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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선 Jun 21. 2021

하지夏至

06.21.(양력), 태양 황경 90°

태양이 황도의 가장 북쪽인 하지점夏至點에 이르는 시기다. 때문에 북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태양의 남중고도가 가장 높아지지만 남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태양의 남중고도가 가장 낮다. 메밀 파종, 누에치기, 감자 수확, 고추밭매기, 마늘 수확과 건조, 보리 수확과 타작, 모내기, 그루갈이용 늦콩 심기, 대마 수확, 병충해 방재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남부지방에서는 단오를 전후하여 시작된 모심기가 이 무렵에 모두 끝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다. 농촌에서는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더워지기 전에 머리도 가볍게 다듬고 흰 머리 염색도 할 겸 오랜만에 늘 가던 동네 미용실로 예약 전화를 걸었다. 조금만 늦어져도 찜통이 되거나 장마가 니 미용실에 가려거든 하지夏至 전에 움직이는 게 좋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비통한 소식을 알려주었다. 담당 디자이너인 J 선생님이 5월 말에 결혼을 하게 되어 그만두었다는 거다. 소식을 전해준 직원 목소리도 그랬지만 듣는 나도 아쉬워서 허억!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2016년에 마포구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같은 곳만 다녔으니 어느덧 6년째였다. 비록 미용실을 1년에 많아야 두세 번 가는 처지라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J 선생님은 나를 ‘1년에 두세 번 오는 손님’으로 기억하기 시작했고 그게 내심 기뻤다. 내게도 드디어 단골 미용실이 생긴 것 같았는데 1년에 두세 번 오는 단골 손님이었으니 결혼 소식을 전하기엔 텀이 너무 길었겠지.


나는 미용실하고 별로 친하지 못하다. 십대부터 미용실에만 가면 몸도 마음도 불편했다. 모발이 굵은데다가 숱도 많아서 언제나 담당 선생님을 놀라게 했고 다른 손님보다 제품과 시간과 노동력이 배로 드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나이가 들고 흰 머리까지 많아지고 나서는 머릿속을 보이기가 더 부끄러웠는데, J 선생님과는 오래 보아서 그런지 마음이 편했다. 처음엔 나처럼 말이 별로 없고 이런저런 질문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나는 앉아서 거의 책을 읽거나 꾸벅꾸벅 졸았고 시술이 다 끝나면 잘 냐는 인사를 받곤 했다. 1년에 두세 번 만나는 게 전부지만  때마다 반겨주고 휴가 계획 같은 것(주로 하지 즈음에 자주 가서)을 물어봐주는 게 다정하게 느껴졌다. 한 번에 많은 얘기를 나누는 건 아니지만 만남이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더 알아가는 관계도 썩 마음에 들었다. 돌이켜보니 J 선생님은 내가 도서관에서 근무한 시간부터, 퇴사하고 출판사를 차려 혼자 책을 만들고 있는 시간까지 다 알고 있는 셈이었다. 지난해 9월, 그러니까 J 선생님을 만난 지 5년째 되는 어느 날에는 『자책왕』에 사인을 해서 선물로 주기도 했다. “제가 만든 책이에요. 표지에 있는 사진이 저예요. 흐흐.” 바로 그날이었는지 다음날이었는지 인스타그램에 ‘#자책왕’으로 검색되는 사진 중에 J 선생님이 찍은 사진을 발견하곤 입을 틀어막고 좋아했다.    


그리고 이건 지난 2020년 9월 1일의 일이다. 여름 내내 ‘서울 아트북 페어(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출품할 책을 만들며 식은땀을 흘리느라 더위 같은 건 잊고 살았는데, 실은 그것보다 더 긴장되었던 일이 있었다. 온라인 북 페어 기간 중에 프로그램 하나를 맡게 된 거였다. 내가 글을 쓰는 모습을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송출하면서 참여자들도 각자의 글을 쓰도록 독려하자는 기획이었다.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기획팀의 메일도 반가웠지만 1시간 강연료가 25만원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그날 방송 전에 미용실에 들렀다. 1년에 두세 번 갈까 말까 하는 미용실에 예약을 하고 갔더니 J 선생님이 “엇, 이번엔 빨리 오셨네요!”라며 반겨주었고, 나는 “아, 오늘 어디 좀 가거든요”라고 쑥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에 J 선생님이 더 신이 나서 “아~ 그래요? 어떻게 해드릴까요?”라고 물었고,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해주세요. 너무 티 나지 않게”라고 수줍게 대답했다. J 선생님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그럼 꾸안꾸로~!”라고 말했고 그렇게 해주었지만 촬영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땀도 흘리고 바람도 맞는 바람에 정말 티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온다.  


J 선생님은 결혼해서 지방의 어느 도시로 갔다고, 오늘 내 머리를 염색해주고 다듬어준 젊은 남자 선생님이 알려주었다. J 선생님 대신 무슨 이유로 당신이 내 머리를 만지고 있느냐고, 새로운 담당은 어떻게 정해지는 거냐고 말하진 못했다. 그도 속으로는 운이 더럽게 나쁘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물론 친절했다.  그래도 되는데 말을 자주 걸어주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며 그가 재밌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읽는 거라고 대답했다. 앞으로 염색을 계속 할 거냐고 그가 물었고 나는 10년만 더 해보고 그다음부턴 그냥 놔둘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그가 물었고 나는 벌써 마흔이 넘었다고 대답했다. 잠시 침묵. 그가 결혼과 아이에 대해 물었고 나는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없다고, 아마 못 낳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잠시 침묵. 나는 J 선생님이 그만두어서 아쉽다고 말했다. 그도 아쉽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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