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용 Jun 04. 2021

[역대 UEFA Euro Champion 리뷰] 5편

파넨카 킥의 기적을 이뤄낸 보헤미아 왕국의 후예들

UEFA Euro 1976 챔피언 체코슬로바키아


개최지: 유고슬라비아

본선 대회 기간: 1976년 6월 16일 ~ 1976년 6월 20일

참가국: 체코슬로바키아, 서독, 네덜란드, 유고슬라비아


머리말


2020년에 하기로 했던 UEFA EURO 2020은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으로 1년 뒤인 2021년에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6월 11일 개막하며 터키와 이탈리아의 경기가 열린다. 그렇다 유로 2020까지 약 한 달 남은 것이다.

그래서 유로의 역대 챔피언을 리뷰하는 컨텐츠를 하려고 한다. 월드컵처럼 전 세계인의 축제라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축구 팬들에게는 유로 역시 월드컵 못지않은 큰 행사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우승하기까지



대회 진행 방식은 지난 대회와 동일하다. 다만 4강에서도 연장전과 승부차기를 한다. 그리고 이 대회는 최초로 승부차기가 실현된 메이저 대회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비롯해 포르투갈과 키프로스와 한 조가 되었다.

첫 경기를 잉글랜드 원정에서 콜린 벨에게 멀티골을 허용하며 3-0으로 패했지만 남은 다섯 경기에서 4승 1무를 기록했다. 특히 에우제비우의 후예들을 상대로는 5-0으로 승리를 거뒀으며 체코의 홈에서는 네호다와 가일스의 연속골로 잉글랜드를 2-1로 이기며 설욕에 성공했다.

4승 1무 1패, 승점 9점을 기록한 체코슬로바키아는 3승 2무 1패 승점 8점을 기록한 잉글랜드를 따돌리고 본선에 진출했다. 이 당시에는 승리시 승점 2점, 무승부시 승점 1점을 받았다.

최종 예선에 진출해서는 유로 전통의 강호이자 창단 이래 4회 연속 4강 본선에 진출한 소련을 만났다.

하지만 소련은 황금기때의 전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체코는 홈에서 소련을 2-0으로 제압하고 원정에서도 2-2로 비기며 본선에 진출한다.

본선에는 웨일즈를 이긴 유고슬라비아, 스페인을 압도한 디펜딩 챔피언 서독, 그리고 벨기에를 대파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가 있었다. 개최지는 유고슬라비아로 정해졌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준결승에서 네덜란드를 만났다.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는 당대 최고의 팀으로 손꼽혔다. 리베로 온드루쉬가 19분에 선제골을 넣었으나 73분에 공을 걷어내려다가 자책골을 넣으면서 연장전으로 갔다가 연장전에서 연속으로 득점하며 3-1로 승리를 거뒀다.

결승전 상대는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연장 끝에 디터 뮐러의 해트트릭으로 4-2로 이긴 서독이었다. 서독은 1972 유로와 1974 서독 월드컵을 모두 우승하고 메이저 대회 3연패를 노리던 팀이었다.


결승전을 앞둔 1976 체코 멤버들


전반 8분, 서독의 라이트 백 포그츠가 트래핑 실수로 네호다에게 공을 내줬고 네호다가 내준 골을 스베힐릭이 슈팅했다. 마이어는 한 차례 막았지만 다시 네호다에게 갔고 네호다는 다시 낮은 크로스를 올렸고 스베힐릭은 선제골 득점에 성공했다.

선제골을 넣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25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리킥을 베켄바우어가 헤딩으로 걷어냈으나 걷어낸 공을 도비아쉬가 받아 통렬한 중거리 슈팅으로 득점하며 2-0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서독의 맹추격은 무서웠다. 울리 회네스가 역습을 전개했으며 회네스의 패스를 받은 본호프의 크로스를 디터 뮐러가 발리 슈팅으로 넣으면서 추격했다. 전반이 종료되고 후반전에도 서독의 공세는 계속됐으나 골키퍼 이보 빅토르가 계속된 선방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후반 44분 코너킥 상황에서 횔첸바인에게 동점골을 내줬다.

연장전까지 갔지만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아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마스니, 네호다, 온드르쉬, 유르케밀크 모두 성공했고 서독도 본호프, 플로에, 본가테즈 모두 성공했다. 하지만 네 번째 키커 울리 회네스가 공을 하늘로 보내며 실축한다.

마지막 키커인 파넨카는 중앙 방향으로 느리게 찼으나 이를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제프 마이어가 왼쪽으로 몸을 날리면서 막지 못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우승이 확정됐다.

사람들은 중앙으로 느리게 차는 이 킥을 파넨카킥이라 불렀다. 그 당시에는 페널티킥을 이렇게 차는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넨카 본인 말로는 페널티 킥으로 동료 골키퍼와 내기를 했었는데 자주 졌는데 이 방법을 연구한 이후 자주 이겼다고 한다.

그렇게 체코슬로바키아는 강호 서독의 메이저대회 3연패를 저지하며 자국의 유일한 메이저 대회 우승 타이틀을 얻었으며 특히 결승전 5번 키커 파넨카의 킥은 파넨카킥으로 훗날에도 회자되었다.


우승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어떤 팀이었을까?


날개 없는 전술을 처음 선보인 1966 월드컵의 잉글랜드를 기억하는가? 체코슬로바키아는 그 잉글랜드와 표면적으로는 굉장히 유사한 전술을 냈다. 그 전술에 독일 국가대표팀이 보여줬던 리베로 시스템을 섞은 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컨셉이었다.

