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가야금 하는 아이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성공보다 자식의 성공을 더 기뻐하는
난 그런 사람을 구시대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딸이 전통예술중학교에 합격했다.
초등학교 3학년 시기,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며 갑자기 가야금을 하고 싶다고 해서 제주도섬을 뒤져 선생님을 알아보고 취미로 시켜주었는데 1년 정도 가야금을 배우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에 있는 국립전통예술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서울에서 제주도로 내려왔는데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가겠다니..... 부디 그러다 말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결심은 확고했고 제주도의 가야금 선생님은 서울에 있는 입시 전문 선생님을 연결해 주었다. 그때부터였다. 주말마다 서울로 레슨을 받으러 비행기를 타고, 방학이면 산으로 합숙연습을 떠나고, 시험 막판에는 서울에 살다시피 하게 되는 일이....
제주도는 예술, 특히 국악을 하기에는 무척 척박한 땅이다. 국악중학교, 전통예술중학교 입시를 전문으로 하는 학원도, 전문가도 없으며 입시에 대한 정보도 희박하다. 가야금은 한 대에 천 만원이 넘는데 산조가야금, 정악가야금, 25현 가야금을 모두 사야해서 악기에만 오천에 가까운 돈이 필요하다. 거기에 시간당 10만원이 넘는 레슨비에 제주도에 사는 이유로 레슨 때마다 비행기를 타야 하는 항공비와 체류비까지. 세상 가장 불리한 환경을 가진 섬에서 가야금을 하겠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소질이 없다면 과감하게 지원을 끊어 버리겠지만 가끔 나가는 전국단위의 국악경연대회마다 수상을 하는 딸아이를 보며 그렇게 독한 마음을 먹는 부모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입시를 한 달 앞두고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았다. 딸아이는 3주 가정체험학습을 쓰고 서울 외할머니댁에 머무르며 하루종일 연습을 했고 그 어린것이 혼자 음식점에 가서 밥을 사먹으며 부모 없이 생활해야 했다. 전화통화를 하다가 툭하면 눈물이 터지는 딸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메어오는 것만 같았다. 왜 이리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 부모로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시험이라는 것은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고, 한 번의 실수가 당락을 좌우하기에 아무리 열심히 연습했어도 장담할 수가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였다. 시험날 부디 실수만 하지 않기를. 그렇게 딸아이는 시험을 보았고 아내와 나는 남들보다 일찍 입시생을 둔 부모로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합격자 발표일, 펑펑 울며 전화를 하는 딸아이 때문에 가슴이 철렁내려 앉았지만 그 눈물이 본인도 모르게 나오는 감격의 눈물임에 딸아이에게 고마웠다. 그날 저녁 딸아이가 합격할 때까지 마시지 않겠다는 맥주를 3개월만에 3개월치를 한꺼번에 마시며 오랜만에 살아있는 행복함을 느꼈다. 이제부터 고생이 시작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나중에 일어날 일이기에 잠시 잊고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올해 유난히 더웠던 8월의 여름, 자기 키보다 큰 가야금을 메고 연습실을 오고가던 딸아이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가야금을 들어다 준다고 해도 "어차피 앞으로도 내가 해야할 일이야."라며 낑낑대며 어깨에 메고 가던 딸아이가 생생하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이 지금의 시간으로 보답해 준 것이리라. 부디 지금의 시간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잘 해나가기를 바란다.
살면서 느끼는 사실이지만
사람은 어떤 일이든 장담하면 안 된다.
"자식 인생은 자식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지."
라며 자신했던 내가 자식의 중학교 합격 소식에 이렇게 가슴 떨려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다 똑같다.
결국 부모는 부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