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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선 Aug 23. 2021

처서處暑

08.23.(양력), 태양 황경 150°

‘여름의 더위가 그친다’는 뜻을 지닌 절기다. 처서 무렵에는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하고, 여름 동안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포쇄(曝曬: 책·곡식·의복 등을 햇빛에 말리거나 바람을 쐬어서 습기를 제거하는 것)했다. 처서에 비가 오면 그동안 잘 자라던 곡식도 흉작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나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 영화를 만든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영화를 오늘 봤다. 넷플릭스에서 해준 《혼자 사는 사람들》(2021)이다. 타인에게 대체로 몰인정하고 무감각한 독거 청년이 (그래서) 콜센터 업무만큼은 잘하는데, 어느 날 인정 많고 따뜻한 신입 직원을 만나게 되면서 지금껏 별 탈 없이 (사실은 위태롭게) 이어지던 혼자만의 삶에 균열이 생긴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또 콜센터 얘긴가 했다가 끝내는 울고 말았다. 콜센터는 이상하게도 내게 그런 곳이다.


얼마 전에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KBS 독립영화관에서 《젊은이의 양지》(2020)를 해주는 것을 봤는데 콜센터 장면에서 그만 사로잡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콜센터가 배경으로 나오면 자동으로 그렇게 된다. 어떤 인물이 나오는지, 어떤 모습을 어떻게 담았는지 들여다보게 된다. 계속 볼지 말지도 거기서 결정된다. 몇 달 전에는 콜센터 업무를 AI가 대신하는 근미래를 그린 tvN 드라마 《박성실 씨의 사차 산업혁명》(2021)도 그렇게 끝까지 봤다. 세 편 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담겨 있어서 혹시 작가가 콜센터에서 일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영화와 드라마를 위해 잠입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작가로 돈을 벌지 못하던 시절 생계를 위해 잠시 머무른 걸까 짐작하곤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단순히 극의 내용을 떠나 작가와 감독에 대한 동질감 비슷한 게 생겨버려서 과연 콜센터라는 배경으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놓았을지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는 것이다.


나 역시 이십대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거기서 일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지만 도망치기도 여러 번 했고, 그만큼 견디기 어려운 곳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고, 그때의 기억을 몇 편의 이야기로 끼적여본 적도 있다. 《혼자 사는 사람들》과 흡사했지만 이야기란 저마다 운명이 있어서 어떤 것은 이처럼 영화가 되어 세상에 나오고, 어떤 것은 공모전 예심에도 오르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혹은 채 이야기가 되지 못하거나. 시간이 지나 어영부영 끝나버린 그 시절 나의 이야기는 『나의 비정규 노동담』(2019)의 한 챕터(「call me by」)에 고이 담아 놓았으니 혹시 궁금하신 분이 계시다면…….


《혼자 사는 사람들》에서 울었던 부분이다. 일은 힘들고, 선배는 도무지 친해질 여지를 주지 않고, 귀에는 전화 연결음이 이명처럼 들리는 신입 직원 수진은 어느 날 연락도 없이 출근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닌 진아는 이번에도 모른 척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일련의 사건을 겪고 비로소 수진을 떠올리며 전화를 건다. 덥석 죄송하다고 말하는 수진에게 진아는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잘 가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진아의 고백에 전화기 너머의 수진이 오랫동안 흐느낀다. 나는 휴지를 찾아 울면서 생각했다. 너무 좋은 대사야. 너무 좋고말고. 엉엉.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오늘은 처서다. 내 오랜 데이터 상으론 해마다 8월 18일이면 더위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입추와 처서의 중간쯤 되는 날이다. 앞뒤로 며칠의 오차가 있겠지만 좌우간 8월 18일로 딱 정해놓고 슬슬 여름과 헤어질 준비를 하며 가을을 기다렸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어느덧 십 년 전 얘기다. 언젠가부터 나의 데이터보다 훨씬 빨리 여름이 가버렸다. 올해는 입추였던 지난 8월 7일부터 선선해지더니 9월에서야 찾아오던 가을 태풍이 벌써 와 있다. 올해도 변변한 작별 인사 없이 여름을 보내버린 기분이다.


그나저나 처서에 비가 오면 그동안 잘 자라던 곡식도 흉작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데, 과학적인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은유로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다. 지난겨울부터 조금씩 써온 글을 이제야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 이제 편집과 디자인과 인쇄와 제본이 남았다. 홍보와 유통은 그다음에 생각하자. 작년 12월에 만든 『겨울특집』(2020) 이후로 오랜만이라 이 모든 과정을 차질 없이 잘 진행할 수 있을지 문득 두려워진다. ISBN 발급은 어떻게 하는 거더라? 다행히도 올해 언리미티드 에디션(UE100)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글을 세상에 내보낼 명분이 생겼으니 그때까지 최대한 준비해볼 예정이다. 이제 진짜 여름이, 갔다. <끝>


처서인 오늘 코로나19 잔여 백신 접종 예약을 용케 했는데 하고 보니 AZ였다. 빨리 맞고 싶은 마음에 그만. 아무튼 1차 접종 잘 마쳤다. 기념할 만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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