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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중 Feb 12. 2021

영화, ‘함께’라는 경험

<시네마 천국>을 통해 살펴본 영화적 경험과 삶

  처음으로 무슨 작품을 말해야 할지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시, 소설, 미술 등등 떠오르는 작품은 많았지만, ‘처음’이라는 위치에 놓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내 글의 가장 큰 목표는 예술을 함께하는 경험을 쌓는 일이다. 그래서 처음은 영화를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영화만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예술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이제 남은 숙제는 무슨 영화를 말해야 할 지에 관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영화와 ‘함께’라는 주제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는 <시네마 천국>밖에는 없다.      



  나는 영화를 떠올리면 영화관을 먼저 떠올린다. 기억상 살면서 처음 가본 극장은 충무로에 위치한 대한극장이었다. 그때 아마 <태양의 눈물>을 봤던 것 같은데, 영화 내용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봤다는 기억만은 선명하다.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가서 엄마의 발걸음을 뒤에서 쫓으며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마치 누군가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은 것처럼 ‘우리’의 자리에 앉아 영화를 봤다. 그래서 영화를 본 기억은 어떤 다른 문화 경험보다 강력하게 남아있다. 나에게 영화는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일이었다.




  <시네마 천국>은 ‘함께’ 보는 영화라는 경험을 갖고 싶어 하는 모두를 위한 영화다. 영화를 본다는 일은 누군가와 만나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삶을 공유하는 일과 다름이 없다. 이 영화에는 유독 영화를 보는 이들을 찍는 장면이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본다. 어느새 우리는 그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 그렇게 한참 빠져서 함께 하다 보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영화가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토토의 본명은 ‘살바토레 디 비타’이다.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에 삶(Vita)이 들어 있다. 그리고 영화는 토토의 유년부터 중년까지의 삶을 비춘다. 가난 속에서도 영화를 사랑하고, 나이를 뛰어넘는 친구를 만들고, 첫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바쳐 그녀를 사랑한다. 젊은 날의 토토는 시칠리아의 뜨거운 열기를 닮아 열정적으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간다.



  


  이 영화가 매력적인 까닭은 삶이란 글자를 담은 주인공의 이름처럼 삶을 너무 진실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이 담겨 있는 곳은 시칠리아라는 공간이다. 삶(Vita)으로서의 토토를 이야기하면서 공간을 빼놓을 수는 없다. 공간이란 그릇과도 같다. 이 영화에는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도, 악한 인물도 없다. 다만 세월과 역사 속에서 집요하게 시칠리아의 한 마을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아무리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해도 자신이 살아가는 그 공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밖의 세상은 때로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프레임 속 세상이라면, 항상 프레임 바깥의 세상은 프레임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기 마련이다.      



  너무나 평범한 마을 속에서도 이념, 계급, 지역 갈등이 숨어 있다. 스탈린주의 자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은 마을을 떠나야만 했고, 극장은 경제 계급에 따라 다른 위치에서 영화를 본다. 제2차 세계대전이란 현실은 시칠리아 바깥에서 일어나지만, 토토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 모두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도 영원할 것처럼 일상을 유지하지만, 알프레도의 말처럼 떠나고 돌아오면 속절없이 변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극장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유럽에서는 과거의 성당이 그런 역할을 했듯이(극 중 초반부에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신부다), 극장은 모두를 함께 모이게 해주는 곳이다. 극장은 광장 근처에 있어,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광장에서 웃고 떠들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리고 극장이 닫혔을 때는, 영사기를 돌려 건물 벽면에 화면을 비추면 광장이 곧 극장이 된다. 함께 모여서 영화를 즐길 수 있다면, 그곳이 곧 극장이었다.





  극장 이름이기도 한 <Cinema paradiso>는 정말 천국이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들이 잠시나마 프레임 밖의 현실을 잊고 자기감정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이다. 비록 주인이 바뀌고, 극장의 성격도 점점 바뀌지만,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다는 사실만은 바뀌지 않는다. 마치 시칠리아의 바다는 계속 푸르듯이 영화는 그곳에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영화의 후반부 시칠리아를 떠나 로마에서 감독으로 성공한 중년의 토토는 유독 외로워 보일 수밖에 없다. 더는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의미를 잃어버린 듯, 계속해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삶을 반복할 뿐이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공간은 영원할 것 같았지만, 극장 시네마 천국마저 시간 앞에서는 바스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바뀌지 않는 것은 영화라는 ‘경험’이다. 토토는 알프레도 남긴 필름을 조그만 상영관에서 홀로 보지만, 사실 영화를 처음부터 보고 있던 ‘우리’ 또한 토토와 함께 이를 보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수많은 고전 명작들에서 편집되어 나온 연인들의 키스 장면은 영화라는 삶이 결국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극장에 자주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 또한 올해는 한 번도 극장을 찾지 못했다. 더군다나 넷플릭스, 왓챠 등 OTT 서비스가 크게 성장해서 굳이 극장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관’이라는 장소와 영원히 분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분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혼자 영화를 보러 가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하나의 공간 안에서 영화를 ‘경험’한다는 것은 순간의 영원함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코로나 19로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방역수칙만 잘 지킨다면 아직도 극장에서는 좋은 영화들이 많다. 나도 <세 자매>라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기로 마음을 먹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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