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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Jan 07. 2024

제의(祭儀) 혹은 기억

2024년 1월 7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영하 2도~0도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제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죽은 자들을 소환해 내고, 그이들을 둘러싼 갖가지 생각에 사로잡히는 거다. 하필이면, 그이들은, 해가 바뀌는 때에 죽어버려서, 사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는 것이다. 어느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 단련된 마음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한 해의 아침이라 할 1월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구나. 게다가, 내게 1월은, 단련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때가 아니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기보다, 지난 시간의 부스러기를 안고 또 걸어가야 하는 지점. 내게 1월은 늘 그런 거였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주기적으로 돌다가 5년 전 이 자리를 지나갈 때쯤, 그리고 9년 전 같은 자리를 지나갈 때쯤, 어머니와 형은 별이 되었다.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원자로 해체되어 우주의 일부가 되었다. 혹, 그이들의 원자가 지구 대기 밖으로 탈출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 있다면, 그이들은 분명 다른 별의 일부가 되어 존재를 이어갈 게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에라도, 그이들은 여기 지구에서, 어느 산등성이의 흙속에, 어느 들판에 핀 꽃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존재의 이야기를 이어가겠지. 삶과 죽음이 실은 한 몸뚱어리라는 걸, 존재와 부재가 기실 하나라는 걸,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구나.


어머니가 한 줌 재로 타버린 날이, 하필, 장자의 숨이 멎은 날과 등을 맞대고 있어서, 난 그게 참 기이하게 느껴졌더랬다. 만약, 전통적인 믿음에 따라, 장자의 영혼이 자신이 무화된 날에 맞추어 지상에 남은 자들을 만나러 내려온다면, 막 재가 된 육신을 떠난 어머니의 영혼은, 남겨둔 지아비를 차마 떠나지 못해 허공을 맴돌던 그이의 영혼은, 사랑하던 장자의 영혼과 만났을 게다. 죽기 전까지, 장자가 먼저 우주의 일부로 돌아갔다는 걸 알지 못했던 어머니는 너무 놀랐으려나. 그리하여 깊은 탄식을 내뱉었으려나. 생때같이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대체 거기서 무얼 하는 거냐고 장자를 나무랐으려나.


1월 8일 오후 3시에 치과 예약을 해두었다. 무너진 잇몸에서 어금니를 발치하기로 했다. 나처럼 하등 쓸모없는 생각을 자주 하는 사람은, 치아를 가차없이 제거한 뒤 아픈 잇몸을 앙다물며 집으로 돌아갈 오후 5시쯤, 그러니까 5년 전 지구가 태양 공전 궤도상 이 지점을 지나며 자전 주기상 이 시점에 있을 때, 어머니의 숨이 끊어졌다는 걸 기억하게 된다. 게다가, 무너진 잇몸은, 정확히 내 나이 때쯤, 망가진 잇몸을 들여다보며 괴로워했던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고, 심지어는, 세 번째 어금니 발치라는 사실에서, 붕괴된 (원)가족사와 뿌리째 뽑혀버린 세 남매의 이야기까지 자유연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고 과정은 아니지만, 그저, 오랜 잇몸 통증에서 비롯된 신경증적 사고라고 치부해 버리자.


해가 바뀌면, 새해가 되면, 마음을 다잡기는커녕, 그저, 죽은 자와 죽음을 생각하는 게 내 일이라서, 사실을 말하자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보다, 올해도 죽음을 생각하며 시작했느냐는, 죽은 자를 생각하며 시작하는 마음이 어떻느냐는 인사가, 내게는, 더 적확한 인사인 듯도 하다.


며칠 전, 아버지를 만나러 갔지만, 곧 당신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날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이에게, 어머니 얼굴이 생각나느냐고 물었다.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건, 아버지에게서 들은, 가장 서글픈 말이었다. 열여덟에 만나, 어머니가 일흔여덟에 눈을 감을 때까지, 60년이었다. 생애 전부를 함께한 존재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 그이의 얼굴조차 떠올릴 수 없다는 것. 아버지의 삶은 이미 져버린 것이다. 언젠가 오고야 말, 그이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심장이,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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