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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경 Sep 30. 2023

학교교육은 최후의 보루?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하다 보면 인간의 본성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의 태도와 습관을 보는 것은 인간 본성의 근원에서부터 다듬어지는 섬세한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감정과 욕구, 생각, 양심 모두를 내포하므로 다채롭고 까다롭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본성이 선하다, 악하다를 따지기는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 혼자 살더라도 스스로 떳떳하고 자유롭게 살기 위한 세상을 위해 인간으로서 가치로운 삶을 사는 것이 동물과 다르게 인간으로 살아가는 태도라고 했을 때, 자신과 타인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본성은 분명 존재하며 나는 이것을 '악'이라 정의하겠다. 이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을 도덕이라고 보고, 사물의 이치에서 선과 참이라고 본다. 이 선과 참을 실천하는 것이 스스로든, 타인과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든 파멸하지 않고, 파멸시키지 않는 길이다. 그런데 이 선과 악의 기운은 확장성을 갖는다. 악함은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세계 곳곳을 누비듯 퍼져 나가며 사회의 곳곳을 파멸시킨다. 


가부장제 사회,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경력 단절은 고학력자인 여성도 가정에서 육아가 전부인 삶을 살게끔 만들었다. 여성은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이며 아이를 키우는 일이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일과 동시에 아이가 곧 그들의 역린이 되어 아이에 대한 사소한 지적이나 훈육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홈스쿨링'이니 '엄마표' 학습, 놀이, 육아 등이 정체성이자 직업이 되어 인간의 본성 중 '자아실현' 욕구를 해소는 통로로 표출된다. 카이스트를 나왔노라며 유치원 선생님에게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은 학부모는 '카이스트'라는 대표적인 학벌을 거짓으로 과시하며 자신의 열등감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교사에게 표출하였고, 그녀는 '엄마표', '홈스쿨링'과 관련된 책의 저자로 자신의 '자아실현'을 '엄마표'로 이루는 사람이었다. 또는 뚜렷한 직업이 없고 시간은 많아 늘 브런치 카페에 모여 수다나 떠는 여자들이나 익명의 단톡방 등에 모여 집단 권력을 행사하거나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자신의 열등감이나 불만을 남을 깎아내리고 비방하는데 쓰는 사람들이 있다. '열등감'과 '사회적 욕구' 등의 이드와 에고를 넘나드는 인간의 본성을 타고, 학교나 선생을 마음대로 휘둘러서라도 권력을 부리고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싶은 욕구를 드러낸다. 특히, 익명방에서는 이러한 본성이 더욱더 폭력적인 민낯으로 더욱 과장되어 표현된다. 인간의 본성 중 적개심과 공격적 본성이 사회적 가면을 벗는 익명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빈부의 격차는 날로 커지고 극명하다. 이제는 누가 부자이고 가난한지, 어느 만큼 부자이고 어느 만큼 가난한지 뚜렷하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SNS, 유튜브 등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이 대놓고 부자를 따라 하고 가난을 업신여기는 말과 행동을 한다. 예전에 기생충 영화는 이런 양극화를 대놓고 보여주며 잔인하게 사실을 직시하게 해 주었다.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우(최우식 분)가 이 집을 사겠다는 계획을 내레이션으로 말하는 장면에서 모든 관객은 안다. 기우는 이 집을 평생, 결코, 아무리 노력해도 살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자본주의의 결과는 어떤 방법으로든 성공하면 되고 폭력과 악행의 근거로서 작동한다. 돈과 인기(인기를 통해서 돈을 얻으므로)가 있으면 선이든 악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또한 자본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많은 이에게 좌절과 패배감, 상실감을 준다. 그러한 좌절과 패배, 상실감 또한 악한 본성이 되어 파도를 타도 파멸을 불러일으킨다. 


공권력의 힘이 국민의 인권과 자유의지를 유린하던 군사독재, 전체주의가 난무하던 시절에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 자유주의가 대안과 발전이었다. 그러나 자유와 권리, 책임과 의무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제는 균형이 깨지고 자유만 있고 의무나 책임이 없는 사회가 되어 간다. 특히 학교나 공적인 일을 담당하는 기관을 서비스업으로 생각하여 자신이 낸 세금으로 서비스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오개념이 성숙한 민주와 자유를 이룩하는데 정책적으로 잘못 자리 잡히게 됨에 따라 학교를 교육 공급자로 설정하여 교육 수요자가 원하는 교육을 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밑바탕을 심어주었다. 이런 오랜 풍토는 위에 나열한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지금의 학교교육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학교교육은 최후의 보루인가?

현재 사회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극에 달하고 세대 간의 혐오까지 겹쳐 인간이 괴물이 되어가기에 적절한 환경이다. 학교에서 일진과 일베놀음이 만연하다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가 되었다. 이러한 악의 기운이 돌고 돌아 거대한 해일이 되어 학교에 다다랐고 파멸의 위협에 휩싸이고 있다. 학생들을 바른 길로 이끌고 내 자식이 아니지만 내 자식처럼 가르치는 교사가 이미 여러 명 희생되었고, 많은 교사들이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가정과 학교, 사회가 함께 협력하여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 나가야 하는데 그 희망이 점점 빛을 잃어간다. 가정이 우선적으로 바른 것이 무엇인지, 선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여 바르게 자식을 가르치고 양육(사랑과 헌신, 부모로서의 독립이 필요하다.) 해야겠고, 사회와 국가의 체계가 교사와 학교를 보호하고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늘봄정책을 만들어 부모에게 늦게까지 일하도록 하여 아이를 학교에 떠맡길게 아니다. 태어나보니 금수저, 다이아몬드 수저가 나오는 자본 시장을 방치하여 청년들이 출산은커녕 결혼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면, 아이를 키워 나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키울 아이도 없게 될 것이 너무 뻔하다. 


#학교 #가정 #국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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