하며 본선 진출에 적신호가 왔다. 그러나 홈에서 빠른 역습과 탄탄한 수비를 보여주며 2-0으로 제압해 본선에 진출한다.

소련은 헝가리를, 잉글랜드는 스페인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는 프랑스를 제압하고 본선에 진출했다. 이탈리아는 개최국으로 선정되었다.

이탈리아는 준결승에서 소련을 상대로 탄탄한 수비를 보여줬지만 역시 단단한 방패를 가지고 있던 소련을 뚫지 못해 연장 접전 끝에 0-0으로 끝난다. 아직 승부차기가 도입되지 않았던 시기라 준결승에서는 연장전 이후에도 무승부 시 승패를 동전 던지기로 가렸고 결승전은 재경기를 하는 방식이었다.

결승 진출팀을 동전 던지기로 가렸는데 이탈리아의 주장 지아친토 파케티는 동전의 방향을 맞췄고 소련의 주장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는 동전의 방향을 틀려서 이탈리아가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상대는 월드컵 우승국 잉글랜드를 이긴 드라간 자이치의 유고슬라비아였다.

유로 68 결승전 양팀 주장 페트코비치와 파케티


이탈리아도 결승전에서 자이치에게 실점하며 탈락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라이트 윙 도멩기니가 동점골을 넣으며 간신히 재경기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는 이틀 후 재경기를 펼쳤다. 이탈리아는 중원 두 자리를 교체했는데 피에리니와 로데티를 내리고 중앙 수비수 출신의 로사토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겸할 수 있는 데 시스티를 활용하며 좀 더 긴 패스를 활용한다.

첫 결승전 동점골의 주인공 도멩기니는 볼을 받자마자 루이지 리바에게 정확하게 패스했고 루이지 리바는 침착하게 슈팅하며 득점했다. 그리고 31분에 아나스타시가 오른쪽에서 오는 패스를 받아 쐐기 골을 득점하면서 2-0으로 벌렸다. 자이치가 고군분투했지만 부르니치와 로사토, 살바도레의 삼중 수비에 막혔으며 유고슬라비아의 공격진이 카테나치오를 간신히 뚫어내도 이탈리아의 수문장 디노 조프에게 모두 막혔다.

이탈리아는 본선 3경기 1실점이라는 짠물 수비로 우승했으며 20년간의 암흑기를 벗어나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우승국 이탈리아는 어떤 팀이었을까?


이미 이탈리아 세리에 A는 카테나치오를 쓰는 팀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오랜 암흑기를 거친 대표팀도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의 실패 이후 카테나치오를 적극 받아들였으며 카테나치오의 거장 에레라가 임시로 감독을 맡으며 시스템을 이식하기도 했다.

스토퍼들의 강한 대인 수비 능력과 상대가 공략하기 어려운 비대칭 포메이션은 역습 상황과 수비 상황에서 변화무쌍하게 바뀌었으며 상대는 이를 잘 공략하지 못했다. 특히 레프트 백 파케티의 오버래핑은 큰 변수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대표팀 라인업

감독: 페루치오 발카레지

사진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아탈란타에서 이름을 날렸던 명장으로 에레라가 이식한 네라주리식 카테나치오를 신봉했던 감독 중 하나다.


철저하게 선 수비 후 역습 컨셉의 전술을 애용했으며 토르난테라 불렸던 라이트 윙의 수비 가담과 레프트 윙의 공격 가담을 통해 변화무쌍한 측면에서의 공수전환을 주 무기로 썼다. 이런 전술을 바탕으로 유로 우승과 월드컵 준우승이란 큰 성과를 이뤄냈다.

훗날 교체 선수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는 당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산드로 마촐라와 지안니 리베라의 공존이 어려워지자 그들을 각각 전반과 후반 45분씩 교체해서 사용하는 스타페타 전술을 고안하기도 했다.


골키퍼: 디노 조프 (나폴리)

사진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42년 2월 28일 (결승전 당시 26세)


기존의 주전이었던 골키퍼 알베르토시와 주전 경쟁을 이겨내고 주전 자리를 꿰차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골키퍼다. 팀이 1실점으로 끝난 데에는 이탈리아의 수비진의 역량도 훌륭했지만 디노 조프의 선방 능력도 한몫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리베로: 산드로 살바도레(유벤투스)


1939년 11월 29일 (결승전 당시 28세)

아주리와 비안코네리 군단의 리베로로 뛰어난 수비 지능을 바탕으로 한 수비라인 지휘능력과 대인 방어와 지역 커버플레이에 모두 능한 다재다능한 수비수였다.