전문 윙어를 기용하지 않았지만 공격형 미드필더 메스히의 움직임에 따라 전방의 두 공격수는 측면과 중앙을 오갔다. 그리고 파넨카는 메짤라 위치에서 중앙과 측면을 커버하며 팀의 플레이메이킹을 일부 이뤄냈으며 피바르닉도 때때로 측면에서 오버래핑에 나섰다.

수비 라인은 모두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출신으로 구성했다. 슬로바키아의 수비 라인은 온드루쉬가 이끌었으며 그의 오버래핑에 따라 수비형 미드필더들이 커버하는 방식을 즐겨 썼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과 잉글랜드의 장점을 흡수하려고 노력했으며 결국 그들의 장점을 흡수해 당대 최강의 팀들을 잡고 대권을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1976 체코슬로바키아 올스타 팀



감독: 바츨라프 제첵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네덜란드의 덴 하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뒤 체코슬로바키아의 감독으로 6년간 근무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독일과 잉글랜드, 네덜란드의 축구 방식을 적절하게 조화하며 실용적인 축구로 강호들을 꺾고 우승했다.


골키퍼: 이보 빅토르 (두클라 프라하)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42년 3월 12일 (결승전 당시 34세)

1970년대를 대표하는 동유럽 최고의 골키퍼로 두클라 프라하의 레전드였다. 이 대회에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와 베켄바우어의 서독을 상대로 엄청난 선방을 보여주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발롱도르 3위를 수상 받는 영광을 누렸다.


리베로: 안톤 온드루쉬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50년 3월 27일 (결승전 당시 26세)

동유럽의 베켄바우어라 불린 체코슬로바키아 수비의 리더다. 압도적인 제공권 능력과 폭발적인 공격 가담, 그리고 견고한 대인 수비력을 보여줬다. 25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주장 완장을 차고 대회에 임했으며 우승에 큰 공을 세우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을 수상 받았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6위에 올랐다.


스토퍼: 요제프 카프코비치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1948년 11월 1일 (결승전 당시 27세)

100m를 10.8초에 주파하는 발 빠른 수비수로 침착한 두뇌와 빠른 발을 활용해 안정적인 수비를 펼쳤다. 온드루쉬와는 반대로 공격 가담을 자제했으며 넓은 수비 범위를 커버하며 팀의 우승을 도왔다.


라이트 백: 얀 피바르닉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1947년 11월 13일 (결승전 당시 28세)

공격적인 오버래핑을 앞세워 오른쪽에서 활약했다. 윙 없는 전술에서 윙어 역할을 해주며 팀의 우승에 공헌하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레프트 백: 코로만 고흐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1948년 1월 7일 (결승전 당시 28세)

오른쪽의 피바르닉과는 다르게 굉장히 수비적인 선수였으며 빠른 발을 활용해 상대 윙어를 묶는 역할에 능했다.


수비형 미드필더: 카를 도비아쉬 (스파르타크 트르나바)

1947년 12월 18일 (결승전 당시 28세)

1970년대를 대표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라이트 백 겸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중거리 슈팅에 능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올해의 선수상을 두 번 수상한 이력이 있다.


오른쪽 미드필더: 야로슬라프 폴락 (VSS 코시체)

1947년 7월 11일 (결승전 당시 28세)

결승전에선 나오지 못했던 미드필더, 하지만 대회 내내 훌륭한 경기 조율과 정교한 패싱력을 보여주며 맹활약을 펼치며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15위를 기록했다.


왼쪽 미드필더: 안토닌 파넨카 (보헤미안스 프라하)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48년 12월 2일 (결승전 당시 27세)

파넨카 킥으로 대회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파넨카킥에 가려졌지만 뛰어난 볼 운반 능력과 전진 패스를 앞세워 체코슬로바키아의 공격 전개를 이끌었다.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공격형 미드필더: 마르틴 마사니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50년 8월 13일 (결승전 당시 25세)

라이트 윙과 공격형 미드필더를 겸했다. 세계에서 가장 기술적인 윙어 중 하나로 통했으며 왕성한 활동량으로 공격진과 스위칭에도 능했다. 이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발롱도르 9위에 올랐다.


스트라이커: 얀 스베릭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1950년 1월 17일 (결승전 당시 26세)

본 포지션 이외에도 윙 포워드와 처진 스트라이커를 겸할 수 있었던 만능 공격 자원이었다. 결승전에서는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힘을 보탰다.


스트라이커: 즈데넥 네호다 (두클라 프라하)

1952년 3월 9일 (결승전 당시 24세)

스트라이커와 레프트 윙, 그리고 공격형 미드필더를 모두 겸할 수 있었던 만능 공격수였다. 네호다는 전술에 따라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대회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이런 활약을 인정받아 그는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결론


월드컵에서도 두 번이나 결승전에서 고배를 마셨던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대회에서 자국의 유일한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이끈다. (사라진 대회까지 포함하면 중유럽 컵에서도 우승하긴 했다.)

특히 빅토르는 대단한 선방으로 발롱도르 투표에서 베켄바우어와 렌센블링크의 뒤를 이어 3위에 올랐다.

하지만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제첵 감독은 경질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더 이상 전성기를 이어가진 못한다.

우승컵에 키스하는 안토닌 파넨카

블로그 박수용의 토르난테 관리자
페이스북 페이지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페이스북 Futball Creator United 회장
다음카카오 브런치 작가

박 수용

작가의 이전글 [역대 UEFA Euro Champion 리뷰] 4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