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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경 Oct 22. 2023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독서 감상문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나를 가로막은 것은 바로 나였다.>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 내림으로부터 시작한다. 행복한 삶의 정체는 무엇일까?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일까, 내부로부터 생겨나는 것일까? 쾌락을 주는 도파민과 세로토닌 같은 호르몬의 영향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신체 현상이 곧 행복이라고 정의 내릴 순 없다. 행복은 분명 호르몬의 작동에 의한 생리학적 반응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행복은 호르몬과 감정의 상관관계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하며 삶의 많은 과정 안에 담겨 있다. 불행은 행복의 반대말이 될 수 없다. 불행하지만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마치 외부로부터 오는 것 같으나 내부에서 비롯된다. 또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행복이 될 수 있다. 내가 가진 기질, 성격, 말투, 생김새, 걸음걸이 등 나 자신을 가치롭고 존엄하게 여기며 살아간다면 그 삶이 곧 행복이다. 원래 삶은 희로애락을 모두 동반하고, 그렇기 때문에 살맛 나는 것이기에, 행복은 삶의 모든 과정 안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 자체가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의 의미를 스스로 정의하고 나니 더 행복할 수 있는 나를 가로막은 것이 바로 나임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작가의 시선처럼 나 또한 자꾸 부족한 나를 채우기 위해 다른 상태의 나를 갈구하며 온전하게 나를 사랑해 주지 못했다. 이상적인 상태의 다른 내가 되기를 꿈꾸며 자꾸만 부족한 나를 채워나가기 일쑤였다. 물론 욕심을 부리고 이상의 나를 꿈꾸는 것도 나의 모습 중 일부이다. 그래서 그 모습 또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받아들이니 그러면서도 매번 실패하여 좌절하기도 하고 부족하게도 느껴지던 나의 모습에 허탈감이나 자괴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기특하고 대견해진다. 못난 도약과 추락이었지만 그 자체로 행복감이 찾아온다. 기특하고 특별해진다. 마음을 다르게 먹고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니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바로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말한다.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수많은 상처를 주며 살아왔는데 부족하기만 한 나를 사랑해 주고 염려해 주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구나. 문득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문득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함께 애쓰는 길을 가고 있는 친구들, 동료 교사들,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 생각해 보면 오랜 세월과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 한 곳에 오래 살고 있고, 교대를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친구들도 정말 오랜 친구들이다. 친구들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함께 이 길을 가는 동료 교사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산다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 다치지 않고 행복해하는 것을 보는 것이 정말 큰 행복이고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 가족이 없었으면 난 어떤 모습일까? 서로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알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가족뿐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서서히 독립해 나가고 있지만 아직은 가족 울타리 안에서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대학 1학년 때 만나 정말 오랜 세월을 함께한 남편은 지금도 나를 한결같게 아껴준다. 나는 그게 가끔 신기하기도 하지만 우리 남편은 그렇게 한다. 아버님도 어머님께 극진한 걸 보니 아마 유전이 아닌가 싶다. 나는 내 스트레스를 남편에게 자주 푸는 편인데 남편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푼 적이 거의 없고, 늘 친절하고 날 자주 웃겨 주며 정성을 다한다. 그런 남편이 너무 고마우면서도 아이들을 힘겹게 양육할 때, 바쁜 남편이 퇴근이 늦어져서 혼자 독박 육아, 살림을 할 때는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차오른다. 그렇게 마음은 요동을 치나 다시금 돌아보면 각자의 자리에서 정성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정성을 다하여 가족을 지키며 사는 부부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삶을 잘 사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상 무엇보다 감사한 일이고 가장 바라는 삶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소원을 빌거나 덕담을 나눌 때 항상 하는 말이다. 평안하고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사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고 바라는 소원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음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나이 듦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나와 동갑내기인 유명 가수 이효리가 신곡을 발표했다. ‘후디에 반바지’라는 제목의 곡이다. 노래 제목에서부터 젊음과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노래에 맞춰 후드티와 반바지를 입고 춤을 추는 그녀를 보며 나이나 시간의 굴레가 정형화된 인식에 기인한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인터뷰에서 그녀가 이렇게 활동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녀보다 언니들인 엄정화, 김완선이 너무나 멋지게 공연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들도 그녀 못지않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이의 장벽이 무너졌다고는 하나 사십 중반이 넘어가며 뭔가 거대한 일을 시작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뭔가를 시작하기에 몸과 정신이 익숙해진 것이 너무 많아지기도 하였고, 굳이 뭔가를 도전하고 새로 시작할 이유가 사라지고, 체력도 예전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하지만 지금이 뭔가를 하겠다면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은 귀찮다는 이유로 시간이나 나이, 체력의 핑계를 대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귀찮음은 두려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선택을 안 하는 것일지 몰라도 더 시간이 지나면 선택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효리의 선택은 나에게 큰 용기와 도전이 된다. 물론 연예인의 삶은 많이 다르기도 하겠지만,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오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나에게 사십 중반의 나이는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용기 있는 도전’에 대한 변곡점이 되는 듯하다. 성인 발달심리학의 선구자인 에릭슨은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체를 계속되는 발달의 단계로 보았는데, 장년기(30~65세)를 한창 일할 나이이며 다음 세대에 전할 무언가를 남기는 생산에 기여하는 때라고 하였다. 이 시기의 한가운데에 있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구를 실현하고 세상과 연결되어 남기고 싶은 무언가에 대한 책임을 수행해야 하는 때임을 직감한다.

