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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Jan 16. 2022

내가 오징어 게임을 오해했어.

번역이 잘못했네.

오징어 게임을 재미있게 봤냐는 나의 질문에 외국인 친구가 답했다.


“사실 그렇게 재밌게 보진 않았어. 근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내가 오징어 게임을 오해했던 것 같아.”


오징어 게임을 오해한다고?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아마 자막 때문일 거야. 이상하게 드라마를 보는 내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예상이 가더라고.”






모든 언어는 특유의 ‘말맛’이 있다. 애매한 표현, 말끝을 흐리는 말투에서 느껴지는 감정 같은 건 번역을 아무리 잘해도 전달되기 힘들다. 아무리 번역가가 초월 번역을 해도 원래 대사의 그 느낌 그대로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문화를 담는 그릇이니까.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장면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 일남과 기훈이 구슬치기를 하는 장면일 테다.



오징어 게임에 참여한 모두가 일남을 정신 나간 노인이라 부를 때에도 기훈은 그를 어르신이라 부르며 따랐다. 생사가 엇갈리는 순간에서도 존댓말을 하며 어르신 일남을 챙겼다. 아니 모셨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렇게 자신이 모시던 어르신과 1대1로 구슬치기 게임을 하게 된 기훈.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일남을 속여가며 게임을 하고, 그 결과 일남의 구슬이 단 한 개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마지막 한 판만 더 이기면 일남을 제치고 다음 게임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 일남이 제안을 한다.



"우리 다 걸고 한 판 할까? 내 거 다 걸 테니까 자네 것도 다 걸어. 자네가 가진 전부랑 내가 가진 전부를 걸고 하는 거야. 그게 공평하잖아.”


일남의 마지막 구슬 한 개와 자신이 가진 19개의 구슬 모두를 걸고 게임을 하자는 일남의 제안에 기훈은 화를 버럭 내버린다.



"그 구슬 하나랑 이걸 다 걸으라고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그렇게 일남을 깍듯이 대하던 기훈이, 구슬 하나에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 되자 급기야 말을 놔 버린 것이다.


기훈 대사의 영어 번역은 이렇게 나갔다.

What kind of nonsense is this? That makes no sense!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기훈의 “말이 안 되는 거잖아.” 라는 대사 안에는 ‘이 상황은 말이 안 된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난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 아버지 뻘이든 말든 상관 안 한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That makes no sense!”에는 ‘이 상황은 말이 안 된다’라는 첫 번째 의미만이 담긴다. 어쩔 수 없는 번역의 한계인 것이다.




오징어 게임을 오해했다는 외국인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내가 오징어 게임을 나중에 다시 찾아봤거든, 근데 마지막 회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노인과 이야기할 때는 주인공이 더 이상 존댓말을 안 쓰더라? 그건 그만큼 주인공이 화가 났고 더 이상 그를 대접해주지 않겠다는 거잖아. 그 노인이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나는 뒤늦게 이걸 깨닫고 깜짝 놀랐어.


분명 나는 한국어에 존댓말이 있다는 사실을 공부해서 알고 있었거든? 근데 드라마를 볼 때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어. 그렇게 내가 놓친 디테일이 한두 개가 아닐 거야. 그러니 오징어 게임이 재미없었겠지.


역시 언어를 아는 것과 언어를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인 것 같아. 나중에 한국어 공부 좀 더 하고 오징어 게임을 다시 한번 제대로 봐야겠어.”




오징어 게임을 본의 아니게 오해했다는 친구의 고백(?)을 듣고, 나는 얼마나 많은 디테일을 놓쳐가며 외화와 외국 드라마를 봐왔을지 생각해봤다.


대체 지금껏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많은 외국 영화들을 오롯이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가 의도한 바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을 오해해 온 것은 아닐까?


친구의 고백에, 내 마음 속 한 부분이 찝찝해졌다. 이거 영화를 다 다시 볼 수도 없고 어쩌면 좋나.




문득 내가 오해한 것은 영화뿐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엄마의 말도, 오래된 친구의 말도, 지나간 연인의 말도 내가 다 오해했던 거겠지.





우리는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모어로 세상과 소통한다. 감히 단언컨대, 어느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미리 보기’나 ‘건너뛰기’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봐야 한다.


별 의미 없이 던진 나의 말에 누군가가 힘없이 무너져 버릴 때, 그를 너무 예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에 내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질 때,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그냥 번역이 잘못된 탓이다.




어제 유튜브 채널 신사임당의 영상을 보다가 페이스북 개발자로 일하던 분의 인터뷰를 봤다. 실리콘 밸리의 기업 문화와 한국의 기업 문화의 차이점 중 하나는, 동료가 업무 지시를 제대로 못 알아듣고 일을 잘못 진행했을 때, 한국에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상대방을 탓하지만 실리콘 밸리에서는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탓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모국어를 가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국제 공통어인 영어로 이야기할 때는 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고 지낸다. 따라서 소통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너도 나도 한국어 만렙인 우리는 어떠한가.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길 원한다. 내가 말은 좀 그렇게 해도 좋은 사람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고 어떨 때는 말 한마디 안 해도 내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오역으로 인한 오해를 피하는 법은 단 한 가지. “그럴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타인의 부족함을 찾기 전에 나의 미숙함을 찾아보는 것.



한국어 선생님 단상이라고 하기엔 꽤나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상하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끝에 가서는 결국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로 귀결된다.

모쪼록 나의 이야기가 부디  번역되어서 당신에게  닿기를.


우리 모두 ‘그럴 수도 있다 믿음 가지고 살아갑시다!



신사임당 채널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직 3가지 (전인우 전 페이스북 LV5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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