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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용 Feb 23. 2021

다뉴브 학파의 새로운 시도

센터 포워드는 오직 득점만을 위해 플레이를 하는 포지션인가?

1.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An der schonen blauen)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노래를 알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중,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수업 중에 들었을 수도 있다.


이 곡은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음악가 요한 슈트라우트 2세가 작곡한 왈츠로 1866년 보오전쟁에서 패배해 침울해진 오스트리아의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데 이 작품이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했다.


실제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빈과 오스트리아에서 크게 인기 있는 곡이 되었다. 오죽하면 이 노래를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2 국가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곡의 완성도가 뛰어나고 선율이 무척 아름다워 현재에도 전 세계에서 연주되며 인기를 누리는 곡이다.


다뉴브 강은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에서부터 루마니아와 인접한 흑해를 향해 흐른다.


여기서 도나우강은 다뉴브강의 독일어 이름이다. 그리고 이 다뉴브 강은 아우크스부르크와 뮌헨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와 루마니아까지 흐르며 루마니아의 해안 도시 갈라티에서 흑해로 흐르는 거대한 강이다.


갑자기 클래식 음악과 세계지리 공부는 왜 하냐고 물을 것이다. 바로 이 다뉴브강 유역에서 축구 역사를 뒤흔드는 축구 전술의 물줄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 월드컵 이전 시대의 축구 전술


1920년대 당시 정석으로 불렸던 2-3-5 포메이션의 정석


당시 축구는 2-3-5 피라미드 시스템이 유행했었다. 이는 당시 오프사이드 규정 때문이다. 당시에는 패스를 받는 공격수는 언제나 상대 골대와 사이에 상대 골키퍼를 포함해 수비수 3명이 위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비수 1명은 골키퍼와 함께 골대 주위에 위치하고 나머지 수비수 1명이 그보다 앞선 위치에 있으면 2명의 수비수 사이로 공격수가 패스를 받으러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룰이 1925년에 지금과 같은 골키퍼 포함 두 명으로 바뀌었다. 과거와 같은 전술로는 실점해서 팀이 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양 측면의 하프백은 인사이드 포워드를 견제해야 했으며 아웃사이드 포워드들은 풀백을 견제해야 했다.


센터 하프는 팀의 빌드업을 맡는 동시에 센터 포워드를 막아야 했는데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하느라 다른 수비수들과는 다르게 수비에 집중할 수 없었으며 센터 포워드들에겐 득점 찬스가 많이 나왔다. 그렇다고 풀백으로 센터 포워드를 견제하자니 아웃사이드 포워드들의 중앙 침투를 허용하게 되기에 사용하기 어려웠다.


허버트 채프먼이 이끌던 아스널은 W-M을 받아드렸다.


그런 문제 때문에 센터 포워드를 효율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잉글랜드에서는 허버트 채프먼이 센터 하프를 양 풀백 사이로 내리며 WM의 대형을 구축했다. 그러나 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빌드업을 해야 했으며 그래서 숏 패스보다는 롱 패스가 유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유역에서 거주하고 있던 보헤미아 출신의 오스트리아 대표팀 감독 후고 마이슬은 이 흐름을 따르길 거부했다.


오스트리아 국가대표팀의 감독 우고 마이슬

후고 마이슬과 그의 코치인 잉글랜드 출신의 지미 호건은 볼의 소유를 늘려가면서 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움직임의 선수들이 볼을 받기 좋은 위치로 활발하게 움직이기를 바랐으며 두터운 패스길을 통해 공을 오랜 시간 점유하는 것을 선호했다.


마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선율처럼 정교한 패스 플레이와 공격수들이 서로 위치를 바꾸며 상대를 교란하는 스위칭 플레이를 처음으로 보여줬으며 숏 패스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의 2진을 5-0으로 이기며 완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1931-32 중유럽 컵에서 당대의 강호 이탈리아를 제압하고 우승했다. 그리고 1931년 4월 12일부터 1932년 12월 7일 잉글랜드에게 3-4로 패할 때까지 14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했다.


후고 마이슬은 'Kapellmeister'라 불렸는데 이 뜻은 관현악단이나 합창단 등의 지휘자라는 뜻이다. 오스트리아가 세계에 자랑하는 곡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정신을 축구로 승화시켜 기적의 팀이라는 뜻을 가진 "분더 팀"을 선보였다.


다뉴브 학파를 발족시킨 지미 호건 코치


오스트리아의 상승세를 직접 느낀 이웃 나라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지도자들도 마이슬의 철학을 받아들이고 배웠으며 이들은 모두 1934년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


세상은 이들을 보고 다뉴브 강 유역의 국가들의 기적을 이끌었다고 하며 "다뉴브 학파"라고 부른다.


