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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름 May 11. 2024

나는 너의 마음에 다녀왔다_이제야, 베란다

여길 봐!


손톱이 자랐다. 잘 자란 상추처럼 무성했다. 벌레먹은 케일처럼 들쑥날쑥하기도 하고.

손톱 깎을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주말에도 계속 원고를 수정하고, 수업 준비를 하다보니 아플 시간이 없었다면 좋은 일인가?(좋은 일이네;;)


커피인지 물인지 별 맛도 못 느끼며 들이키고, 다시 쓰고 또 썼다. 금요일 토론수업 ppt를 만들었다. 결론적으로는 수업자료도 쌓이고 글 쓰는 것도 좀 더 나아졌으려나, 하던 찰나 베란다를 보았다. 밀려오는 푸릇푸릇 너희들은 날 기다렸구나.


베란다 때문에 이 집에 이사를 왔는데, 봄이 오고 제대로 나가보질 못했다니. 라일락은 벌써 지고 있고, 상추는 무럭무럭 자랐고, 수국은 꽃망울이 맺혔는데! 저렇게도 5월이라고 이리로 좀 나와보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나는 죄없는 머리를 뜯으며 노트북에 쳐박혀 있었다.


어두워지는 저녁. 나는 급하게 시집을 들고 베란다로 뛰쳐나갔다. 해가 지기 전에 꽃들과 마주하고 시집을 천천히 읽고 싶어서.


자두


익은 속살에 어린 단맛은 꿈을 꾼다 어제 나는 너의 마음에 다녀왔다 너는 울다가 벽이 기대되면서 어두운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너의 얼굴에는 여름이 무참하게 입고 있었다 이렇게 사라져갈 여름은 해독할 수 없는 손끝만큼 아렸다 쓰고도 아린 것들이 익어 가면서 나오는 저 가루는 눈처럼 자두 속에서 내린다 자두 속에서 단 빙하기가 시작된다 한 입 깨물었을 때 빙하기 한 가운데에 꿈꾸는 여름이 잇속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말 이전에 시작된 여름이었다 여름의 영혼이었다 설탕으로 이루어진 영혼이라는 거울 혹은 이름이었다 너를 실핏줄의 메일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다시 자두나무를 바라보았다 여름 저녁은 상형 문자처럼 컴컴해졌다 울었다, 나는 너의 무덤이 내 가슴속에 돋아나는 걸 보며 어둑해졌다 그 뒤의 울음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자두뿐이었다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 지성사 40p


어제 너의 마음에 다녀온 나

무참한 여름

해독할 수 없는 손끝

설탕으로 이루어진 영혼

실핏줄의 메일

너의 무덤

울음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자두나무


해는 지고 말았다. 컴컴한 베란다, 어둠속에서 시집을 쥔다. 겨우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저 그런 말.


현관문 앞 택배를 챙기며 나른한 하품을 하고 저녁을 고민하는 일상. 닿을 수 없는 글들을 질투하고 뭐라도 써보겠다고 자판을 두드리는 오후. 데미안을 읽고 또 읽으며 밑줄을 긋는 밤. 바라고 원했던 것들이 이루어진 세계에 살면서 나는 왜 자꾸 고개를 드밀고 헛것을 쫓아가려할까.


그만하면 됐어.

여길 봐.


베란다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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