스토퍼: 아리스티데 과르네리 (볼로냐)

1938년 3월 7일 (결승전 당시 30세)

그란데 인테르 시절을 이끌었던 스토퍼로 찰가머리같은 대인 수비로 당대 유럽 축구계에 이름을 날렸다.


라이트 백: 타르치시오 부르니치 (인터 밀란)

1939년 4월 25일 (결승전 당시 29세)

바위라 불릴 정도로 견고한 수비력을 자랑했으며 중앙 수비수와 라이트 백을 모두 훌륭하게 볼 수 있어서 비대칭 포메이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란데 인테르 시절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유럽에서 오랫동안 고정관념으로 남았던 라이트 백은 수비적인 선수여야 한다는 관념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레프트 윙백: 지아친토 파케티 (인터 밀란)

사진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42년 7월 18일 (결승전 당시 25세)


체계적인 오버래핑 시스템을 처음으로 구현한 수비수로 장신의 피지컬과 침착하고 지능적인 수비 능력을 겸한 것은 물론 공격 지역으로 침투해서 윙어나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와 원투 패스를 받으며 상대 진영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훌륭한 리더십으로 어린 나이에도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으며 실적도 확실해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68 발롱도르에서도 5위를 차지했다.



수비형 미드필더: 로베르토 로사토 (AC 밀란)

1943년 8월 18일 (결승전 당시 24세)

주 포지션은 센터백이지만 이 대회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태클을 겸비했다는 평가만큼 잘 생기고 수려한 외모와는 다르게 상대 공격수를 거칠게 괴롭혔으며 수비형 미드필더에 있을 때도 상대 공격형 미드필더를 거칠게 잡아먹었다.


중앙 미드필더: 지안카를로 데 시스티 (피오렌티나)

1943년 3월 13일 (결승전 당시 25세)

오늘날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역할을 맡았던 공격과 수비의 연결고리로 빠른 발과 왕성한 활동량, 그리고 훌륭한 패싱력을 모두 겸비했다. 상대의 중원을 압박하는 역할과 아군의 공격진에게 볼을 운반하는 역할을 모두 소화했다.


토르난테: 안젤로 도멩기니 (인터 밀란)

1941년 8월 25일 (결승전 당시 26세)

윙 포워드의 자리지만 라이트 백 부르니치가 중앙으로 이동할 땐 오른쪽 측면 수비도 커버했다. 화려함과 부지런함을 겸비했으며 결승전에서도 1-0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동점 골을 넣으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1968년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24위를 차지했다.


공격형 미드필더: 산드로 마촐라 (인터 밀란)

사진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42년 11월 8일 (결승전 당시 25세)


밀란의 전설 리베라와의 주전 경쟁을 이겨서 유로에서 활약한다. 뛰어난 볼 컨트롤 능력과 빠른 기동력을 겸비하며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1968 발롱도르 투표에서 17위를 기록했다.






레프트 포워드: 루이지 리바 (칼리아리)

사진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44년 11월 7일 (결승전 당시 23세)

이탈리아의 공격을 모두 책임진 에이스 중 한 명으로 천둥번개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슈팅력을 지녔으며 스피드가 빠르고 드리블에 능해 측면 공격수에서도 훌륭한 기량을 발휘했다. 결승전 재경기에서도 벼락과 같이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발롱도르 6위를 기록했다.




센터 포워드: 피에트로 아나스타시 (바레세)

1948년 4월 7일 (결승전 당시 20세)

바레세 출신 유망주로 결승전 2차전에 깜짝 출전해 쐐기골을 기록하며 아주리의 우승을 이끌었다. 대담한 성격과 정확한 슈팅이 장점이다. 당시 최고의 유망주였으나 유벤투스로 이적한 뒤에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기대만큼은 성장하지 못했다.


결론


1930년대와 40년대의 영광을 토리노 비행기 참사로 잃고 추락한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의 성공을 기점으로 다시 축구 열강의 반열에 오른다.

이 대회 이후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은 안정적이고 견고한 수비와 날카로운 역습이라는 팀 컬러를 항상 유지했고 1970 월드컵 준우승과 1982 월드컵 우승, 유로 2000 준우승과 2006 월드컵 우승과 같이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이 대회 이후로 이탈리아는 유로 결승에서 계속 좌절했는데 2000년에는 연장전에서 트레제게의 골든 골에 무너졌으며 2012년에는 당대 축구의 트렌드를 이끌던 스페인 대표팀에게 4-0으로 대패하면서 준우승 이상의 성적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과연 이번 유로에서는 대관에 오를 수 있을까?

우승컵을 들고 환호하는 파케티

블로그 박수용의 토르난테 관리자
페이스북 페이지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페이스북 Futball Creator United 회장
다음카카오 브런치 작가


박 수용

작가의 이전글 [역대 UEFA Euro Champion 리뷰] 2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