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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글 Jun 19. 2024

가고 싶은 여행지


허수아비와 오로라




2006년, 나는 16살이었다. 막 중학교 3학년이 되었던 나는 새학기 시작 날에 맞추어 전학을 가게 되었다. 당시 이성에 관심이 많아서 여중에서 남녀공학으로 간다는 설렘에 가득차 여중 친구들에게 한껏 자랑을 했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졸업을 1년 앞둔 중3이어서 교복을 크게 사지 않아도 되었다. 딱 맞는 교복을 입어보고 거울에 비춰보는 들뜬 나를 보며 엄마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하셨다. 하지만 새학기가 시작되고 첫 남자 짝꿍을 만난 나는 너무 딱맞아 꽉끼는 교복 단추를 푸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훨씬 마른 체형의 뿌연 은테 동그란 안경을 끼고 머리를 바짝 깎은 공부를 잘하는 남자이였다. 너무 말라서 마치 허수아비에 큰 옷을 걸쳐놓은 듯한 행색이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나는 옆자리보다는 칠판에 집중을 하였다. 하지만 당시 나는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변명이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바빴으며, 다른 남자아이들과 친해지는데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학교에 스며들 무렵, 첫 중간고사 수학시험 점수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한 자리 수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공부는 안했지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있었던 모순적인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무리 수학을 싫어한다지만 한 자리 수라니. 그날부터 수학시간에 집중하려고 애썼으나, 어불성설이었다. 기초가 없는데 무슨 수업을 듣는단 말인가. 그때 옆에서 조용히 집중하던 짝꿍이 눈에 띄었다. 선생님이 연습문제를 푸는 시간을 주셨고 나만 빼고 모두가 집중한 그때, 용기를 내서 짝꿍에게 처음 말을 걸었다.



“이거 어떻게 푸는거야?”



내가 그에게 수학을 질문하고 그 아이가 문제를 풀어준 순간부터 우리의 사이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그 아이에게 과외아닌 과외를 받게 되었고, 기초가 아예 없었지만 쉬운 문제부터 차근차근 풀어가니 수학에 조금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친한 친구와 수학학원을 등록하기도 했다. 대화를 자주 나누게 되었고, 의외로 그 아이는 지루한 친구가 아니라 대화가 정말 잘 통하는 친구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잘 통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일본 드라마.



그 당시 <고쿠센>, <노부타 프로듀스>, <드래곤 사쿠라>, <꽃보다 남자> 등등 학생들에게 로맨스를 가져다 준 순정만화를 이어 일본 드라마 열풍이 불던 시기였다. 사춘기를 맞이하여 당연스럽게 로맨스를 좋아했던 나도 그 열풍에 직격탄을 맞은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 주위 여자친구들은 한국 드라마를 더 좋아했으며, 약간의 마이너한 취향을 좋아했던 나는 일본 드라마를 즐기고 있어서 대화할 친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옆자리의 허수아비가 일본 드라마를 좋아한다니. 그때부터 우리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워져서 쉬는시간에도 자리를 뜨지 않았고 짝꿍과 시도때도 없이 낄낄댔으며 심지어 웃기게도 당시 나의 남자친구조차 우리 사이를 질투했더랬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짝꿍에게 추천받은 드라마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라스트 크리스마스>라는 드라마였다. 남자주인공의 집은 옆집과 문 하나를 두고 연결되어 있는데 어느날 옆집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를 오게 된다. 그것이 바로 당연하게도 여자주인공이다. 또 우연찮게도 알고보니 그 여자주인공은 남자가 다니는 회사 상사의 비서. 또 드라마답게 알고보니 그 여자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으며 뭐, 예상하다시피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로맨스 포인트는 바로 두 주인공이 투닥투닥하다가 내기를 하게되는데, 먼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사람에게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옐로우 나이프’의 여행비용을 대주기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이 다니는 회사는 스키 용품을 파는 곳이며, 드라마의 배경은 제목에 써있듯이 크리스마스 즈음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새하얀 설경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는 노래들과 배경 때문에 설렘이 배가 된다.



당시 나는 해외여행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고, 또 해외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나와는 아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드라마의 크리스마스 분위기, 로맨스, 여행에 대한 동경, ‘오로라’라는 몽환적인 분위기 등이 얽히고 설켜 나에게 오로라는 한 가지 꿈이 되었다. 그리고 그 꿈에 대해서 짝꿍과 밤새도록 버디버디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일본 드라마보다 재밌거나 더 관심을 쏟아야 할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었을까.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부터는 그 아이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그렇게 버디버디가 점점 잊혀지고 카카오톡이 유행하던 스무살이 되자 나는 그 친구가 찾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는 싸이월드에서 그 친구를 찾아냈고,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이어져 결국 만나게 되었다. 만나기로 한 당일까지도 나는 그 친구와 나누게 될 풍부한 대화거리가 기대되었고 앞으로 가까워지게 될 그애와 나의 사이도 기대되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애를 만나고 나의 기대는 무참히 공중에서 분해되었다. 허수아비 같이 허허실실로 웃던 그 아이의 수줍은 미소는 여느 성인 남성의 그것으로 바뀌어져 있었고, 내가 무엇을 말하던 공감하고 대답해주던 대화는 어느새 그애 본인의 자랑만을 내뱉는 대화가 되어 있었다.



그 아이와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오로라를 떠올렸다.








지금껏 나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오로라를 보러 가는 것만은 외면해왔다. 막상 그것을 직접 마주치면 느껴질 허망함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로라를 눈으로 잡으면 나무막대가 사라진 허수아비처럼 털썩 주저앉아버릴 꿈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을 만나고 허망함을 마주칠 용기가 생겼다. 남편은 그 허망함을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약속했다. 결혼기념 10주년에 맞춰 오로라를 보러 가자고. 그곳에서 나는 10년의 충만함과 함께 오로라를 넘어선 또 다른 제2의 오로라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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