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가 MVP를 받으면 그렇게 반갑더라!
훌륭한 스포츠 선수들을 보면 본받고 싶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 특히 골키퍼 포지션의 선수들에게서는 또 다른 위대함을 발견한다.
뛰어난 실력의 골키퍼는 뛰어난 집중력, 순발력, 판단력을 꼭 갖고 있다. (양궁, 사격, 역도 선수들에게서 느껴진 것과도 비슷하달까?) 뿐만 아니라, 골을 먹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도 필수 덕목이다.
김수연 골키퍼는 원래 SK슈가글라이더즈에 있다가 2022-2023 시즌 중간에 부산시설공단 팀으로 트레이드되었다. 새 팀에서 오히려 주전 골키퍼로 뛰게 되면서 본인의 가치를 매번 실력으로 증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슈퍼 세이브를 하든 실점하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경기를 펼쳐나간다. 그 모습이 늘 인상 깊었다. 파이팅 넘치고 리액션이나 세리머니가 활발한 것도 멋있지만,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든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선수는 그 내면이 왠지 훨씬 더 어마무시할 것 같다.
골키퍼는 MVP로 뽑히는 일이 드물다. 그래도 김수연 선수가 이번에 18세이브에다 48% 넘는 엄청난 방어율을 기록했으니, MVP 자주 되는 필드의 3-back 선수들 말고 오늘은 골키퍼가 꼭 MVP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대했던 대로, 김수연 골키퍼가 오늘의 MVP로 호명되었다. 그의 등번호인 '86'을 듣는 순간, 그 뒤의 이름이 이어지기도 전에 자동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SK 응원석에 앉아서는 부산 골키퍼의 MVP 수상에 환호하는 모양이 스스로 웃기긴 했지만) 그동안 내가 특별히 더 관심 갖고 유심히 지켜보던 선수가 MVP에 오르다니 엄청 기뻤다.
이날 처음으로 김수연 선수에게 사인도 받았다. MVP를 받고 나온 날임에도 표정은 변함없는 게 여전히 인상적이군!
https://www.youtube.com/live/JRW5C9PoDbU?si=a7yeY8hwqNsS3Uxh&t=21461
핸드볼에서는 시합의 흐름을 가져오는 데에 골키퍼의 선방이 매우 중요하다. 승부던지기는 더욱 그렇다. 이건 그야말로 골키퍼의 대결이다.
서울시청이 부산시설공단을 열심히 따라붙더니 경기가 동점으로 끝났다. 전국체전 룰 상, 연장전 없이 승부던지기로 넘어가서 승패를 가리게 되었다.
각 팀 주전 골키퍼인 부산 김수연 선수와 서울 정진희 선수가 골을 막으러 나왔다. 둘 다 내가 참 좋아하고 아끼는 골키퍼들이다. '과연 어떤 골키퍼가 이길 것인가?' 하며 흥미롭게 경기를 지켜봤다.
골 앞에서 슈팅을 준비하는 선수와, 이걸 쳐내려는 골키퍼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나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진다. 평소엔 그냥 던져도 충분히 골인시킬 수 있는 실력의 슈터들도 승부던지기에 나서면 부담감으로 공이 빗나가기도 한다. 골키퍼 또한 부담감이 만만치 않다. 상대편이 먼저 세이브하기라도 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모두가 집중력, 순발력, 판단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역시 승부던지기는 정신력 싸움이다.
정진희 선수가 다리를 쭉 뻗으며 부산 지은혜 선수의 슛을 막았다. 김수연 선수도 이에 지지 않고 서울 우빛나, 오예나 선수의 슛을 쳐내며 연속으로 세이브를 쌓았다. 이어서 정진희 선수가 부산 베테랑인 조하랑 선수의 슛까지도 막았다. 끝으로 서울시청 윤예진 선수가 공을 쏘았다. 김수연 선수가 그 슛을 정확하게 막았다. 그 순간 김수연 선수는 안도감으로 골대 안에 주저앉고 네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산시설공단 선수들은 그런 김수연 선수에게 신나게 달려들며 환호했다.
그동안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김수연 선수가 이렇게나 감격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준결승전 티켓을 두고 승부던지기를 치르며 골키퍼인 그가 얼마나 압박감이 컸을지, 그리고 승리한 이 순간 얼마나 다행스러웠을지 그 심정을 헤아려보게 된다. 역시, 승부던지기는 언제 봐도 박진감이 넘친다.
이날의 활약이 한몫했던 걸까? 얼마 후 김수연 선수는 또다시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상대편이었던 정진희 선수와 삼척시청 박새영 선수와 함께 태극마크를 달고 골문을 지키게 되었다.
경남개발공사의 골키퍼 오사라 선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골키퍼가 득점하는 건 꽤나 드문 일인데, 그는 이걸 한 시즌에 두 번이나 해냈다.
양 팀이 유난히 팽팽히 맞서는 날이었다. 그러다가 인천광역시청에서 2분 간 퇴장이 여러 번 나왔다. 이런 상황을 잘 이용해 경남개발공사가 점수를 따냈다. 그것도 무려, 필드 선수가 아닌 골키퍼의 득점!
https://www.youtube.com/live/RdiYt0VgHyI?si=Ytv7WPoN5Os5b7wx&t=5533
인천이 2분 간 퇴장으로 한 명이 부족한 상황에서 공격을 하던 중이었다. 골키퍼 에어리어로 공이 빠졌고, 이걸 오사라 선수가 냉큼 받더니 맞은편 골을 향해 그대로 던졌다. 정확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공은 아주 시원하게 골망을 흔들었다. ‘골 넣는 골키퍼 오사라’가 바로 이거다!
‘도움닫기도 없이 그대로 던져서 들어가다니 힘이 정말 좋아요’라며 중계 해설 테이블에서도 감탄했다. 공이 날아가는 걸 지켜보던 오사라가 골인을 확인하자마자 함성을 지르며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에 나까지도 흥분되었다. 너무나도 짜릿한 순간이었다.
오사라 선수는 2022-2023 시즌 동안 골키퍼 중 최다 어시스트(16개)와 득점(2개)을 기록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하고 인터뷰를 하면서, 해설위원인 조은희 선생님이 오사라 선수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https://www.youtube.com/live/xslqy70j3pE?si=gLjQMsO51j4YX0lZ&t=5524
골키퍼는 첫 번째 공격수라고 생각한다.
16개의 어시스트를 했다는 건 곧 16개의 골을 넣게 해 줬다는 뜻이다.
그만큼 롱패스는 오사라 선수의 전매특허라는 걸 모두가 인정한다.
이번 글의 제목으로 인용하기도 한 '골키퍼는 첫 번째 공격수'라는 말이 마음에 깊게 와닿았다. 오사라 선수도 인터뷰 때 이 말을 듣는 순간 '오...!' 하며 감탄한 표정이 보였다.
경기 전 오사라 선수가 코트에서 워밍업 할 때 롱패스 연습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그때마다 느끼는 건 팔 스윙과 반동의 힘이 정말 세다는 것이다. 핸드볼 코트가 이쪽 골대에서 저쪽 골대까지 세로로 40m가 된다. 공을 던져 그 긴 거리만큼 멀리 쏘아 보내는 걸 보고 있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골키퍼를 볼 때 처음에는, 공 맞으면 아프겠다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그런데 이제는 세이브하거나 실점했을 때 반응하는 모습에 더 집중하게 된다. 골을 막으면 기쁘지만 골을 먹으면 갖가지 후회가 들며 속상할 텐데, 아쉬움을 얼른 털어내고 당장의 앞을 향해 초집중한다. 그 모습에 많은 걸 느끼고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