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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Feb 04. 2024

봄 앞에 선, 상념

2024년 2월 4일, 어둔 구름, 밤부터 눈비, 영하 1도~3도

입춘에 날이 맑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지만, 잿빛 구름이 이렇듯 낮게 드리워진 입춘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품기에 어쩐지 적당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밤부터는 눈비까지 예고되어 있으니, 이쯤 되면, 봄을 뒤로 물리려는 겨울의 수작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기까지 하는 거다. 헛소리인 줄 알면서도 지껄이는 건, 이렇게 살아 뭐 하나 자괴하다가도, 결국은 살려는 습성을 이기지 못한 채, 따뜻해질 나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난해 봄 앞에 서서는, 그 입춘에는, 생의 형언할 수 없는 무의미 속에서도, 기어코 절멸할 존재의 운명 앞에서도, 다시 오는 봄, 또 한 번 꿈꾸며 살아도 괜찮을 거라는 헛소리를 늘어놨는데, 올해는 하필 입춘날 잔뜩 흐린 데다 눈까지 올 건 뭐냐고 투덜대고 있구나. 제정신은 아닌 거다.


오래전, 아버지는 이맘때가 되면 立春大吉 建陽多慶 문구를 적어 대문 앞에 붙여두곤 했다. 절기를 따라, 자연의 순환에 기대 생을 이어가던 이들에게는 봄을 맞이하는 것이 지금과 완전히 다른 일이었을 게다. 생이 사멸한 듯 숨죽이던 겨울을 지나, 다시 기지개를 켜며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시절이 왔음을, 생이 다시 시작될 것임을 감지하며, 이를 기꺼이 맞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이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미싱을 돌리고 또 돌리는 심정으로 노동을 하고 밥을 버는 오늘날에 맞이하는 입춘과는 결이 다른 셈이다. 지금의 봄은, 차라리 T.S. 엘리엇이 일갈한 잔인한 봄과 더 가깝다고 말하는 게 나을 듯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봄을 기다리는가. 그런 것 같다. 실은 수줍게 얼굴을 내미는 잎사귀와 뽀얗게 피어오르는 꽃잎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들을 만나면, 왜 또다시, 기어이, 생을 이어가려 하는 거냐는 못된 소리를 건네지 않을 작정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말이다. 생을 이어가는 비루함에 대한 자괴는 나 하나로도 족하다. 나는, 누구의 노랫말과 달리, 꽃보다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다.


어느 봄에는, 생의 약동을 시기라도 하듯, ‘죽이고 싶다’는 말을 탄식하며 내뱉곤 했다. 주위에 아무 ‘인간’도 없었지만, 발화된 말에 혼자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고백하자면, 봄에만 살의를 드러낸 건 아니다. 무슨 계절에라도, 나는 ‘무엇’을 죽이고 싶어 했다. ‘무엇’이 적절하다. 그건, 특정할 수 있는 대상, 이를테면 타자나, 나 자신을 의미한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중얼거림이었으니, ‘누구’는 아니었던 거다. 무슨 의성어 내지 의태어처럼 터뜨리는 그 말이, 물리적 대상의 숨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숨은 욕망이 흘러넘친 게 아니라는 점은 쉽사리 자각할 수 있었다. 난, 이를테면, 칼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 평범한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어제도, 채칼로 무를 조각내다가, 행여 칼날에 베일까 겁을 내며, 아직 충분히 썰어낼 수 있는 무 덩어리를 얼른 내려놓은 게 나다.


입춘의 소회를 밝히다 말고,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지 모르겠다만, 사실을 말하자면, 개도 고양이도 필요에 따라 풀을 뜯어먹으니, 나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객쩍은 소리를 늘어놓는 걸로 치자. 물리적 실체에 대한 어둡고 악한 욕망이 아닌,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스스로에게 느닷없이 벼락을 내리꽂는 것과 같은, 이 살의는, 뒤집어보면, 생에 대한 가녀린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살의의 고백 이후,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전혀 다른 종류의 고백을 흘리기도 했던 것이다. ‘살고 싶어.’ 멀쩡히 두 눈 뜨고 살아 있었기에, 심장은 별 이상 없이 뛰고 있었기에, 들숨과 날숨도 비교적 규칙적으로 조절되고 있었기에, 이 뜬금없는 독백은 살의의 고백 뒤에 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참 괴이한 것이었다.


생의 무의미함과 존재의 덧없음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는 자에게, 기어이 생을 살아내려는 욕망은 간혹 절망과 수치로 다가오기도 한다. 더욱이, 의미 없이,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존재들, 찰나를 살다가 서글픔만 남긴 채 무화된 존재들을 생각하다 보면, 끝내 부여잡을 생이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죽이고 싶을 수밖에. 이 불가해한 살의는 생에 대한 의지를 부여잡으려는 존재와, 생에 대한 의지를 경멸하는 존재 간에 벌어지는 투쟁 중 떨어져 나간 파편과도 같은 것이다.


입춘이 무엇인가. 봄이 올 거라는 얘기다. 봄이 온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생의 순환이 다시 시작되리라는 얘기다. 생의 이야기는, 새로 날 잎사귀와 다시 필 꽃을 설레어하는, 희망의 서사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부러져버릴 가지와 썩어버릴 뿌리와 열매를 맺지 못할 꽃잎이라는, 절망과 고통의 서사를 담고 있기도 하다. 다시 봄이 온다는 것에는, 그 모든 이야기들이 되풀이되리라는, 불길함과 기대감이 섞여 있다. 늙어가면서 좋은 점이 있다면, 기대감이 줄어드는 만큼 불길함의 크기도 작아져간다는 것이다. 삶에 초연해져서가 아니라, 그저, 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살의의 고백도 예전만큼 자주 찾아오지는 않는다. 생이 남루해지면서, 생에 대한 욕망도, 생에 대한 경멸도, 점점 그 힘을 잃어간다는 뜻이겠지.


허나, 가끔은, 그런 제 존재가 서글퍼진다. 뿌리로부터, 가지까지, 잎사귀까지, 온 존재로 낡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을 맞을 때마다, 점점 허물어지는 나무가 되어가는 일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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