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 쉼, 커리어
불확실함 속 확실한 저 아름다운 Life is good
: DOK2 - Life is good
회사가 나를 놔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회사를 놔주지 않는 것 같다
같이 병원을 가기 위해 옷을 입는 중에 팀으로 맞춘 후디를 입고 나가려고 하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단지 회사옷을 아무렇지 않게 아무 곳에나 입고 다니는 나에게 장난을 친 것이다. 같이 가는 병원, 주말에 가는 마트, 심지어 다른 회사 커피챗에도 입고 갔다. 가장 편하고 이쁜 핏이기도 하고 딱히 로고나 그런 것들은 신경 쓰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프로덕트 자체는 잘못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 문장이 내게는 강한 울림을 주었다.
사실 저 말이 맞다.
현재 회사 안에서 나는 여러 경험을 했고 많이 성장할 수 있었고 급여, 복지, 주 1회 재택, 사무실 환경 등 모든 것들이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내 미션을 설정하고 도전하며 실험할 수 있는 것도 정말 보람 있었다. 지인분들을 포함해 내가 가장 행복하게 일하고 있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얼마 전 블라인드에 올라온 회사의 리뷰를 보았는데 꿈을 꾸는 회사였고 꿈을 꿔서 좋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도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회사가 어려워지기 직전에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회사 리뷰를 남겨보기도 했다. 5점짜리 리뷰로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 줬으면 하는 마음에...
여러 이유들과 사정들이 있고 말 못 할 내용들도 많지만 정말 아쉽게도 서로 놔줘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2월 중순쯤 이제 공식적인 퇴사가 이뤄질 예정이다. 현재는 인수인계 문서들을 작성하고 있고 관련 서류들을 작성하고 발급하고 있다.
무엇보다 열심히 몰입했던 존재가 사라진다고 하니 아쉬운 것은 오히려 나였나 보다. 항상 금요일 퇴사 그다음 주 월요일 입사의 패턴을 보이던 내 커리어는 몰입할 대상과 시간들이 항상 존재해 왔지만, 앞으로 당장 그 존재가 사라진다고 하니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지금도 많이 쉬면서 올해의 키워드인 '즐거움'을 많이 경험하고 있다.
잠깐 짬 내서 다녀온 일본 먹방 여행은 짧게 후쿠오카를 가면서 라멘과 오꼬노미야끼 같이 먹고 싶은 것만 쏙쏙 먹고 택시 타고 숙소 와서 쉬면서 노트북 하고 다시 나가고의 반복이었다. 짧은 시간에 돈도 많이 썼지만 그만큼 행복한 시간들이었고, 갑자기 불안정한 내 상황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확보한 것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노트북 안에서는 날카로운 슬랙들이 오가고 메일로는 노무사분과의 확실하지만 씁쓸한 상담내용들이, 여러 채널들을 통해선 커피챗 연락들이 오고 있었다. 그런데 노트북을 닫고 휴대폰의 데이터를 잠시 끊고 나면 세상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이치란 라멘에 집중하지 않고 커리어를 생각하는 것은 ROI가 낮은 일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잠깐 환기가 되었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외에는 포천에 약과를 사러가기도 하고, 병원도 같이 다녔다. 무엇보다 집에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소소한 즐거움들이 복에 넘치게도 쌓여갔다. 커리어는 잠깐 금이 갔지만 그 틈 사이에서 우리는 즐거움을 찾아 일본과 집 가리지 않고 공간을 넘나들었다. 밀린 빨래와 청소 그리고 주민센터를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가는데 백수의 삶 또한 바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한 번쯤 쉬어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경험이기도 하다.
이직이 급하진 않다.
이유는 다양하게 있지만 하나씩 훑어보자면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과거의 나에게 감사하며 아직은 여유가 있다. 과거의 나는 첫 회사 때 아주 운 좋게 PB 센터장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며 그때 처음으로 펀드 수익을 경험했다. (물론 이 펀드는 코로나 때 더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지만 아쉽진 않다) 이때부터 개인적인 목표로 "적어도 2년 치 연봉 정도의 현금은 개인 투자금으로 활용하며 유동자산을 확보해 두자"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 목표와 투자원칙은 결혼 때 많이 무너졌지만 일정 부분 달성했기 때문에 개인 런웨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의 런웨이는 마이너스였지만 개인 런웨이는 6개월 ~ 1년 가까이 확보해 두었다. 그리고 여러 대출들도 알아보며 런웨이 확보에 나섰다.
절대 의도적 적자가 되지 않을 구조를 위해 :)
봄과 함께 세상에 찾아오는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할 것이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항상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딸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좀 더 잘 정리해 두고 세상에 첫걸음을 딛으며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아기용품들이 얼마나 많고 빨래하고 건조하고 준비할 것들이 왜 그렇게 많을까.... 잠깐 쉬지 않으면 집중하기 쉽지 않은 일들이 많이 쌓여있다 :)
그렇지만 기회는 열려있다.
문을 닫고 동굴에 들어가기보다는 더 많은 경험을 위해 이곳저곳 다녀보고 많은 사람들도 만나볼 예정이다. 작년 초 내가 존경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많이 성장했듯이
https://brunch.co.kr/@htaegy/5
커리어 또한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는 더 다양한 영역을 다루면서도 문제 해결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고 싶기도 하고 앞으로 내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고민하다가 Product Manager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PM에 대한 고민을 담은 글은 따로 써 내려가고 있지만, 지금 상황과 앞으로의 기대하는 모습에서는 매력적인 포지션과 R&R임에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미션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전히 할게 많다.
포트폴리오도 만들어야 하고 내 브랜딩도 해야 하고 사이드잡도 해야 하고 정신없다. 그 과정에서 꾸준히 콘텐츠를 쌓아가며 재생산 가능한 그리고 실체를 쌓아가는 성장을 할 것이다.
앞으로의 나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혹시라도 이직을 하며 커리어를 이어가더라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0순위가 되는 것은 분명히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