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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중 Feb 11. 2021

옆자리를 만들어 나간다.

쓸모 없는 삶을 위한 선언

 "존재하지 않는 숲, 읽을 수 없는 문자, 모델이 없는 이미지를 너에게 만들어줄게. 언제나 새처럼 허공에 떠 있어. 태양에 취하지. 수다스럽고, 텅 빈 아파트의 사방팔방에서 노래해. 호화 저택에서 다락방으로, 또 시골에서 도시로 오가고. 내일 어디에서 일하게 될지를 오늘은 몰라. 언제나 새로운 동료들과 새 인물들이 있어. 도처에서 신참들이 오지. 성밖 지대 어디서나 한상 차려주고. 층마다 다 아는 이들. 그러니 언제나 좋은 하루"                                                             - 자크 랑시에르, 『프롤레타리아의 밤』, 문학동네, p.24  

   

  위 글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박사논문인 『프롤레타리아의 밤』중 일부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생각과 예술로 가득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먹고 살기 위해 낮에는 일을 하지만, 자신의 온전한 삶을 위해서 밤에는 쓸모 없는 생각과 상상을 이어나갑니다.  우리는 이 무용한 것을 위해 유용한 것을 견뎌내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된 일에 치이고 쓰러지다보니, 무엇이 우리의 삶에서 우선인지 잊게 됩니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데 익숙합니다. 휴일 늦은 아침에 티비를 틀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다 보면 효능을 선전하는 각종 식품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뉴스를 보면 개인투자자들이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당장 나도 그 식품을 사서 먹어야 할 것 같고, 지금 주식시장에 뛰어들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기분입니다. 뒤처지고 있다는 기분은 항상 우리를 움직이게 해줍니다.


  우리는 평생 경쟁에 뛰어들어 살아왔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순서를 매기는 곳은 학교만 있지 않습니다. 힙합을 해도, 춤을 춰도 순위는 꼬리표처럼 따라붙습니다. 방탄소년단의 세계적인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아이돌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 가혹한 수련 생활을 겪어야만 하는 아이들이 뒤따라 생각납니다. 많은 아이들이 이 과정에서 우울증을 얻고, 실패와 좌절을 경험해야만 하니까요.


  경쟁이 발전을 이끌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어느 한쪽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실패는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하고, 성공은 또 다른 실패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동전을 뒤집듯 성공과 실패만이 유일한 결과이고, 그 결과로 모든 과정을 정의하는 것은 너무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가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또한 경쟁이 우리 사회의 유일한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이 이분법을 벗어날 대안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죠.


  제가 이제부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이 대안에 대한 것입니다. 예술은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저는 예술을 통해 위안과 힐링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여기에는 고통과 좌절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만나게 될 삶들은 무너지고, 쓰러지고, 잊히는 삶들입니다. 이 삶 속에는 영웅도, 악당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점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삶들을 천천히 보고 났을 때, 여러분들의 옆자리에는 어느새 좋은 친구들이 남을 것입니다. 이 친구들은 우리의 눈물을 멈춰줄 수는 없지만, 같이 울어줄 수 있습니다.


  어떤 예술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우리도 누군가의 친구가 될 수 있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미 영화입니다. 단지 우리가 개봉했는지를 몰랐을 뿐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앞뒤로 서는 법에 집중하다보니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법을 잊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서로를 다르게 봅니다. 유용한 것만 찾는 삶, 경쟁하는 삶은 우리를 한 줄로 서게 합니다. 그 줄에서 우리는 서로의 뒤통수만 쳐다볼 뿐입니다. 하지만 무용한 것을 위한 삶, 예술하는 삶은 우리를 서로의 옆에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손을 맞잡을 수도 있고, 서로의 눈을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안희연 시인의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에 수록된 「백색 공간」이란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란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 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밤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안희연, 「백색 공간」,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중 일부     



  시에서 말을 전하는 이, 즉 시적 화자는 항상 자신이 보지 못한 저 너머의 삶을 궁금해합니다. 그 삶은 손톱자국이 가득한 절벽, 물 속에 잠긴 계단입니다. 고통과 좌절로 가득하죠. 시적 화자는 그런 공간을 상상하기 위해 행복을 강요하는 이를 다른 곳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는 둥글게 모여 앉은 사람들을 상상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옆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은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처럼 연약하지만, 그의 옆에는 새로운 옆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옆자리 만들기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규칙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위의 시가 이제부터 이야기해드릴 모든 글을 대표한다고 생각해서 인용했습니다. 잠시 저와 함께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새로운 옆을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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