  나이가 든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지금도 두려운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이다. 흔히 별의 탄생과 소멸을 인생에 비유하는데, 수십억 년 동안 빛을 발하던 별이 수소가 고갈되면 붉은 거성이 되고, 붉은 거성이 폭발하여 초신성이 된다. 초신성 폭발은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하여 우주에 새로운 원소를 생성하고 이 원소들은 새로운 별과 행성의 형성에 사용된다. 이삼십 대에 빛을 발하다가 거성이 되어 절정의 시기를 살아가는 것이 사오십대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거성의 시기는 초신성이 되어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하며 우주에서 사라지기 전의 단계이다. 우주에 새로운 원소를 생성하고 새로운 별과 행성으로 우주가 지속되기 위해서 있어야 하는 단계이다. 사십 대부터는 붉은 거성과 초신성이 되어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다 방출함과 동시에 세상에 필요한 일을 생산해야 하는 우주의 책임이 함께한다. 에릭슨이 말한 다음 세대에 전할 무언가를 남겨야 하는 시기와 일맥상통한다.

  지금 나는 붉은 거성이 되어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낼 초신성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바쁘게 아이를 낳고 키우며 세상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살았던 삼십 대와 실수와 시행착오가 가득했던 이삼십 대 교사로서의 삶도 있었다. 미성숙했으나 나의 빛을 환하게 내던 시기였다. 지금은 성숙하게 무르익었으나 겸손하고 단단하게 붉은빛을 내며 무엇을 세상에 남길지 세상에 필요한 일을 찾아 나서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우주의 섭리에 따라 세상의 순환과 맞물려해야 할 과정을 수행해야 하는 시기이다. 화려한 청춘과 젊음을 간직하기를 바라고 붙잡게 되나,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원소를 내뿜고 가는 별과 같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며 후반부를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것임을 깨닫는다. 나이가 든다는 게 전혀 두렵지 않게 느껴진다.     


<때로 버티는 것이 답이다>

  노력이 능사는 아니다. 노력하지만 안 되는 일이 분명히 존재하고, 노력하는 게 때론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던 ‘1만 시간의 법칙’이 틀렸다고 말하는 연구 결과가 쏟아진다. 특히 Chat 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의 발달은 노력의 기준마저 재정의하며 시간에 비례한다는 노력의 개념을 뒤바꾼다. 시간만이 아닌 방법이나 전략 등 노력의 개념을 설명하는 하위 요소가 점점 다양해진다.

  노력의 배신(김영훈, 2023)에서 노력은 자기 조절 능력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자기 조절력, 즉 버티는 능력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반복적으로 오래 걸리는 일을 할 때, 힘들고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조절하는 힘은 버티는 힘이다. 포기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전환한다거나 엉덩이 힘으로 버티는 나만의 루틴을 만든다거나, 인공지능을 활용한 전략적 접근으로 시간을 단축하여 지속가능한 버팀으로 끌고 나간다거나 하는 전략 등 자기 조절이 필요하다. 이처럼 노력의 일종인 자기 조절력은 세상을 살아가며 삶의 주인으로서 내 삶을 끌고 가는데 정말 필요한 능력이다. 왜냐하면 누구나에게 고비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지혜롭게 넘기느냐 하는 것은 삶의 중요한 과제이며 승패를 좌우하는 특별한 능력이다. 무언가 깊이 있게 연구한다거나 성과물을 낼 때, 고비를 지혜롭게 넘길 때, 버티는 것을 잘하면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버티는 자기 조절의 힘으로 미숙하게 태어난 우리가 성숙해 나갈 수 있다. 떫어서 먹을 수 없는 땡감에서 맛과 영양뿐만 아니라 동물이건 사람이건 누구나 먹을 수 있어 만물이 자라는 열매인 홍시가 되어 가는 과정이 삶이라 생각한다. 버티어 내는 시간과 기다림, 바람, 햇빛, 심고 가꾸는 자의 정성이 없으면 홍시는 얻을 수 없다.


#만일내가인생을다시산다면 #김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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