자 그럼 다뉴브 학파는 어떤 전술을 사용할까?



3. 포전인옥지계 (抛塼引玉之計)


손자병법의 공전계의 제17계인데 숨은 뜻은 비슷한 것으로써 유인하여 어리석은 적을 치는 계책이다. 벽돌은 미끼를 뜻하며, 옥은 승리를 뜻한다. 곧 미끼로 적을 유인하여 아군의 작전에 휘말리게 함으로써 승리를 얻는 전술이다.


마이슬의 전략도 이와 유사한 점이 꽤 많다. 보통은 득점을 책임지는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이다.


그러나 마이슬의 축구는 "센터 포워드는 오직 득점만을 위해 플레이를 해야 하나?"라는 의문에서 그의 축구 전술이 발전한다. 그래서 센터 포워드에 힘과 체력이 앞서는 공격수가 아닌 오히려 오늘날의 공격형 미드필더와 유사한 인사이드 포워드와 유사한 스타일을 가진 선수에게 맡겼다.


그라운드의 모짜르트 마티아스 진델라


그는 바로 그라운드의 모차르트라 불리는 마티아스 진델라였다. 상대 센터 하프들은 175cm에 63kg이라는 마른 그의 몸을 보고 그를 얕보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드리블 실력과 재빠른 스피드로 상대 수비수의 몸싸움이나 태클을 피하고 풀백들까지 유인한 뒤에 오프사이드 트랩을 피해 빈 공간으로 패스를 주고 인사이드 포워드인 요제프 비칸이나 토니 샬에게 기회를 내주며 득점을 도왔다.


요제프 비칸


진델라의 최고의 파트너인 인사이드 라이트 포지션에서 활약하는 비칸은 현재 공식경기 최다골 보유자라는 설이 유력하며 100m를 10초대에 끊는 빠른 스피드로 상대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끊었으며 양발을 모두 잘 썼으며 뛰어난 슈팅력을 지녔기에 어느 각도에서든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였다. 그의 공식전 골 기록이 530경기 805골로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공식전 골을 기록한 선수다. 인사이드 레프트 자리에서 활약하는 토니 샬은 빠른 발과 훌륭한 기본기에 축구 지능이 뛰어나 빈 공간으로 찔러들어가는 플레이에 능한 선수였다.


그렇다고 진델라를 포기하고 토니 샬이나 요제프 비칸을 막는 건 더 위험했는데 진델라를 자유롭게 하면 진델라가 직접 들어와서 슈팅을 날려 득점할 수 있기에 진델라와 인사이드 포워드들을 동시에 막아내야 했으며 1대 1 수비에 익숙한 상대 팀 풀백들과 하프백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양 측면에 있는 아웃사이더 라이트인 치세크는 상대 수비수들이 중앙에만 집중할 수 없도록 측면에서 뛰어난 존재감과 강력한 득점력으로 풀백들을 위협했으며 기본기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엄청난 파워의 슈팅을 날리고 빠른 발과 강력한 몸싸움으로 상대 풀백을 고전시킨 루돌프 피어틀도 있었다.


이들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진델라와 인사이드 포워드들 뿐만이 아니라 아웃사이드 포워드들과 인사이드 포워드들도 수시로 자리를 바꿨다. 제갈량의 팔진도만큼 변화무쌍했으며 진델라가 미끼가 되어 적을 유인하면 다른 공격수들이 득점 찬스를 만들고 그렇다고 각자 1대 1로 막자니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고 수비 조직력이 와해되어 틈을 내주고 결국 실점하게 되는 것이었다.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시초 슈미스틱


거기에 진델라와 비칸을 위시한 공격진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공격진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게 지휘해주는 선수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요제프 슈미슈틱이며 포지션은 센터 하프였다. 183cm라는 당시로서는 큰 키를 이용해 상대의 롱 패스를 끊고 상대 센터 포워드를 저지하는 수비력은 기본이고 뛰어난 패스 센스와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진델라나 비칸이 견제받지 않게 잘 받을 수 있도록 정확한 롱패스를 배급하며 팀의 수비와 공격을 모두 지휘하는 위대한 주장이자 리베로나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시조 격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양 하프백인 한스 우르바네크와 프란츠 바그너의 호위를 받아 팀의 공격과 수비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리고 후방에는 라이트 풀백 시자와 레프트 풀백 세슈타는 각각 신장이 173cm와 166cm로 불리한 신체조건을 지녔다. 하지만 이들은 굉장히 빠른 스피드를 지녔으며 칼날이라 불리는 날카로운 태클로 상대 공격수들을 견제하는 대인 마킹에 능해 분더 팀의 뒤를 받쳐줬다.


분더 팀의 1934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으로 공격진의 스위칭을 적극 활용했다.


