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직장 생활
일을 진행하기 전에 팀원들과 충분히 아이디어 회의는 했는지 따지듯 묻는 소리. 직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만 하지 말고 의견을 묻고 들으라는 얘기.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했지만 나는 얼굴이 빨개졌고 귀까지 달아올랐다.
회의실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고 괜히 휴게 공간을 빙빙 돌았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2024년 추계 체육대회를 앞두고 사내 취미 동아리별로 퍼포먼스가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주말 농장 동아리원. 둘러보니 다른 동아리는 의상에 율동까지 준비했는데 우리 동아리만 준비한 게 없는 것 같아 비교가 됐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동아리원 몇 명을 만났다. 옳거니 잘됐다 싶어 다가가 옆자리에 비집고 앉았다. 다른 동아리는 준비 많이 했던데 우린 뭐하는지 아냐고 물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담당이 과일 탈 쓰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과일탈만 쓰고 입장하긴 식상해 호미를 들고 잡초 뽑는 퍼포먼스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야기는 무르익어 하나, 둘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일바지를 입으면 좋겠다며 서로가 깔깔 웃었다.
문제는 ‘누가 까칠한 동아리 담당자인 Y에게 말할 것이냐’였다.
“Y한테는 내가 말할게요.”
그때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식사하시던 대표님이 말했다. 대표님은 식사를 하시다 말고 전화를 걸어 Y를 호출했다. 한달음에 식당으로 올라온 Y. 사람들은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고 미쳐 식사를 마치지 못한 우리들만 어색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표님은 처음엔 Y 생각을 물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대표님 목소리는 차츰 냉랭해졌고 추궁하듯 따졌으며 사람들과 소통 안 하냐며 Y를 꾸중하셨다. 짧은 순간 나는 평소 일방통행인 그가 못마땅할 때도 많았기에 반쯤은 고소했다.
그런데 대표님은 갑자기 과장을 호출했다. 허겁지겁 달려온 과장은 영문도 모른 체 그저 ‘네. 네.’ 대답만 연발했다. 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식당을 빠져나온 Y는 직속상관에게 한소리 듣고도 회의실로 들어갔다. 벌써 세 번째. 이번엔 담당자뿐 아니라 과장, 팀장, 국장까지 줄줄이 불려 갔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면 태평양에서 폭풍이 인다고 했던가.
그쯤 되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고 이쯤에서 빨리 일이 마무리 됐으면 하고 바랐다. Y가 사무실을 드나들 때마다 시커먼 아우라를 뿜으며 찬바람을 일으켰으니까. 게다가 Y 책상은 내 뒤에 있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도 그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곧 나는 Y에게 불려 갔다. 구내식당에서 대화를 나눴던 이들도 같이.
Y는 얼굴이 벌게져서 본인이 공유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며 따져 물었다. 누구 하나 자신이 바삐 뛰어다니며 준비할 동안 도와주고 먼저 나선 사람 있냐면서 긴 잔소리를 이어갔다.
화 잘 내는 일방통행 상사에게 불려 가 싫은 소리를 듣는 상황. 처음엔 꿀 먹은 벙어리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구구절절 ‘그게 아니라고.’ 상황을 설명하고 해명했다.
사실 Y는 바쁘다는 핑계로 의견을 묻지도 않고, 혼자 계획했으며 물어봐도 “내가 다 준비했으니까 그냥 오시면 돼요.”라거나 “바나나옷, 사과옷 입을 거예요.”라고만 했다. 무엇보다 평소에도 날카롭고 까칠해서 말 걸기 힘든 상대다. 대놓고 “난 말 거는 거 싫어해요. 나한테 질문하지 마요. 관심 갖지 마요” 가 주요 레퍼토리니까.
그렇다고 Y를 싫어하거나 곤란해지길 바란 사람은 없었다. 우린 그저 대화하며 의견을 나눴고 어떻게 Y에게 의견을 전할까 고민했을 뿐.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호흡은 거칠어졌고 분위기는 싸늘했으며 대화도 매끄럽지 않았다. 모두의 마음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어쩌면 좋을까.
....
[내 감정에 집어 먹히지 않는 법]에서 데이비드 J. 리버만은 나의 어떤 행동으로 화가 난 사람을 상대할 때는 책임을 떠넘기거나 변명을 하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내 입장을 들어달라고 하지 말고 우리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이때 핵심은 진심을 담은 사과 한마디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고 상대방이다. 내 생각을 강요하거나 다른 사람 사무실에 쳐들어가서 내 입장을 들어달라고 종용해선 안된다.] p136
[우리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실제로 입에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이 말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용서를 구하는데 빠뜨려서는 안 될 말이다.] p138
“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그냥 듣기만 했어요. 제 책임입니다.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내가 말했다.
큰소리로 외친 말에 Y뿐 아니라 변명을 늘어놓던 일행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내게서 시선을 거둔 Y가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말도 명확했다.
“내가 원한 건 진심 어린 사과.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이 한마디입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의견 내신 대로 진행할 테니 각자 준비 부탁드립니다.”
사과 한마디에 깔끔하게 털고 일어나는 그의 태도는 멋졌다. 그는 까칠한 사람이고 소통이 잘된다 말하기엔 미흡한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고 스스로를 돌아볼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올봄 20년의 공백을 뚫고 취업한 나는 수습은 아니어도 아직은 배울 것이 많고 서툴다. 언젠가 사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항상 말 조심하세요.”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말.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리버만의 말처럼 진심으로 말해야 전달이 되겠지만, 진심이 아니더라도 먼저 입술로 내뱉고 나면 상황 수습이 쉬워진다. (물론 이날 나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그가 야단맞길 바라진 않았으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화난 사람과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럴 땐 전혀 아닌 말에도 경청하고 공감해야 한다. ‘그래 그 사람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먼저 화난 상대의 감정을 해소시켜야 한다. 문제 해결은 그 후에라도 늦지 않으며 좋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마음이 편안할 때 해야 효과가 있는 법이다.
잘잘못을 따지는 건 부질없다. 자존심은 깊이 묻어두고 다시 꺼내오지 않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그가 나보다 낫다. 그럴 수도 있다. 괜찮다. 이만하면 됐다. 감사하다. 더 좋아진다.’ 생각하며 겸손히 자세를 낮추면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할 수 있다. (가끔 억울한 순간을 맞이하고 피해야만 하는 악당을 만나고 깨어지는 순간도 오는 게 인생이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회사 사람들과 잘 지내려면 ‘말 조심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우리 언행의 목적과 의도가 깨끗하고 어디서든 누구에게라도 거리낄 것이 없더라도 말이다. 살다 보면 의도치 않은 순간을 맞닥뜨리고 변명을 늘어놓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으며 내가 쏜 화살에 내가 맞기도 하니.
2025년에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친절하자. 좋은 말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고 타인에게 해 될 말은 하지 말자. 의도치 않았어도 일이 잘못되었거든 적절한 때에 잊지 말고 사과하자. 새해엔 행복하고 성공적인 대인 관계로. 슬기로운 직장 생활로 아침 해처럼 환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