공격의 핵 진델라와 수비의 핵 슈미슈틱의 중앙 라인은 분더팀의 핵심이었으며 이들이 있기에 'Kapellmeister' 휴고 마이슬의 지휘도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아무리 명장 밑에 약졸은 없다지만 저 둘은 정예병을 넘어 만인적이라 불릴만한 실력을 지닌 선수들이었으며 축구 지능도 훌륭해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플레이를 직접 실현시켰다.


1930년대 전반 유럽 대륙을 호령하는 오스트리아는 중유럽 컵에서 이탈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8 경기에서 4승 3무 1패의 성적으로 우승했으며 자신들의 축구의 위대함을 증명했다.


그리고 1933년에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토리노에서의 중유럽 컵 대회에서는 우고 마이슬 감독의 훌륭한 임기응변 능력이 돋보였는데 마티아스 진델라를 기용하지 않았음에도 측면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서 치세크가 헤트트릭을 하며 이탈리아와 유벤투스가 자랑하는 당대 유럽 최고의 풀백 라인인 칼리가리스와 로세타를 무너트렸으며 특히 칼리가리스는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벤치로 밀려나게 될 정도로 충격적으로 당했다.


분더 팀의 경기 직전 사진


1934 월드컵에서도 오스트리아는 강함을 여과 없이 발휘했다.


토리노에서 프랑스를 연장 혈투 끝에 비칸의 결승골로 3-2로 제압했으며 8강에서도 죄르지 사로시가 선봉에 선 헝가리를 백업 공격수인 호르바트를 기용하고도 2-1로 격파했다.


그들은 그렇게 4강에서 자신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복수의 칼날을 갈던 이탈리아를 만났다.



4. 모사재인 성사재천 (謀事在人 成事在天)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호로곡에서 사마의를 상대로 화공을 준비했으나 폭우로 인해 실패하면서 한탄하면서 했던 말이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그것이 이루어지느냐는 하늘에 달려 있다며 한탄했는데 마이슬도 이런 한탄을 할만한 상황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의 전력은 여전히 강했지만 이탈리아에는 역시 베니토 무솔리니의 지상 명령과 이탈리아 팬들의 광적인 응원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이들의 눈치를 본 주최 측과 심판은 이탈리아에게 판정을 유리하게 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로 귀화한 오리운디 루이스 몬티의 거친 수비를 넘어서 난폭한 폭력은 종이 인간이라 불리는 진델라의 작은 몸을 산산조각 냈으며 진작 퇴장을 당했어야 마땅한 반칙임에도 한 번도 퇴장을 당하지 않았고 90분 내내 몬티는 진델라에게 폭력적인 반칙을 자행했으며 심판은 이를 방조했다.

거기에 아르헨티나에서 온 구아이타의 한방을 골키퍼인 페터 플라처가 막지 못해 1-0으로 패했다. 이탈리아는 다소 추하게 결승에 진출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억울하게 3위 결정전으로 향했다.

3.4위 전에서는 준결승에서 심한 반칙을 당한 진델라가 출전하지 못했으며 그 여파인지 심판 판정에 유리함과 행운의 선제골을 넣은 독일에게 3-2로 패하며 용두사미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오스트리아는 훗날을 기약했지만 이후에는 상황이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1931년 베를린에서 독일을 6-0으로 이겼지만... 축구 실력과 군사력은 비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축구를 평가할 때 보통 축구 내적인 전술과 선수들의 기량으로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 축구도 사람이 하는 거라 외부 환경의 영향을 안 받으려고 해 봐야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주축 선수의 기량이 떨어져 분더 팀의 컨트롤 타워 요제프 슈미슈틱이 31세의 나이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으며 에이스인 진델라도 34세가 되어서 국가대표팀 은퇴를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으며 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더팀의 위대한 'Kapellmeister'인 마이슬이 1937년에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득점 기계이자 에이스 요제프 비칸이 구단과의 갈등으로 인해 자신이 체코슬로바키아계인 것을 이용해 체코슬로바키아의 팀인 슬라비아 프라하로 이적해버렸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경례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자 하였는데 안슐루스(Anschluss), 직역하면 합병인데 독일이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접수하며 형식적인 투표 과정을 거쳐 병합해버렸다.

애국자였던 진델라는 1939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유럽은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다시 탁하게 물드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독일에게 패전하는 수준을 넘어 나치 독일에게 지배받고 독일의 전쟁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식민지 처지에 놓인 오스트리아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작곡했던 시기보다 더 암울해졌으며 1945년 병합이 무효가 된 이후에도 분더 팀의 정신은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1950년대에도 오스트리아는 축구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유럽에서는 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Kapellmeister'인 마이슬은 세계 축구계에 남긴 것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



5. 토털 풋볼의 조상


마이슬의 대표적인 유산인 '펄스 나인'은 마이슬 생전에도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의 감독 카렐 페트루와 독일 대표팀의 감독 제프 헤어베르거가 모방했으며 훗날 매직 마자르에서도 이것을 이용하여 센터 포워드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내리고 인사이드 포워드를 스트라이커로 올려 투 톱 플레이를 하는 데에도 영향을 줬다.


그 뒤에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세 비얄롱가를 시작으로 루이스 카르닐리아나 미겔 무뇨스가 디 스테파노와 엑토르 리알, 그리고 푸스카스 페렌츠의 스위칭을 이런 식으로 활용해서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달성하는데 공헌했다.


그것을 넘어 현대 축구의 시조가 된 미헬스가 토털 풋볼의 틀에서 크루이프를 활용을 하는데도 진델라의 방식은 참고가 되었으며 펩 과르디올라가 2010-11 시즌에 메시를 한정하는 것도 여기에 속하며 사리가 나폴리에서 메르텐스를 활용하는 방식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리누스 미헬스와 요한 크루이프는 스위칭 플레이를 토털 풋볼로 완성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수비적으로 기용되었던 센터 하프 역시 공격적으로 기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고 실제로 슈미스틱은 오늘날의 딥 라잉 플레이메이커의 시조가 되기도 했다. 이는 절친한 친구인 채프먼의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만천하에 표현했다.


실제로 그의 또 다른 친구이자 아주리의 감독 비토리오 포초 역시 그와 여러 번 겨루며 그의 방식을 자신의 방식으로 모방해서 재창조했는데 원래 센터 하프로 상대의 센터 포워드를 집중 마킹하며 수비에 전담했던 '도살자' 루이스 몬티를 중용했었다. 하지만 그가 은퇴한 이후에는 그와 같은 유형의 센터 하프가 아닌 그와는 다른 유형이며 슈미스틱과 유사한 유형인 우루과이 출신의 오리운디 미켈레 안드레올로를 기용하며 다시 한번 월드컵 우승을 제패한다.


세월이 흘러 1950년대의 매직 마자르에서 로란트 줄라의 위치 이동에 따라 백 2에서 백 4까지 자유자재로 바뀌는 방식에도 슈미스틱의 플레이가 작게나마 영향을 줬다. 그래서 영어권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센터 하프를 센터 백으로 해석하지만 이탈리아나 다뉴브 강 유역의 국가에서는 센터 하프를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해석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운명이 같은 다뉴브 학파의 신봉자인 제프 헤어베르거와 세베스 구스타브는 월드컵 결승에서 우승컵을 다투기도 했다.


결국 다뉴브 학파는 다뉴브 강을 넘어 세계로 퍼지고 결국 현대 축구 그 자체가 되어버린 토털 풋볼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의 선배이자 훌륭한 선각자로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축구 행정가로써도 훌륭했던 우고 마이슬


여담으로 후고 마이슬은 단순히 축구 전술뿐만이 아니라 축구 경영과 대회 운영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축구의 프로 스포츠화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축구 협회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에서 가장 처음으로 프로화 된 축구 리그를 열었으며 프로들만 참여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퍼스트 리그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를 여는데 공헌했다.


오스트리아를 넘어 축구로 인한 유럽의 평화와 공동체를 꿈꾸었고 이에 국제 대회를 여는데에도 큰 기여를 하였는데 중부 유럽의 강력한 클럽들이 참가하는 미트로파 컵을 개최했으며 중부 유럽 국가의 국가대항전인 중유럽 컵도 처음으로 개최했다. 


미트로파 컵은 오늘날의 UEFA 챔피언스리그를 여는데 롤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대항전인 중유럽 컵은 오늘날의 유로와 네이션스컵에 큰 영향을 줬으며 상기한 두 대회는 자신들의 축구 전술을 공유하는 대회가 되며 서로 발전해서 한동안은 다뉴브 강 유역의 국가들과 알프스 산맥과 인접한 국가들이 유럽 축구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처럼 마이슬은 전술적으로는 물론 행정적으로도 유럽 대륙의 축구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며 결국 마이슬의 이런 노력이 후대에 이어지면서 축구의 중심은 영국에서 유럽 대륙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Paul Meissner의 그림 "Das Wunderteam"


보오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 국민들을 위로하고자 작곡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요한 슈트라우트 2세가 남긴 의미를 기억해보자. 그리고 축구에 대해 전술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새로운 시도를 한 다뉴브 학파가 기여한 축구의 판도를 넓히고 전술적으로 발전시킨 공헌을 잊지 말고 기억해주자.


그리고 우리도 이들처럼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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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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